202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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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의 역사서사시 연재 2- 한미관계 150년>
1866년 미국의 철갑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대동강으로 침범해 외쳤다.
“문을 열라”
식민지 진출과 군사적 위협이었다.
평양 사람들이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배는 불탔고, 미국 선원들은 전멸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첫 만남은
저항의 화염 속에서 기록되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닌 열강 침략의 시작이었다.
5년 뒤인 1871년, 기함 콜로라도가
군함 다섯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포성이 하늘을 찢고
초지진의 돌담에 선혈이 낭자했다.
신미양요다.
미국은 통상을 아니, 정확히는 이익을 원했다.
조선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신들의 몫을 챙기길 원했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악수는 조선의 빗장을 여는 열쇠였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를 요구했다.
그것은 시작의 시작일 뿐
형태 바꿔 150년 이어졌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계기
발생한 청일전쟁 후
1895년 10월 경복궁 옥호루 새벽,
일본 자객들이 난입해
명성황후 황후 칼로 찌르고 시신 불태웠다.
명성황후의 피가
경복궁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불길 속에서 타오른 것은
한 여인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한 궁궐에
공포 가득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공관들이 분노해
"고종을 보호하고 조선을 유지하자"
손을 내밀었으나,
미 국무부는 단호히 거절하고
서울 공사에 전문을 보냈다.
"개입하지 말라, 오직 중립의 장막 뒤에 숨어라."
대한제국의 국운이 짓이겨지는 동안
미국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조선의 군주,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자주를 구걸하며
워싱턴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미국이 앞장서 달라.”
1899년 매킨리 대통령은 그 편지를 읽고
서울의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거부하라.”
1900년 동경에서 조선 공사가
미국 버크 공사를 붙잡고
"서구 열강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케 앞장서 달라"
눈물로 호소할 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침묵.
미국은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무릎 꿇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제26대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1901년 일본의 조선 강점을 방조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기업들을 통해
일본에게 전쟁
자금(7억 엔. 현재 가치로 14조 원)을 빌려줬다.
.일본이 그 돈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러시아에게 승리한 뒤
조선 점령을 향한 입지를 확보했다.
분하다. 1905년 7월 두 국가의 밀거래!
가쓰라와 태프트가 맺은 비밀 협약
필리핀을 탐한 미국과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의 추악한 거래 속에서
조선의 숨통은 산 채로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이익을 나눈 자들의 악수 위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선은 물건처럼 거래됐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주일 뒤, 미 국무부가
서울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영사관을 폐쇄하라.
조선에서 철수하라.
모든 업무는 도쿄에서 처리하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불이 꺼졌다.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 문도 닫혔다.
그해 12월 16일 조선은
미국의 지도에서 지워졌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종식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1910년 8월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경술국치의 치욕 속에
나라가 통째로 삼켜질 때
그해 9월,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총독부의 칼날 아래
언어가 잘리고
역사가 찢기고
농민의 논밭은 빼앗겼다.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긴 채
피눈물 흘리던 조선의 백성들,
무단통치에서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민초들의 심장은 계속 분노하고 있었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삼천리강산을 뒤흔든 대한독립만세!
무장전쟁을 외친 무오독립선언과
도쿄의 2·8 선언을 거쳐
온 겨레가 붉은 피로 써 내려간
비폭력 혁명이었다.
만세.
대한독립 만세.
골목마다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학생과 농부, 기생과 승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맨손으로 제국의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은 믿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한 민족에게도 태양처럼 비칠 것이라고.
그러나 미국의 훈령은 달랐다.
“조선인들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지 않게 하라.”
“일본이 오해하지 않게 하라.”
그 문장은 총칼보다 더 차갑게
독립운동을 외친 민초들의 가슴을 후볐다.
윌슨이 전 세계에 외친
거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고
강대국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출신 대통령이
1918년 가을, 억압받는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민족자결주의를 세계 앞에 선언했다.
세상의 약자들이 그 말에 귀를 세웠다.
조선도 귀를 세웠다.
만주 지린에서 독립선언 함성이 터져나왔다.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거리에 섰다.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대한독립만세.
윌슨은 그 소리를 들었는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는가.
아니면 정말 들리지 않았는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미 국무부가 도쿄의 미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서울의 미 영사에게 전달하라.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라.
일본 정부가 미국이 조선 독립에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이었으나,
1차 대전 패전국(독일, 오스만제국) 식민지와 영토에 적용되고
승전국(영국·프랑스·일본·벨기에 등) 식민지는 배제되었다.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 이기주의 앞에서 정의는 없었다.
윌슨은 위선적인 평화주의자의 연기만을 했을 뿐이다.
조선에서 만세 소리는 총성에 묻혔다.
유관순이 잡혀갔다.
7천 명이 넘게 죽었다.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수만 명이 투옥됐다.
미국은 침묵했다.
민족자결을 외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의 절규를 외면했다.
윌슨은 만세 운동으로 죽어가는
조선의 영혼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지지나 동정의 언어도
던지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화려한 홀에서
약소민족의 절규는 문밖에 멈췄다.
민족자결주의는 강자의 해괴한 논리였고
조선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1920년과 30년대의
긴 밤 동안
미국은 일제의 포악한 식민 지배를 철저히 외면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 영국 등은 철저히
악취 나는 이익만을 계산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해야 했다.
세월은 흘러 다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포성이
진주만을 피로 물들인 후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 시작했다.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함대가 불탔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청원서가 워싱턴을 헤매고 다녔다.
조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
합법적 정부로 승인해 달라.
미국 정부는 외면했다.
접견조차 쉽지 않았다.
자유중국이 조선 임시정부 승인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며
그 법통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만났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
오만한 합의 외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선언 속에도 조선의 운명은 모호했다.
독립시킨다는 적절한 시기가
누구의 시간인지 조선인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연합국의 우두머리들이
또 다른 지배를 준비하고
자국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의 조건들이었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응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탐욕의 결과물이었다.
1945년 8월 초
원자폭탄 두 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도 희생됐다.
일제가 무릎 꿇자
강대국들은 동북아 지도를 놓고
전후 이익을 계산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쪽을 바라보았고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계산했다.
한반도는 전략 요충지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갈,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할 출발점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한반도와 일본 전체를
소련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원자탄 위력에 소련이 주춤했다.
미국의 의사대로 38선이 그어지고
한반도가 두 동강 났다.
미 국무부 문건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참작하면서
조선을 일본과 함께 전리품으로 분류했다.
조선인은 그 문건에 없었다.
조선인의 의견을 묻겠는
절차도 생략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해방되었다면서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두 개의 점령군, 두 개 진영의 이익이 우선하면서
한 개의 민족이 두 동강이 났다.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 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서 확인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