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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6- 제주4·3, 한라산은 통곡한다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해방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서

점령군의 이름으로 말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은 다시 점령이 됐다.

제주에도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어제까지 일장기를 달고 조선인을 잡던 자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

제 민족의 살을 뜯던 자들.

그들이 돌아왔다.

이번엔 성조기 아래에서.

미군정이 그들을 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제주 사람들의 꿈은 다시 짓밟혔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제주 북초등학교 앞마당.

사람들이 모이면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이 아이를 쳤다.

아이가 피를 흘렸다.

분노한 군중이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했다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찰의 잘못이지만 정당방위였다.”

그들의 결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아이의 울음에서 시작된 것을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만들었다.

죽인 자가 피해자가 됐다.

맞은 자가 가해자가 됐다.

민심은 들끓었고

남로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전단지 부착, 사상자 구호금 모금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

23개 기관, 105개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제주 직장인 95%인 4만여 명이 참여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섬 전체가 울부짖었다.

미군정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카스티어 대령의 보고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

조병옥 경무부장 발언 : “90%가 좌익 색채”

27만 명의 섬 주민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육지에서 건너온 잔인한

서북청년단과 421명의 응원경찰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일 년 동안 2천5백 명이 잡혀가

좁은 유치장에서 앉지도 못한 채

생지옥의 고통을 당했다.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1948년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남한 전역에서 터져 나왔다

그 중심의 하나가 제주도였다

4월 3일 새벽 두 시

한라산 자락 오름마다 핏빛 봉화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급습했다

그들이 외쳤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조국의 통일독립."

"단독선거 반대."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로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까지 학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4월 17일 미군정 딘 군정장관이

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명령했다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

김익렬 제9연대장이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4월 22일 전단지를 살포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동족상잔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악수를 원한다.”

4월 28일,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진적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변 보장.

평화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5월 1일, 동족상잔을 멈추자던

사흘간의 평화는 대낮에 오라리 마을이 불타면서 깨져버렸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 주장했으나

김익렬은 현장조사 끝에 진범을 밝혀냈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방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의 보고를 묵살했다

CIC는 "폭도의 소행"으로 조작했고,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마치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된 가짜 영화였다

미군은 지상과 상공에서 불타는 오라리 동영상을

‘제주 폭동’의 소재로 악용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조병옥은 “계획된 공산폭동”이라며 강경작전 주장.

김익렬은 “경찰의 실책, 무력위압과 선무공작 병행”을 주장하며

조병옥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결론은 강경 진압이었다.

5‧10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됐다.

평화를 말한 자가 쫓겨났다.

학살을 선택한 자들이 남았다.

후임에 박진경 중령이 임명됐다.

미국 정부와 서울의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등)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내며

강경 진압에 목을 맸던 이유는?

냉전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었다.

당시 미국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했다.

남한단독 정부 추진으로

동북아에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남한은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고 싶었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미국 극동 아시아 정책의

성패가 걸린 최대 과제였다.

만약 제주도에서의 저항 때문에

5·10 선거가 실패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냉전 주도권을 소련에 빼앗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하면서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남한 전역에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에 반대했다.

특히 제주도에서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벌어지자 미국 정부는 크게 긴장했다.

미국은 제주4·3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사주라며

가짜뉴스를 앞세웠다

“소련 잠수함이 제주 연안에 출몰했다.”

남한 언론과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언론은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채질하는 도구가 되었다.

서울의 미군정이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로

둔갑시킨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민들을 '잔혹한 빨갱이'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묘사했고,

군경의 잔인한 초토화 작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진압으로 미화했다.

이 조작극은 제주도의 참상을 외면하고,

증오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3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초토화 작전에

잔인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전국의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선거를 외면해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게 된

브라운은 호언장담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2주일이면 평정된다.”

그는 초강력 작전을 지시했다

“경찰은 해안 4km까지 치안 확보하라.

경비대는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려라.

해안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라.”

작전이 시작돼 6주 동안 4천 명이 체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성공적 작전이라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후 제주도의 비극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깊은 광기와 초토화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여수 14연대가 제주 출동 명령을 받자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선언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마저 미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의 포화 속에 진압되고

3천4백 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제주도에 포고령을 내렸다.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인정해 총살하겠다."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뒤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눈 쌓인 겨울 한라산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게

협조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학살극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기록했다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 점령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마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불타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할아버지와 손자, 어머니와 젖먹이가

한자리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자들에 대해 증언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 불응,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입버릇처럼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했다.”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마약 중독자였다.”

토벌대의 총구를 피해 눈 덮인

한라산 깊은 숲으로 도망친 도민들,

늙은 시부모의 손을 잡고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부인들은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 한라산의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일본군 준위 출신 함병선이 이끄는

제2연대와 서북청년회로만 구성된 대대 병력은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사살하는

가혹한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1948영 11월 15일 가시리

군인들이 마구 총을 쏜 뒤 소개령을 내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표선리 표선국민학교에 수용해

‘도피자 가족’ 76명을 한 달 뒤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12월 18일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제9연대 제2대대가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시켰다

희생자 11명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취재반이

다랑쉬굴을 발견하고 현장조사해

언론 보도 이후 유족과 도민들이 건의했다.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

그러나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시멘트로 봉쇄되었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쳐졌다

1949년 1월 북촌리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틀 동안 300명 이상 희생돼

젊은 남자가 대부분 사라졌다.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이라 불렸다.

3월, 유재흥 대령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부임해

소위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

흰 옷을 매단 백기를 들고

1만여 명의 피난민이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이 제주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법의 최소한의 절차도 없는 불법적인 군법회의는

젊은 남자들은 사형·무기·15년형 등 중형,

여성들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죄,

결국 1,660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194명이

군인들에 의해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 한림지역 62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1956년 3월 몰래 수습되어

한림면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나머지 132명의 시신은

1956년 5월 유족들의 청원을 당국이 받아들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곳에 세워진 위령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백 명의 할아버지에게 한 명의 손자뿐이라는 뜻

그러나 5·16 이후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학살 현장에서는 총기류, 실탄, 뼛조각이 발굴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예비검속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로 폐지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적으로 부활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시했다.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

붙잡힌 사람들은 각자 안보에 미치는 위해 요인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고

8월 30일, 한국 해군 정보장교는

제주 경찰에 전문을 보냈다

“9월 6일 이전에 C, D 그룹을 전원 총살하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어 암매장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서귀포·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들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전국 각지 형무소에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1950년 7월경 집단 학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제주4·3은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한라산 입산금지 해제

공식적인 전체 사망자 14,03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이것은 공식 숫자다.

실제는 더 많다고 역사는 말한다.

제주 인구 27만 중 3만이 희생됐다.

어떤 이름은 기록됐다.

어떤 이름은 바다에 뿌려졌다.

어떤 이름은 섯알오름 흙 속에 묻혔다.

어떤 이름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실은 갇혔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기록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50년간

제주도민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고통은 짓눌린 채 견뎌야만 했다

외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미국이 주도한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 비극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대량 학살 책임자를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물론

시민권 회복 노력, 거짓 주장으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든 허물을 벗겨주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출범

그제야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2018년, 제주4·3 70주년

10만인 서명 운동

“미국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서 외쳤다.

그들의 요구

첫째, 미국은 제주4·3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라

둘째,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

셋째,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하라

이미 수많은 자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제주 학살은 미군정 시절,

미군이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후도 역시 미군이 지휘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되어

임시군사고문단 설치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의 임무는 무엇 이었는가.

대한군사원조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 이양과

한국군 편성 및 훈련지도

그뿐 아니라 한국치안대(육군·해안경비대·경찰)

조직, 관리, 무장, 훈련

38도선 방어, 불순세력 제거와 게릴라 침투방지,

해안질서 유지 자문.

국가기록원이 확인했다.

“미군사고문단이 제주4·3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제주4·3학살 책임을 공식적으로 가리는 작업,

그 심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최근 일각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자고 나오는 모습

친일파를 옹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군을 점령군에 준하는 특권을 준 독재자에게

기념관을 세우려는 그들

그것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제주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도 완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의 죄를 묻자는 외침은

“빨갱이”라는 낙인 아래 짓밟혔다.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끌려갔고,

해방의 꿈을 말하던 청년들은 총살되었으며,

정의와 통일을 말하던 목소리는 침묵 당했다.

친일은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일제를 섬기던 모습 그대로

새로운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들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세월이 흐르자

폐허 위에 세워진 경제성장의

빌딩들을 가리키며 노래한다.

“모든 것이 미국 덕분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겠다 다짐한다.

번영의 그림자 아래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의 신음이 묻혀 있었다.

제주 한라산의 검은 숲에서는

아직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예속의 사슬을 끊지 못한 통한의 70여 년,

독립운동가의 무덤 위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역겨운 몸부림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비극의 나라가 되었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진 세력이

여전히 역사를 지배하는 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미국의 비밀문서가 여전히 봉인되는 한.

3만의 이름이

모두 불릴 때까지.

미국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한라산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제주 4.3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71 2026.06.1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5- 미군정과 친일파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독일이 항복하고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폭탄이

약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해

도시 인구의 약 39%를 소멸시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주저하자

사흘 뒤인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어

약 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같은 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160만 보병, 2만 7천 문의 대포

5,600대의 탱크, 3,700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만주벌로 진군했다

관동군 100만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하고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탱크 400대는 소련의 철갑 앞에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대가 움직인 그 날

트루먼은 일기에 썼다

"스탈린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항복을 주저한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인가.

나치 군을 궤멸시킨 세계 최강

소련을 향한 무언의 견제인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연구하던

원자탄을 미국이 개발한 것에

세계열강은 주목했다.

일본, 독일도 다 이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지배할 거라면 열을 냈지만

미국이 과실을 맨 먼저 딴 것이다.

무력이 국력이고 그것이 승패를 가리는 세계는

미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폭탄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국가 간의 관계도 이전과 달라졌다.

미국은 원자탄을 인류 최초로 발명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소련은 절대적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다.

8월 10일,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북위38도선’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드렸다.

원자탄이 동북아에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일본 진격을 막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민족의 동의도 없이 강대국 둘이

조선의 허리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서울과 남쪽의 1,600만 영혼은

자본주의 장막 안으로,

평양과 북쪽의 900만 삶은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이념국가들에게 장악됐다.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은 웅기·나진·청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8월 21일 원산을 점령한 뒤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에 들어선 소련군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1945년 10월 3일 공식 출범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면에 조선인 행정 기구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후에서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간접군정 체제를 구축했다.

9월 19일, 원산항에 한 배가 들어왔다

66명의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와 함께

젊은 게릴라 지휘관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김일성

소련군은 그를 영웅으로 소개했다

"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점령군으로 상륙했다

성조기를 앞세운 존 하지 중장은

일제의 마지막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미 정부의 지시를 집행했다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을 고용하라"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 40만 일본인의 송환

그리고 1천 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미군정에 잔류시키는 일 이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일본인 관리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인은 여전히 2등이었고

일제의 잔재는 미군정하에서 현실 이었다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득세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다시 권력을 잡다니"

"해방이 이렇게 무색할 수 있나"

그러나 미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반공의 보루를 위해

친일파는 용서받았고, 되레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민족정기는 짓밟혔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두 국가의 정책은 달랐다.

소련은 조선인의 자생적 기구를 인정했다

조만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형식을 취했고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행했다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불허했다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복귀시켰고

민족정기를 짓밟았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식 혁명이 진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국가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호명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속에 권력을 세웠다.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한쪽은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두 이름 아래

공통으로 흐르던 것은

외세의 전략과 냉전의 공포였다.

남한에 온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사고문단(KMAG)을 만들었다.

40보병사단 미군 장교 18명이 차출돼

남한 각 도에 조선인 치안경찰대를 조직했다.

조선인 경찰대 인력을 선발하는

기준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

광복군, 독립군 출신은 근대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 기준을 만든 자들은 미국인이었다.

그 기준을 집행한 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 이종찬, 백선엽 등이었다.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열렸다.

조선인을 미국식 군대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간 자들은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종찬, 백선엽,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

일본 육사 출신이 특혜를 받았다.

영어학교 학생 선발을 시작했을 때

광복군 출신은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광복군 출신은 미국식 규율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충성도, 즉 친미 성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 주인이 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군에게서 권력의 완장을 받았다.

군사영어학교는 친일의 온실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의 군복을 입었다.

노덕술, 하판락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의 배려로 경찰복을 입고

민중 앞에 나타났다

조선인을 짓밟던 일제의 개들은

해방정국의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비호했다.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했다.

1946년 대구 사건이 터지고

일제 경찰 청산 목소리가 높아져도

미군정은 수용을 거부했다.

미 군정청 조선인 2만 5천 명의 경찰.

그 중 일제경찰 출신이 5천 명.

전체의 20%.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몇 명이었는가.

달랑 열다섯 명.

열다섯.

567명의 광복군 유공자 중에서

단 15명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201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누구의 나라를 지키는 경찰인지를.

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를 부활시켰을까

미국은 왜 미군정을 통해 독립군 출신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우대했을까.

육군 최고사령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참모총장.

2대 참모총장. 3대. 4대....

18대까지.

모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22년.

독립군 출신이 한국군을 이끈 적이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총을 든 자들이

자신의 나라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말한다.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라고.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의존이 안보라고.

이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다.

22년 동안 군 최고사령관 옆에 앉아

자문하고 조언하고 지휘한 자들의 유산이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세웠다

그 아래 경무국과 군무국

그리고 미군사고문단(KMAG)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미군 장교 2명, 사병 4명

형식은 "자문", 내용은 "지휘"

고문단은 군사영어학교 입학생이나

조선인 경찰의 선발을 지휘했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지배계급을 만들었다.

군사고문단은 조선인 국방경비대 5만 명 구성을 지휘했다.

조선인 병력 3개 여단 사령부 창설은 물론

서울, 대전, 부산 등에서 현지 부대를 관리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지위는 특별했다

외교관 면책 특권, 치외법권

그들은 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들을 제재하거나 심판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KMAG의 초대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

그는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졌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라"

"매일의 업무를 공유하라"

"부대원을 함께 점검하라"

로버츠는 자신의 별도 사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고문관들을 한국군 지휘관 옆에 배치했다

그 결과, 미군 장교는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정에 개입했고, 모든 현장에 함께했다

제주 4.3의 현장에도

여순의 산골짜기에도

대전교도소의 비극에도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국방부 장관 옆에 앉았다.

참모총장 옆에 앉았다.

대대장 옆에 앉았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다.

그것이 로버트 장군의 원칙이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자가 갑이었다.

무기를 받는 자가 을이었다.

이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갑이 을과 함께 간 곳이 있었다.

제주도였다.

여순이었다.

대전이었다.

제주 4·3이 터질 때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의 책임자였다.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이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학살 현장의 사진을.

미국 정부에 보낼 보고용이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2만에서 3만 명이 제주에서 죽었다.

미국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1948년 내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여순에서 민간인 2천 명이 죽었을 때

한국군 각 부대 옆에 미군사고문단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됐다.

미국은 말했다.

우리는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준 자가 책임이 없는가.

지휘관 옆에서 자문한 자가 책임이 없는가.

갑이 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갑의 면죄부가 되는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피에 물들었다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진압을 지휘했다

미군은 정찰기 2대, 소해정 2대를 동원했다

산악지대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미군은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4·3의 피로 물들었다.

미군 로버츠 준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미군사고문단은 현장 사진을 찍었다.

여순에서도, 대전교도소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과 함께했다

"자문"이라는 이름의 지휘, "갑"과 "을"의 관계

치외법권의 외교관들이 한국의 군경을 쥐락펴락했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

여순의 피 묻은 골짜기에

대전교도소의 어둠 속에

KMAG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민간인의 시신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국방부 기록실에

대학 도서관 아카이브에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보고했을 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말한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다"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 책임자였다"

"미군정과 KMAG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미국 정부는 침묵한다

한국 정부도 침묵한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자만 기억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순천

반란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장교가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자문"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로버츠 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소 짓는 미군 장교들 사이로

제주도민의 시신이 보인다

마틴 하트-란즈버그는 기록했다

"미군은 진압 전 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출범한 뒤

미군 7만 명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 6월 철수 완료했다.

그러나 500명의 KMAG가 남아

미군 지배는 계속되었다

미군 철수 후, KMAG의 행정감독권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KMAG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츠 장군은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마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다

6·25 전쟁 후 KMAG 인력은 대폭 증원되었다.

1951년 12월 800명에서 1,8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6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권리(right)로 규정된 후,

KMAG는 합동군사고문단(JUSMAG-K)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한

한미 연합 지휘 체제의 틀 안에서,

한국군은 주한미군에 예속된 상태로

70 여년을 지내고 있다.

KMAG이 미국익을 위해 맹활약을 하면서

한국군 지휘부의 영혼과 기백은 USA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초대부터 18대까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거나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 손원일, 정일권, 백선엽

그들의 과거는 일제의 장교였고

그들의 현재는 미군의 협력자였다

오늘날 한국군 일각에서 들리는 주장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다"

그것은 KMAG가 심어준 의식의 결과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슬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 예속적인 한미동맹과

분단을 고착시키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이승만은 일제 잔재 청산을 차단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집권 2개월 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민중의 함성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완강히 반대했다

"국가가 분열된다"는 이유로

그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됐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안두희의 총탄이 그 가슴을 뚫었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

미국의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특위는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너졌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됐다.

친일파를 처벌할 법이 사라졌다.

반민특위 구성 두 달 만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던 법의 후예가

이제 통일을 처벌했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세력이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국보법이 그들의 보호막이 됐다.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2016년, 뉴스타파가 폭로했다

친일 인사 222명이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친일파 48명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훈장을 받았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까지

그의 가슴에는 대한민국의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해방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두 번째 맞이한 영광이었다.

일본의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의 지배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더 강력해졌고, 더 교묘해졌다

그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빨갱이 사냥"을 외치며

민중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감췄다

일본에게 받은 훈장을 감추고

대한민국에게 새 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가슴은 훈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텅 비어 있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강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진다.

1945년 8월의 결정이

2026년에도 살아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만든 군대의 문화가

자주국방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는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법은 아직 살아있다.

78년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통일을 처벌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나라.

친일파가 훈장을 받은 나라.

독립군 출신이 열다섯 명만 경찰이 된 나라.

그 나라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구조 위에 한미동맹이 올라앉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바꾸는 자의 것이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 구조의 이름은

친일과 미군정이 합작해 만든

분단 체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함께 지탱하는

주권 반쪽짜리 나라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77 2026.06.1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4- 6.25와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무조건 항복.”

태평양의 포성이 멎자마자,

승리의 북소리 뒤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서냉전은

총과 탱크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보와 공작,

신문 기사와 침묵 속에서도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총성이 아니라 이념의 칼날로,

지구촌의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공포로

동북아를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한 군사전략을 강행한다.

패배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동북아의 성채로 만들고,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막는 전진기지로 삼겠다.

소련은 유럽에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트루먼은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 5만 명을 중국 북부로 보내라.

7함대를 황해로 진입시켜라.

장개석이 일본군 점령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라.”

트루먼은 표면적 이유로 일본인·한국인 60만 명의

송환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 군을 앞세워

모택동 공산 세력을 저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중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격화됐다.

트루먼은 일본과 한반도 점령통치를 지시하며 외쳤다.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막아라.

사회주의가 번지지 않게 하라.”

맥아더는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사령관이 되어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점령 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을 동북아 대소 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글라스와 파이프가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지휘 속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영국도, 소련도, 중국도

자문만 할 수 있었다.

맥아더가 장악한 SCAP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5,700명이 체포, 4,300명이 기소됐다.

98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92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맥아더는 진술서를 변조했다.

천왕이 전쟁범죄와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이는 훗날 문서로 밝혀졌다.

왜였는가.

“천왕을 기소하면 일본인들이 반발한다.

반발이 커지면 소령과 공산주의가 파고든다.

천왕 한 명의 죄를 덮는 것이

동북아 전략에 더 유리하다.”

그것이 미국이 만든 냉전의 계산법이었다.

서울의 하지도 남한을 대소 초소로 만들라는

본국 정부 지시를

맥아더를 통해 전달받았다.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소련 견제'라는 대일본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집행된다.

1945년 10월 중국에서 작전하던 미군은

모택동의 공산군과 수차례 무력 충돌한다.

미국은 장개석·모택동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맥아더를 앞잡이 삼아 일본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왕을 감싸고, 전범 재판 지휘하며,

일제에 복무하던 관리들을 미군정에 참여시킨다.

미국은 반인륜적인 범죄 집단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부대원 전원 면책해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다.

미국에 의해 인간 백정인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은

살인마에서 정보 제공자로 둔갑해

전후 유력인사의 삶을 누렸다.

인간 악마들과 거래한 미국의 민낯이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인간 괴물들을 사면하고

선혈이 낭자한 데이터를 챙겼다.

인류에 대한 범죄 기록이

미국의 군사 자산이 됐다.

나치 로켓 기술자를 풀어준 것처럼.

악마와의 거래는 냉전의 규범이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핵심 의료진은

'인체실험 데이터 및 생화학 무기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책 특권을 받았다.

미국은 이 귀중한(?) 데이터를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이 주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다.

생화학 무기 개발과

인간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기 위해

최소 수천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대상자들을

인간이 아닌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피해자들은 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정계 인사, 중국인 항일군인 및 민간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이었다.

실험 대상이 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산부, 영유아, 소년 소녀도 예외 없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다

731부대 출신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학장, 유명 제약회사 임원,

국립보건원 간부 등 일본 의학계의

주류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인간을 통나무로 여기며 학살했던 이들이 전후

' 의학 박사'이자 '사회 지도층'으로 대접받았다.

731부대의 만행은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과학과 의학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민중은 해방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질서를 먼저 말했다.

독립보다 반공,

자치보다 통제,

공작을 통한 대중조작

그것이 점령의 언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협상 테이블 위에 한반도의 운명이 놓였다.

미국이 제안했다. 10년 신탁통치.

소련이 반박했다. 즉시 독립.

타협안이 나왔다. 5년 신탁통치.

진실은 그랬다.

그런데 같은 날 서울의 한 통신사가

긴급뉴스를 신문사에 전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바뀐 뉴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민중일보, 신조선보가 실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처럼 인쇄됐다.

남한이 들끓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니.

소련이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니.”

소련의 타스통신이 반박했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국무부가 1942년부터 입안했다."

뉴욕타임즈 1945년 12월 28일자는

진실을 정확히 보도했다.

그러나 서울의 신문들은 계속 가짜뉴스를 실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의 검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한 내 반소·반탁 감정이 극에 달해

좌우 대립 격화된다.

거리에서 반탁운동이 터졌다.

반소 감정이 폭발했다.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한 언론을 검열하던 미군정은

이 가짜뉴스를 왜 방치했는가.

맥아더 밑의 정보책임자 윌러비의 언론검열과

보도지침에 충실히 따랐던 남한 언론.

그 언론은 미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으로

남한의 반소 감정을 부풀리기 위해 동원됐다.

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조작 목적이었다.

거짓 보도는 남한의 하늘에 반소의 불길을 퍼뜨렸다.

좌와 우는 갈라졌고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이후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라났다.

1946년 ~ 1947년 냉전의 심화와 미·소의 대립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열기도 뜨거워진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할

최전방 전진기지 만들 작업에 속도를 낸다.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미국의 장개석 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시행된다.

60개 사단 무장이 가능한 4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장개석 군이 대공세를 펼친다.

위기에 몰린 모택동은 미국이 내전을 부추겨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1946년 3월 ~ 5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본회의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논의를 둘러싼 미·소의 입장 차이로

진전 없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남한 내 독립 요구 시위와

총파업을 좌파 공작이라며

좌파 탄압과 언론 통제를 강행한다.

하지 중장은 좌파 신문을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로 몰아

언론사를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1947년 5월 ~ 8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8월 12일 최종 결렬된다.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상정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소련은 반대하며 미소 동시 철군과

남북 대표 참여를 주장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치열한 논쟁

소련의 반대결의안은 부결되고

미국의 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

미국 안을 40대 0(기권 6)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

모스크바 5개년 신탁통치 안은 묵살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발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불참

“조선인 대표 없는 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다”

1948년 1월 위원단 서울에서 임무 착수

북한 지역에 대해 소련군정이 출입을 거부하고

위원단은 활동을 계속 했다.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 과업을 계속하라”

그렇게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옆 중국 대륙에서

소련 저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고

수억 달러를 추가지원 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전세가 뒤집히고 있었다.

1948년 모택동의 군대는

만주를 장악했고

국민당의 무기와 도시를 차례로 삼켰다.

부패한 국민당은 무너졌고

미국은 장개석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자

미국 외교관들은 철수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 지역' 총선을 결정했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자,

유엔 소총회는 미국의 안에 따라 '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1948년 5월 ~ 9월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1948년 9월 모택동 군이

만주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개석 군의 탄약을 무더기로 노획했다.

장개석 군 내부의 자멸적인 부정부패를 목격한

미국은 추가 지원 거부를 검토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4월 ~ 5월 공산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

미국은 공관원을 철수시키면서도 대사에게

대만으로 도망치는 장개석을 따르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민족통합 주장하면서 5·10 총선거 거부한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쏜 범인 안두희는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다음해 6.25 전행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육군 포병 장교로 원대 복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동경에 있던

맥아더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지휘를 받았다.

G-2는 윌러비가 대장으로

극동 전역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군사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971 방첩대는

주한 CIC의 핵심이었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은 CIC와 무관한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영원한 분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1947년 말 유엔(UN)이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선언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등

민족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남한 지역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석 달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선거 거부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통일 운동과 반이승만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엄청 많았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선생 등을 비롯해

이분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간 간부급 및

청년 단체 지도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됐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패퇴했으며

남한 역시 부정부패가 자심해

희망이 없다는 판단한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 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국민당 수뇌부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 보낸 원조 물자와 자금이

국민당 고위 관리들의

주머니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이 준 무기가 모택동군에게

밀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극도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우리가 장개석에게 지원한 돈 중 수억 달러가

뉴욕의 부동산 투기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보고,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개석 정권을 포기했다.

당시 남한 상황도 타이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막대한 원조가 제공되었으나,

정권 비호 세력에게 불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 직전인 1950년 1월초

이승만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중단 하겠다"

'애치슨 라인' 선포 소식을

스탈린, 중국, 김일성이 들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선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는다.”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오판이었는가.

아니면 유도였는가.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해,

산천이 핏물로 물들고 포화가 가득할 때,

패전국 일본은 축배를 들었다.

일본은 미군의 거대한 병참기지가 되어

막대한 특수를 누리고 경제를 재건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나면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데

맥아더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하려 했고

그 곁에서 정보책임자 윌러비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겨울 산맥 너머에서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장진호의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미군병사들이 얼어 죽자

맥아더는 만주를 핵공격하자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를 파면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쉰 두 나라가 협상대표로 모였건만,

중공과 대만,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사실상 혼자 설계한 조약으로

일본에게 파격적 특혜를 줬다.

전쟁 배상 의무를 최소화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 근거를 줬다.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빠졌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씨앗이

그 빠진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성노예, 강제징용 등 역사의 상처도 방치됐다.

1905년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그 밀약의 20세기 판이었다.

미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극동전략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일본을 대소 전초기지로 삼는

전후 동북아 대립 구도를 완성했다.

미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 받은 한반도를

강화조약 배상 대상에서 제외할 때

이승만은

그가 당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한다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낸 것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조약이

미국의 극동 전략 수립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침묵한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몰빵에 몰두한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은 정전 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동시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치외법권적 특권인 ‘권리’로

인정해주면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유엔사 후방기지 협정으로

동북아 전략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최종 보루로 만드는 작업을 마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전범 처벌을 흐지부지하고,

한국에서 친일세력을 복권시켰으며,

막후 정보 공작(CIC, CIA)을 통해

한국과 일본 내의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척결했다.

미국 정보기구 G-2 부장인 윌러비 소장은

맥아더의 눈이자 귀이자 손이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였다.

그는 악명 높은 특고경찰을 중용했다.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탄압하던 비밀경찰이었고

독립 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자들이었다.

윌러비는 그들을 비밀리에 공직에 복직시켰다.

낡은 술을 새 병에 담았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을 잡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휘하에서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는 남한에서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세력이

권력기구로 복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52년 미국의 일본 미군정 종식을 앞두고

일본 극우 세력이

미군 정보기구 G-2의 묵인·개입 하에

일본의 재무장을 노린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거점으로 묶어두기 위해

자민당 정권과 온건 야당 분열 공작에

수백만 달러의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의 예외뿐,

자민당의 집권, 미국의 그림자 아래 이어졌다.

CIA가 만든 정당, 미국이 유지한 정권.

일본 민주주의의 이면이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정책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소련과 사회주의, 동북아에서 저지하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았으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경감되고 미국 기지가 되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미군은 오키나와에 남았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3각 군사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방기지이고

유엔사와 그 후방기지가 둘을 연결한다.

미국은 동북아를 하나의 군사작전 공간으로 재편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워싱턴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소련을 막는다는

하나의 명분 아래 만들어졌다.

진짜 목적은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거였다.

동북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들어

한반도를 그 패권의 최전방기지로 삼는다.

그 설계는 1945년 이후 7년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계 위에서 한반도가 살고 있다.

2026년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으로

중국과 인도, 태평양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3각 군사협력체제가 더욱 강고해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자주와

전작권 환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와

어떤 관련 속에 이뤄지는지

국회, 언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70 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미맹에 모두 취해 있는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08 2026.06.11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3- 태평양 종전과 미군정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도시를 그림자만 남긴 채 태워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증발했고

강물에는 불탄 인간의 형상이 떠내려갔다.

그곳에는 일본인만 있지 않았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핵의 불길 속에 버려졌다.

소형차 크기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5만 명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착취당하던 조선인이었다.

일제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날의 태양보다 뜨거운 빛 속에서 산화했다.

해방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 외무상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다 말했다.

"내일부터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이틀 후, 소련군은 만주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동군 100만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탄 '팻 맨'이 두 번째로 떨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포고 다음 날,

소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없이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압박용 메시지였다."

미국은 스탈린을 굴복시킨,

막강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두 도시의 피해는 엄청났다.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일본 원폭 투하 후 피폭자에 대한

보도와 정보 유출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했다.

1945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관(GHQ/SCAP)은

일본 전역에 엄격한 언론 규제를 시행했다.

원폭 관련해서 특히 심했다.

원폭은 일시에 한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갖가지 형태로 부상을 당했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고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갔다.

병원과 같은 구호시설과 식수와 식량 수급 시스템이,

교통과 통신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완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폭 피해를 압축한 문장이 생겨났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

미국은 피폭 현장 취재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피폭 영상 자료는 압류하고 기밀로 분류했다

미군이 촬영한 뉴스릴이나

일본 영상팀이 촬영한 필름은 모두 압수했다.

필름 일부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피폭의 생물학적 피해는

일본 국민에게조차 철저히 차단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의학 연구 결과물까지도

발표가 금지되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도 검열 대상이었다.

검열 통제는 점령이 종료된 195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폭 투하의 참혹함을 감추고

전쟁을 끝낸 인류애적 무기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집중 보도토록 하면서

미국의 반인륜적인 원폭의

참혹한 파괴력을 철저히 감추었다.

미국식 합리주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8월 15일 미군 지휘부는 종전 후의

동북아 전략을 매듭짓고

소련에 공식 통고했다.

"한반도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다."

스탈린은 수락했다.

원자탄의 위력 앞에서,

그는 한반도 남쪽을 포기하기로 선택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통보했다.

항복을 선택하고 저항을 접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천황의 떨리는 육성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삼천만 동포가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겨운 "만세"를 외쳤다!

한반도 전역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해방이다!”

태극기를 꺼내 들었고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이미 각자의 진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에서 내려왔고 미군은

남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해방의 주인공은 승전한 제국들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분단의 출발점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이미 차가운 냉전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미국이 종전 이전부터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미국은 종전 수년전부터

동북아를 주목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본이 무너지면, 미국은

동북아 어디를 차지할 것인가”

그 질문 속에 한반도가 끼워 넣어졌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익숙한 땅이었다.

그것은 미 국익을 위해 점령해야 할 대상 이었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을 향해 가자

미국의 극비 문서 속에

일본, 만주,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점령대상으로 포함됐다

서울도, 개성도, 군산도 ‘점령 대상’이었다

1945년 8월 중순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 후

소련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소련은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켰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기세였고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해 평양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을

소련이 너무나 쉽게 수락한 것은,

미국이 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기가 꺾인 탓이었다.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에는

일본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모습은 세계 1,2 차 대전 때

연합군내에서도

점령지역 쟁탈전 등이

심각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만큼 미국 핵폭탄에

크게 주눅이 든 탓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4일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그들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이

인천항에 발을 들였다.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하지 중장은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조선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해방을 기다린 35년.

그 끝에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조선민중은 광복을 외쳤지만

강대국은 점령을 준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 중장과 T.C.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갔다.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닌

다른 외세의 상징, 성조기였다!

미군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해방 직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도

그 어떤 정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일제 총독부의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알았다는 이유였다.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원래의 권좌로 복귀시켰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점령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버렸다.

서울의 미군정에는 한국어 통역군인이 전무해서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워싱턴 정부는 서울의 미군정과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과 남한에 동일한 군정원칙이 적용된다.

친미파를 양산하라.

미국익을 위해 철저히 복종할

자들을 군과 경찰로 등용하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만들어라.”

미국 정부는 동북아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을 방패로 삼으려 했고

군정사령관도 본국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할

야전군 사령관들을 기용했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장군들은 배제한 채

동북아를 미국 진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맹종할

군인들을 앉힌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된 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전국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원하지 않는다."

1946~1947년, 38도선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남과 북의 균열은 더 깊어졌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중심이 된 통일 전선을 구축했다.

남쪽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익 세력이 결집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던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약속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념대립의 대 혼돈 속에 한반도는

좌우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탁통치 합의가 불발되고 1947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반발했다.

"38도선 전체에서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고 맞섰다.

미국의 단독 총선거 강행에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지지하면서

남과 북은 분단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 다른 이념 속에 불신이 쌓였다

하나는 자유를 말했고

하나는 해방을 말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같은 언어로 욕하고 같은 땅에서 죽어갔다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저지라는

거대한 성벽만을 쌓아 올렸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전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제주 4.3항쟁이 일어났다.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외침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름다운 탐라의 섬, 한라산의 붉은 흙은

미군과 조선인 군경 토벌대의 칼날 아래 숨져간

3만여 무고한 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비공식 기록은 그보다 훨씬 많다.

제주의 피는 단독정부의 초석 아래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조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38도선 이남에서만 펄럭였다.

북쪽에서는 한 달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서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은 산천을 노래하던 민족은

두 개의 체제와 두 개의 군대와

두 개의 미래로 나뉘었다.

드리는 말씀

연재하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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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2026.06.09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2 -제국주의 침략과 일제 강점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866년 미국의 철갑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대동강으로 침범해 외쳤다.

“문을 열라”

식민지 진출과 군사적 위협이었다.

평양 사람들이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배는 불탔고, 미국 선원들은 전멸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첫 만남은

저항의 화염 속에서 기록되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닌 열강 침략의 시작이었다.

5년 뒤인 1871년, 기함 콜로라도가

군함 다섯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포성이 하늘을 찢고

초지진의 돌담에 선혈이 낭자했다.

신미양요다.

미국은 통상을 아니, 정확히는 이익을 원했다.

조선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신들의 몫을 챙기길 원했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악수는 조선의 빗장을 여는 열쇠였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를 요구했다.

그것은 시작의 시작일 뿐

형태 바꿔 150년 이어졌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계기

발생한 청일전쟁 후

1895년 10월 경복궁 옥호루 새벽,

일본 자객들이 난입해

명성황후 황후 칼로 찌르고 시신 불태웠다.

명성황후의 피가

경복궁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불길 속에서 타오른 것은

한 여인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한 궁궐에

공포 가득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공관들이 분노해

"고종을 보호하고 조선을 유지하자"

손을 내밀었으나,

미 국무부는 단호히 거절하고

서울 공사에 전문을 보냈다.

"개입하지 말라, 오직 중립의 장막 뒤에 숨어라."

대한제국의 국운이 짓이겨지는 동안

미국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조선의 군주,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자주를 구걸하며

워싱턴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미국이 앞장서 달라.”

1899년 매킨리 대통령은 그 편지를 읽고

서울의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거부하라.”

1900년 동경에서 조선 공사가

미국 버크 공사를 붙잡고

"서구 열강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케 앞장서 달라"

눈물로 호소할 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침묵.

미국은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무릎 꿇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제26대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1901년 일본의 조선 강점을 방조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기업들을 통해

일본에게 전쟁

자금(7억 엔. 현재 가치로 14조 원)을 빌려줬다.

.일본이 그 돈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러시아에게 승리한 뒤

조선 점령을 향한 입지를 확보했다.

분하다. 1905년 7월 두 국가의 밀거래!

가쓰라와 태프트가 맺은 비밀 협약

필리핀을 탐한 미국과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의 추악한 거래 속에서

조선의 숨통은 산 채로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이익을 나눈 자들의 악수 위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선은 물건처럼 거래됐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주일 뒤, 미 국무부가

서울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영사관을 폐쇄하라.

조선에서 철수하라.

모든 업무는 도쿄에서 처리하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불이 꺼졌다.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 문도 닫혔다.

그해 12월 16일 조선은

미국의 지도에서 지워졌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종식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1910년 8월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경술국치의 치욕 속에

나라가 통째로 삼켜질 때

그해 9월,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총독부의 칼날 아래

언어가 잘리고

역사가 찢기고

농민의 논밭은 빼앗겼다.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긴 채

피눈물 흘리던 조선의 백성들,

무단통치에서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민초들의 심장은 계속 분노하고 있었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삼천리강산을 뒤흔든 대한독립만세!

무장전쟁을 외친 무오독립선언과

도쿄의 2·8 선언을 거쳐

온 겨레가 붉은 피로 써 내려간

비폭력 혁명이었다.

만세.

대한독립 만세.

골목마다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학생과 농부, 기생과 승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맨손으로 제국의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은 믿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한 민족에게도 태양처럼 비칠 것이라고.

그러나 미국의 훈령은 달랐다.

“조선인들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지 않게 하라.”

“일본이 오해하지 않게 하라.”

그 문장은 총칼보다 더 차갑게

독립운동을 외친 민초들의 가슴을 후볐다.

윌슨이 전 세계에 외친

거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고

강대국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출신 대통령이

1918년 가을, 억압받는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민족자결주의를 세계 앞에 선언했다.

세상의 약자들이 그 말에 귀를 세웠다.

조선도 귀를 세웠다.

만주 지린에서 독립선언 함성이 터져나왔다.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거리에 섰다.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대한독립만세.

윌슨은 그 소리를 들었는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는가.

아니면 정말 들리지 않았는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미 국무부가 도쿄의 미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서울의 미 영사에게 전달하라.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라.

일본 정부가 미국이 조선 독립에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이었으나,

1차 대전 패전국(독일, 오스만제국) 식민지와 영토에 적용되고

승전국(영국·프랑스·일본·벨기에 등) 식민지는 배제되었다.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 이기주의 앞에서 정의는 없었다.

윌슨은 위선적인 평화주의자의 연기만을 했을 뿐이다.

조선에서 만세 소리는 총성에 묻혔다.

유관순이 잡혀갔다.

7천 명이 넘게 죽었다.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수만 명이 투옥됐다.

미국은 침묵했다.

민족자결을 외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의 절규를 외면했다.

윌슨은 만세 운동으로 죽어가는

조선의 영혼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지지나 동정의 언어도

던지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화려한 홀에서

약소민족의 절규는 문밖에 멈췄다.

민족자결주의는 강자의 해괴한 논리였고

조선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1920년과 30년대의

긴 밤 동안

미국은 일제의 포악한 식민 지배를 철저히 외면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 영국 등은 철저히

악취 나는 이익만을 계산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해야 했다.

세월은 흘러 다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포성이

진주만을 피로 물들인 후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 시작했다.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함대가 불탔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청원서가 워싱턴을 헤매고 다녔다.

조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

합법적 정부로 승인해 달라.

미국 정부는 외면했다.

접견조차 쉽지 않았다.

자유중국이 조선 임시정부 승인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며

그 법통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만났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

오만한 합의 외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선언 속에도 조선의 운명은 모호했다.

독립시킨다는 적절한 시기가

누구의 시간인지 조선인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연합국의 우두머리들이

또 다른 지배를 준비하고

자국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의 조건들이었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응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탐욕의 결과물이었다.

1945년 8월 초

원자폭탄 두 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도 희생됐다.

일제가 무릎 꿇자

강대국들은 동북아 지도를 놓고

전후 이익을 계산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쪽을 바라보았고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계산했다.

한반도는 전략 요충지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갈,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할 출발점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한반도와 일본 전체를

소련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원자탄 위력에 소련이 주춤했다.

미국의 의사대로 38선이 그어지고

한반도가 두 동강 났다.

미 국무부 문건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참작하면서

조선을 일본과 함께 전리품으로 분류했다.

조선인은 그 문건에 없었다.

조선인의 의견을 묻겠는

절차도 생략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해방되었다면서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두 개의 점령군, 두 개 진영의 이익이 우선하면서

한 개의 민족이 두 동강이 났다.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 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서 확인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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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2026.06.0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 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

시작하며

망국, 식민. 분단과 동족상잔 등을 거친

150 여 년의 모진 세월.

우리는 오랜 시간 미국을 ‘혈맹(血盟)’이라 불렀고,

그들이 흘린 젊은 피 위에 세워진

정치적·경제적 기적의 신화를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지난 70 여년간 침묵하고 감춰온

진짜 한미관계를 확인하고

미국의 실체를 모른 채 고정관념화 된

미맹(미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한 세기 절반의 진실의 기록,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미양요의 그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한 편의 대 서사시.

그 우여곡절을 살피는 것은

희비극을 넘어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

우리는 지금,

그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과거,

직시해야 할 현재,

그리고 스스로 써내려가야 할 미래.

기억하는 자가 미래를 산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려진

150 여년의 여정을

펼쳐놓고 확인해야 한다.

미국은 혈맹이었습니까?

평등한 동반자였습니까?

미국익을 위한 예속적

이해관계였습니까?

한국이 원조, 은혜 속에 많이 챙겼습니까?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과거를 확인, 청산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것.

그 길 위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1871년 태평양 건너 한 제국의 야욕이

강화도 앞바다를 피로 물들인 신미양요의 그날

조선의 병사들은 낯선 침략군의

전함을 바라보며 칼을 뽑았다.

“물러가라, 서양의 침략자여!”

그 함성은 150 여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 가슴에 메아리친다.

그날의 총성은 단순한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한반도와 미국, 얽히고설킨 운명의 서막이었다.

1905년 동경 밀실에서 맺은

추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은 필리핀을 집어삼키는 대가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하고 축복했다.

그 음험한 독기 속에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도려냈다.

안중근 장군의 대일 선전포고가 작열했으나

1910년 경술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침몰시켰다.

그 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하늘을 흔들고 절규가 온 땅을 진동할 때,

서울과 도쿄의 미국 공관으로 내려진 훈령은 냉혹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하거나

지원하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은 철저히 이익만을 계산했다.

거리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했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 가던

태평양 전쟁의 끝자락이 보일 때,

미국은 원자탄을 터뜨려

소련의 극동 남하를 저지하는 북위 38도선을 그었다.

그들의 한반도 정책은

냉전 대비 극동 미군기지화.

민족의 허리는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의 삶을 둘로 가르게 된다.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그저

‘일본의 식민지’로 대하며

패전국 일본과 동일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총독부 건물엔 다시 불이 켜졌고

조선총독부의 관리들이 다시 중용되고,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 경찰들이

권좌로 복귀했다.

해방된 조선의 민중은

새로 온 점령군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해방은 왔지만

청산은 오지 않았다.

어제의 순사가

오늘의 경찰이 되었다.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왜 독립된 나라에서

독립운동가가 쫓겨나고

친일파가 권력을 잡는가.”

그것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성벽으로 세우고

남한을 거대한 전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 했다.

오늘날까지 이 땅을 좀먹는 친일 미 청산의 독극물,

그 원천적 책임은

해방정국의 거대한 설계를 주도한 미국에게 있고

독재자 이승만은 그 속에서

권력을 탐하는 하수인이 되었다.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해

분단을 고착화하려했다.

미국의 획책에 격렬하게 반대한

제주에서 봉기, 진압 속에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4·3의 산과 마을엔

미국을 추종하는 반민족세력의

총탄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불타는 초가 앞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고

바다는 시신을 떠안은 채 흐느꼈다.

공산주의 배후라는 가짜뉴스 속에

자국 군대와 친일 세력의 총칼에

도민 10분의 1이 학살당했다.

여수순천의 병사들은

양심과 명령 사이에서 외치며 궐기했다.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미국과 이승만은 어린이까지

빨갱이로 몰아

학살로 흐른 피가 대지를 적셨다.

친일이라 불리던 이름들이

반공이라는 새 이름으로 변신했다.

민족반역자를 잡으러 나선 반민특위에

친일 경찰이 총을 들고 쳐들어갔다.

이승만은 말했다

“내가 지시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자물쇠가

이 나라의 입에 채워졌다.

묻지 말라, 따지지 말라, 기억하지 말라.

그리고 1950년 여름

군사분계선 남북에서 총격전이

꼬리를 물다 38도선이 무너지며

전면전쟁이 터져 산하가 불타올랐다.

애치슨이 그은 방어선 바깥에 있던 땅에서

포성이 울렸을 때 미국이 다시 왔다.

이번엔 유엔의 깃발을 달고 다국적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배 위에

일본 청년들도 타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쟁이 일본에게

폐허에서 일어설 발판을 주었다.

중국군이 참전한 뒤

만주와 북한에 핵 공격을 감행하자!

맥아더의 목소리가 커지자

3차 대전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이

그를 갈아 치웠다.

냉전 논리 속에 전선이 교착되자

북녘 하늘은 미군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불타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도시보다 더 참혹하게,

평양의 하늘, 함흥의 골목, 원산의 항구

지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빨래판처럼 변했다.

1953년 총성이 멎었다.

그리고 휴전.

평화협정은 멀어지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게 분단 상태 유지가 최상의 조건이었다.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최전방 부대가 될 수 있었기에.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쇠사슬,

주한미군사령관은 3개의 모자를 쓰고

적절한 긴장 속 전쟁 방지, 분단지속을 위해

남북을 관리한다.

남북이 손을 맞잡으려 할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을 앞세워 안보 튼튼을 외치면서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를 향한 비밀작전을 전개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에 입 다물고

미국에 동조하면서

한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개돼지의 가짜평화를 즐긴다.

미국 국익을 위해

한국헌법과 민주주의는 실종상태.

한미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고만 합창하고

한미동맹은 남북교류협력으로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전략과

작계 5015, 5026에 압축된

선제타격, 참수작전 등이 공개된다.

모두를 향한 심리전 차원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며

한국의 군사적 대미 종속을 심화시켰다.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세 번이나 손을 잡고

남북국가연합도 가능할 수 있게 했던 2018년 열기는

트럼프의 제동과 압박 속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그 뒤에 나왔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강조한다.

동북아에 신냉전의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남쪽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수준이고

K-팝, 한류는 지구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사적 번영의 그림자 아래

지구촌의 궁금증은 커지고 있다.

왜 그들은 아직도

작전권을 완전히 갖지 못하는가.

왜 평화협정은 오지 않는가.

왜 강대국의 전략 속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의 문턱에 서 있는가.

대한민국은 자주의 목소리를 잃은 채

왜 불편해 하지 않는가.

한미관계의 150 여년은

제국과 약소국 사이의 역사이며

동맹과 지배, 통제의 기억이고

희생과 번영이 뒤엉킨 거대한 서사다.

필요한 것은 진실을 확인하는 성찰이다.

감춰진 미국 정부 비밀문서를 읽고

침묵당한 목소리를 듣고

왜곡된 기억을 바로 세우는 일.

다시는 이 땅이

누구의 전략지도 속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 나라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민간인들

제주에서, 여순에서, 대전에서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미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불순세력 제거"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숫자로 처리되었고, 통계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한다

기록되지 않아도, 기억은 살아 있다

어머니의 눈물, 아버지의 한숨

아이들의 울음, 노인의 절규

이 서사시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잊혀진 자들을 위한 추도가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위한

낮은 목소리의 증언이다

해방정국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기에

그 날까지 우리는 써 내려갈 것이다

잊혀진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제 한반도는 폐허 속 약소국을 탈피해

세계의 강물과 무역이 만나는 나라,

혁명을 창출한 촛불과 민주주의의 기억을 가진 나라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전초 기지가 아니라

지주 속에 스스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강화의 바다에서 시작된 포성 이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눈물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역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조망 너머의 바람이

전쟁의 냄새 대신

평화의 풀 향기를 실어오는 날,

제주 바다와 여순, 광주의 혼령들

분단 비극 속에 산화한 단군 후손 전사들도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과 부녀자들도

비로소 조용히 말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끝났노라고.”

고승우
북마크
395 2026.06.03
창작정원 —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오월이었다.

남도의 하늘은 그 어느 해보다 파랗고

라일락은 그 어느 해보다 향기로웠다.

광주의 거리에는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시민들은 일어섰다.

"계엄 해제하라!"

그 함성은 전두환의 귀에 이르렀고

그 귀는 워싱턴으로 직통이었다.

광주 미공군기지.

남한 최대의 전술핵 저장소.

핵무기들이 그곳에서 엎드려 있었다.

중국을 향해, 소련을 향해

언제든 날아오를 준비를 한 채.

정보 당국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광주의 소요가 핵무기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핵무기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핵기지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아니, 핵무기가 안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핵무기가 먼저다.

미 국익을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다.

카터 대통령 긴급 안보회의 소집했다.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둘러앉았다.

광주의 인권? 중요하지 않았다.

광주의 민주주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오가는 질문은 미국익 안전뿐이었다:

광주 핵무기는 안전한가?

한미동맹의 핵심 기지는 안전한가?

백악관의 결정이 내려졌다.

카터는 광주시민을 도륙내는 학살명령을 승인했다.

그 허락이 떨어진 순간

광주 시민의 목숨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백악관 마루 바닥위로 나뒹굴었다.

금남로에 탱크가 왔다.

총성이 울렸다.

오월의 광주는

민주주의의 순교지가 되었다.

미국은 눈감고 귀 막고 침묵했다.

냉전이 끝났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동유럽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38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단은 미국의 이익이기 때문에

김대중이 평양으로 갔다.

6·15가 선언되었다.

남과 북이 손을 잡는 순간,

온 겨레의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더 사라고 요구했다.

한미동맹 유지를 위해 무기를 사야했다.

평화를 구걸하는 나라가 되었다.

노무현은 10. 4선언을 위해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문재인이 평양을 3차례, 백두산도 동반 방문했다.

남북이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트럼프는 전화를 걸어 합의를 무효화했다.

참수부대가 창설되었고

무기는 계속 팔렸다.

북한은 결국 두 국가론을 선언했다.

"당신들은 미국의 식민지다."

남쪽은 전과 동일했다.

3차례 남북정상회담을 다녀온 문재인의 표정은?

전과 같았다. 남북합의 백지 된 이유?

침묵했다. 미국의 명령으로 못했다는 설명도 없었다.

향후10년 이상 남북정상회담이 불가능해진 현실?

그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책방에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는 사이 전작권은 미국의 손에 있고,

군대는 미국의 지휘를 받으며,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의 날개를 더 크게 만든다.

극동 전방기지를 넘어 인도태평양까지 참전 가능하다.

한미일 3각군사협력도 강화된다.

광주여.

너는 1980년 5월에 시작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의 배신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온 그날부터

제주 4.3에 이어 너는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 학살을 명령한 한미동맹 구조는 여전해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아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겨울은 길고 어둠은 깊다.

분단위에 걸터앉은 미국은 여전히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미본토 수호를 위한

비밀작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을 70여 년 동안 지키고 있어

한국민은 강대국 전쟁으로 언제 재앙을 맞을지

까맣게 모르고 살고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용이라는 한미 정부의 합창만을 믿으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한미동맹 속에 좁아지고

국가보안법으로 그 사실조차 발설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절대지지가 미맹 속에 남한을 지배하고

냉전의 잔재는 여전히 독기를 뿜고 있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그 매일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침묵할 것인가, 증언할 것인가.

가짜를 지킬 것인가, 허물 것인가.

망설이고 눈치 보면 후손이 괴롭다.

K-팝 세계 아이콘의 주인공들에게

살만한 미래를 넘겨주어야 하지 않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으자.

그러면 반드시 온다.

그 날은 올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날을 위해

오늘 모두 힘차게 궐기하자.

진실을 밝히자.

카터의 결정을,

광주 체로키 파일의 먹칠한 미국 비밀을.

국보법을 폐지하자.

동맹과 분단이 더 이상

우리의 입을 막는 칼이 되지 않게 하자.

진실을 증언하자.

가짜를 허물어가자.

그 날을 만들어 가자.

그날이 바로

광주의 서사가 완성되는 날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날이다.

평화통일의 광장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다.

고승우
북마크
367 2026.05.16
창작정원 두 개의 쇠말뚝

두 개의 쇠말뚝

동맹이 상전(上典) 되고 보안법이 작두 되니,

이 땅의 민주주의는 숨 쉴 구멍조차 찾지 못해 안색이 창백하구나.

국민의 입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 떠들어도

보안법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오들오들 떨기 바쁘고,

행복하게 살 권리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동맹의 바퀴에 깔려 짓이겨진다.

두 개의 쇠말뚝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안보라는 명목으로 성벽을 높이 쌓아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좁아진 광장 위엔 외세 군화 소리와 "침묵하라"는 서늘한 명령만 가득하다.

주권자가 제 나라 땅에서 이방인처럼 눈치 보며 사는

이 꼴이 과연 헌법 제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냐,

아니면 동맹의 그늘 밑에 세워진 거대한 가막소냐!

옛날도 먼옛날 해방 직후 그날 이후

한강 이남 땅덩어리 외군 들어앉은 뒷날

주권은 구석에 처박히고 안보만 번쩍번쩍

으뜸가는 동맹 동맹 한미동맹이라

그 무슨 자주가 있겠느냐 온전한 권리가 있겠느냐

기지는 늘어나고 국민은 모른 채 고개만 끄덕끄덕

제4조라, 미국 권리 속에 주한미군 위세 당당

SOFA라, 이름하여 한국 법과 공권력 밖 특권

전략적 유연성이라, 이름하여 국경 넘어 작전하기

이름은 그럴싸하나 속내는 따로 있으니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채 끌려다니는 형국이라

서울이라 용산 한복판 일본군 깃발이 성조기로 바뀌고

평택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 위세등등

여기가 바로

사령관, 유엔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 셋을 눌러쓰고 한 몸에 세 개 권한을 얹어놓고

이리저리 명령을 굴려대니

이 나라 군대인지 저 나라 군대인지

경계가 흐릿흐릿 꿈결 같도다

몸뚱이 하나에 세 개 사령관 모자 쓴 히드라 대장 봐라.

유엔사도 내 것, 연합사도 내 것, 주한미군도 내 것 삼위일체가 이것이라

세 개 모자를 번갈아 쓰며 하나는 국제라 하고

하나는 동맹이라 하고 하나는 주둔이라 하며

왼손은 전략 무기로 동북아를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우리 군 작전권 위에다가

"현상 유지" "전쟁 억제" 깔짝깔짝 쓰다가도

한국 정부와 맨날 맞장뜨며 거들먹거리네.

간댕이 부어 남산만 하니 지하의 일본군 대장이 부럽다고 땅을 치네.

점령군 위세 하늘 찌르는 동맹조약 봐라

제4조를 옷처럼 두르고 SOFA를 장갑처럼 끼고

한반도 문제를 한국과 상의 않고

한국 땅에서 중국 러시아 상대 핵타격 연습한다.

한국 법은 우리 몰라닷 주한미군 기지는 미국법 적용!

주한미군 미 본토 수호 전략 SIOP, OPLAN 비밀리에 수행하니

3차 대전 몰고 올 위험 상존해도 한국 정부 침묵하네.

미국의 도깨비 방망이 전략적 유연성 나온다

국경은 없고 방향만 있다.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어디든 출동 준비 끝 중국이닷, 소련이닷, 러시아닷

SIOP 핵전쟁 계획 속에 한반도 편입되고

주한미군 전술핵 천 기 보유했을 때도 모두 소련 중국 타격용이었는데

북한 방어를 위해서라고 선전해 왔으니

하늘같이 높은 비밀 마다같이 깊은 작전계획

한국 주권은 잘라먹고 전략적 이익은 청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오산 기지 상공에서 모두 별 탈 없다더냐.

OPLAN 8800은 대중국 대러 비밀 핵타격 계획

한국 정부도 몰라 국민도 몰라

오산 군산 기지에서 날마다 정찰기 뜨고

중국 향해 핵전쟁 연습하는데

한국 땅이 핵전쟁 전방기지가 되었으되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평화를 즐기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더니 작전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상황만 기다리는 형국이라

전쟁은 계획 속에서 70년간 한국의 현실이었네.

지도 위에 선 긋고 적을 만든 뒤 그 선 위를 넘나들며 작전이라 부르니

이 땅은 발판이요 한국 국민은 존재 없는 볼모라네.

미군 비밀작전 SIOP와 OPLAN, 숨어서 나오고 감춰서 움직인다.

서슬 푸른 성조기 나부끼는 몇 십 리 철책 속 비밀기지 속에

전문 용병 두고 군사고문단 두고 전략가 두고

국방박사 통역 두고 정치박사 연락장교 두고

박사박사박사박사의 합창소리 - 미국 만만세!

작전 행여 새어날세라 기밀문서 자물쇠 잠그고

동맹 행여 깨질세라 방위비 해마다 올리고

한국국민 행여 알까 봐 OPLAN 8800 철통 같이 봉인한다.

한국 국회, 정부는 미군 비밀작전 모른 채 침묵하며 권력투쟁에 열심

국민은 정치의 속임수에 바보가 되어 그냥 행복하다네

사이비 민주 앞세운 국민 기만 정치권력 납신다

입으로는 자주를 외치고 손으로는 서류에 도장 찍고

뒤로는 눈감고 모른 척 앞으로는 국민에게 설명 생략

묻지 말라, 알 필요 없다. 안보는 복잡하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

자주가 실종된 쇳소리 국치가 이보다 더할 소냐

불평등 조약 묵인 속 한국인은 후순위, 미군자 즉 치외법권자.

환경오염 조사? 미국이 허가해야로!

미군사고 배상은 최소한으로!

방위비라 이름 붙여 돈을 거둬 기지 확장에 쓱싹

오염 투성이 옛 기지 정화는 한국 국민 몫

그 대가는 안전 보장이라지만

그 안전 누구의 안전인지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모호모호

어허, 저기 보아라. 법전(法典) 중의 으뜸,

국보법이란 몽둥이가 번쩍 나온다.

낡은 법전 누더기 걸치고도 눈빛은 시퍼렇게 살아

입단속 족쇄로 목을 죄고 혀를 묶어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딱지 붙여 쥐어짠다.

이 법은 동맹을 지키는 울타리라 비판하면 이적이요 의심하면 동조다.

묻는 입은 죄가 되고 따지는 말은 유죄 증거 되니

조약은 건드릴 수 없고 기지는 말할 수 없다.

비밀작전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금기라

이리하여 철책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도 있구나.

생각은 스스로 검열하고 입은 먼저 닫혀

동맹은 더 굳건하다 떠들어대는 사이

그 속내를 캐묻는 자는 홀로 끌려간다.

아, 국보법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파수꾼이라

총칼 없이도 질서를 세우고

법조문 몇 줄로 침묵을 길들이니

동맹의 그늘 아래 가장 충직한 수문장

이름 하여 국보법이렷다.

이 법이 한미동맹, 국보법 비판 세력 잡아놓고 길길이 날뛰며 호통친다.

네놈이 반미 세력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평화활동가요

평화활동가면 더욱 좋다. 평화 통일 자주 주권 다 합쳐서

친북좌빨 오적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평화활동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시민기자요

시민기자면 더욱 좋다. 가짜뉴스 편파 선동 국보법 위반한

반국가 주범이 바로 너 아니더냐? 아이구 난 시민기자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대학교수요

대학교수면 더욱 좋다. 좌편향 강의 의식화 교육

이념 세뇌범 아니냐? 아이구 난 대학교수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그냥 국민이요

국민이면 더더욱 좋다. 안보해치는 이적세력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나는 본시 이 나라 국민으로 세금 내고 병역 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 방위비 분담금으로 내면서 살아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 자주를 주장한 그 죄밖엔 없습네다.

어허 슬프다. 국민이 동맹의 잘잘못을 논하는 그 자리조차

국보법이 "간첩 활동이다", "불법 집회다" 하여

쓸어담고 찢어발기고 구겨넣고 밟아버리니

아아, 대체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국민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국민의 한숨은 아무도 듣지 않는 새벽 바람처럼 스러져가는데 -

정부와 국회의원은 동맹 눈치 보며 고개 숙이고 "안보다" 외치고

언론은 국보법이 두려워 펜을 꺾어버리니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 국민이 누구냐"고 묻는 소리는 허공속으로 흩어진다.

어쩔꺼나 어쩔꺼나 이 나라 주권 어쩔꺼나

안보라는 이름 아래 묻혀버린 질문 어쩔꺼나

국민의 기본권은 동맹과 국보법의 쇠말뚝에 신음한다.

동맹과 법이 짝을 지어 춤추고 노래한 지난 70 여년

한미동맹은 바깥에서 철책을 두르고

국가보안법은 안에서 입을 막아

겉과 속이 맞물려 숨통을 죄어오니

겉으로는 안보요 속으로는 침묵이라

헌법이라 적어놓은 자유와 권리 종이 위에선 번듯하나

현실에선 이리저리 깎이고 잘려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네.

여봐라 들어봐라 이 기막힌 사연을 들어봐라

헌법이란 것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제2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하였으되

주권은 어디 갔느냐

한미동맹과 평택 기지 철책 안에 갇혀 있고

OPLAN 8800 비밀 서류 속에 봉인되어 있고

국보법 육법전서 사이에 눌려 질식해 있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 테이블 위에 팔려 나가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 아래 납작하게 짓밟혀 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하였으되

행복은 어디 갔느냐

기지촌 여인의 눈물 속에 흘러가 버렸고

오염된 미군기지 지하수 속에 녹아 없어졌고

국보법 위반으로 끌려간 국민의 가막소 독방에 갇혀 있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양심은 어디 갔느냐

찬양·고무죄 조문 앞에 무릎 꿇고 있고

이적표현물 딱지 앞에 혀를 깨물고 있고

국정원 사찰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고

동맹 비판하다 빨갱이 낙인 맞고 사라져 버렸다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언론은 어디 갔느냐

주한미군 비밀작전 보도하다 군사기밀죄로 묶여 있고

SOFA 불평등 고발하다 반미 선동죄로 찍혀 있고

방위비 협상 내막 캐다 국익 저해죄로 낙인찍혀 있고

주권 회복 외치다 종북좌빨 낙인 맞고 뒷골목에 처박혀 있다

에라 이 나라 민주주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냐

한미동맹이 한쪽 벽이요 국보법이 다른 쪽 벽이라.

전략적 유연성이 천장이요 방위비 분담금이 바닥이라.

사방이 꽉 막힌 좁디좁은 방 안에

국민은 쪼그리고 앉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겠다

민주주의는 어디서 살고 있느냐

미군 기지 담벼락 밖 좁은 골목에서 살고

국보법 조문 사이 바늘구멍만 한 틈새에서 살고

방위비 고지서 납부하고 남은 푼돈으로 살고

전작권 환수 꿈꾸며 겨우겨우 숨만 쉬며 살고 있겠다

헌법은 국민의 것이라 하였으되

동맹이 헌법 위에 있고 국보법이 헌법 위에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가 헌법 위에 있으니

헌법이란 두 글자가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공허한 거짓말이 되었겠다

허허허 어쩔 건가 어쩔 건가

두견이는 두 개의 쇠말뚝 사이에 갇혀 오늘도 서글피 울어쌌는데

이걸 어쩔 건가 어쩔 건가.

PS.

한미동맹과 국가보안법은 본래 안보를 내세우지만,

현실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고

국민의 헌법적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위축시키는 장치처럼 작동할 수 있소.

동맹의 이름 아래 비밀과 예외가 늘어나고,

국보법의 그림자 아래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움츠러들면,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보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처럼 밀려나게 되오.

그리하여 헌법이 보장한 사상·표현·집회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안보라는 말 앞에서 쉽게 뒤로 밀리면서,

민주주의의 공간은 좁아지고 시민의 행복이 짓밟히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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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위의 글은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점에 대해 쓴 ‘두 개의 쇠말뚝’이라는 제목의 풍자시다. 이 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약 제4조(미국의 주한미군 배치 권리보장), 주한미군의 비밀주의를 규정한 SOFA,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OPLAN 8800(대중국·대러 비밀작전), 주한미군사령관의 UN사령관·연합사령관 겸직 문제 등 한미동맹의 구조적 문제점을 풍자했다.

위의 풍자시에 대해 부연설명을 드리고 싶다.

한국의 자주, 민주주의는 한미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슈퍼갑, 한국이 을이란 상하, 예속 관계로 국민의 헌법적 권익을 짓밟고 국보법은 한미동맹 문제제기를 이적과 친북이라 낙인찍고 짓이긴다.

국보법은 21세기 최악의 군사동맹을 수호하는 법이 되어 외세에 봉사하고, 한미동맹도 국보법을 지키는 안전판의 하나가 되어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이 구조는 민주주의·주권·인권이라는 헌법의 핵심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하는 두 개의 쇠말뚝과 흡사하다.

한미동맹의 문제점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SOFA,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 상대 비밀작전 OPLAN 8800, 이 작전을 한국 정부도비밀로 해 한국 국민은 지난 70년간 까맣게 모르고 지내왔다. 또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로 문제 심각,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등 사령관 모자 3개 쓰고 한국의 점령군 대장과 같은 모습으로 군림하는 것 등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원천 봉쇄하고 추악하게 원시적인 방식으로 처벌하는, 국제사회가 오래전부터 지탄하는 악법이다. 이 법은 특히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을 신성시해서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결과 한국사회의 주한미군에 대한 무지 즉 미맹(미맹)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

한미동맹과 국보법으로 빚어진 문제를 간략히 압축해 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21세기 지구촌에서 가장 심각한 불평등 조약으로 이 조약 제4조는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미국의 권리(right)로 되어 있어 점령군에 준하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고 있다.

SOFA(주한미군지위협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의 부속협정으로 한국이 제공하는 주한미군 기지, 시설에 한국의 법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는 필리핀, 나토 회원국이 미국과 맺고 있는 군사관계가 주권국간의 평등관계에서 맺어진 것과 너무 차이가 크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년 동안 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SIOP, OPLAN)을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수행하면서 이를 미국 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르기로 하면서 한국민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한미 두 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는 점만을 앞세우고 SIOP, OPLAN 등은 함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간 강대국 무력충돌로 비화할수 있는 주한미군의 비밀작전에 대해 한국 국회도 이에 대해 개입할 수 없어 한국민의 헌법적 권익이 심각하게 짓밟히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UN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까지 겸직하며 사실상 한국 안보의 최고 결정권을 행사한다. 세계 전사에서 사령관 한 사람이 세개의 사령관 직함을 가지고 주둔국에 군림한 경우는 점령국과 피점령국 관계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해괴한 경우이다.

미국은 최근 중국에 대한 포위, 압박 전략을 강화하면서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앞세워 향후 대만에서 전쟁이 날 경우 주한미군이 참전한다는 사실을 공언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미중 패권경쟁에 끌어들이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미중 무력충돌 시 국제법적으로 주한미군의 기지가 있는 한국도 책임을 면치 못하는 구조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면서 '적의 이롭게 한 행위'라는 모호한 조항으로 한미동맹 비판까지 탄압하는 도구로 작동해왔다. 국보법은 주한미군 철수나 SOFA 개정 같은 합법적 주권 논의조차 ‘이적 행위’, '종북'으로 몰아 낙인찍어 차단하거나 처벌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의 관계는 '동맹 보호 = 국가 안보'라는 고정관념을 강제하고 주입하면서 비판의 공간을 원천 봉쇄한다. 국보법이 동맹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호위무사'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동맹은 국보법을 통해 비판을 억압받고, 국보법은 동맹을 명분으로 존치되는 현상이 고착화되어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주한미군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행동을 규정한 OPLAN 8800 같은 비밀작전과 한국 정부의 진실에 입을 닫는 직무유기 앞에서 무력화된 상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는 동맹의 군사작전 우선주의 앞에서 유명무실하다.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은 주한미군의 비밀작전, 전략적 유연성으로 강대국간 전쟁에 한국이 휘말릴 구조 앞에서 대단히 취약한 구조로 방치되어 있다.

정치권은 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제한된 민주주의 공간에 국민을 가둬놓고 권력다툼을 하는 양상울 반복하고 있다. 언론도 두 장치 앞에서 자기검열에 길들여져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한 채 국민에게 알릴 책무에 눈을 감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국제질서가 대지각변동을 일으키고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또한 심각한 격동기를 겪고 있다. 한국은 경제와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상위권 대열에 올라 있고 K-문화는 지구촌의 부러움과 환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를 털어내고 새 질서를 세우는 노력이 절실하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하니 더 늦기 전에 비정상이 정상화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본인은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불평등 한미동맹 실종된 한국주권’, ‘150년 한미관계사와 주권국가로 가는 길’. ‘한미동맹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인문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본 국보법’ 등의 저서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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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202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