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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두 개의 쇠말뚝

두 개의 쇠말뚝

동맹이 상전(上典) 되고 보안법이 작두 되니,

이 땅의 민주주의는 숨 쉴 구멍조차 찾지 못해 안색이 창백하구나.

국민의 입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 떠들어도

보안법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오들오들 떨기 바쁘고,

행복하게 살 권리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동맹의 바퀴에 깔려 짓이겨진다.

두 개의 쇠말뚝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안보라는 명목으로 성벽을 높이 쌓아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좁아진 광장 위엔 외세 군화 소리와 "침묵하라"는 서늘한 명령만 가득하다.

주권자가 제 나라 땅에서 이방인처럼 눈치 보며 사는

이 꼴이 과연 헌법 제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냐,

아니면 동맹의 그늘 밑에 세워진 거대한 가막소냐!

옛날도 먼옛날 해방 직후 그날 이후

한강 이남 땅덩어리 외군 들어앉은 뒷날

주권은 구석에 처박히고 안보만 번쩍번쩍

으뜸가는 동맹 동맹 한미동맹이라

그 무슨 자주가 있겠느냐 온전한 권리가 있겠느냐

기지는 늘어나고 국민은 모른 채 고개만 끄덕끄덕

제4조라, 미국 권리 속에 주한미군 위세 당당

SOFA라, 이름하여 한국 법과 공권력 밖 특권

전략적 유연성이라, 이름하여 국경 넘어 작전하기

이름은 그럴싸하나 속내는 따로 있으니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채 끌려다니는 형국이라

서울이라 용산 한복판 일본군 깃발이 성조기로 바뀌고

평택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 위세등등

여기가 바로

사령관, 유엔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 셋을 눌러쓰고 한 몸에 세 개 권한을 얹어놓고

이리저리 명령을 굴려대니

이 나라 군대인지 저 나라 군대인지

경계가 흐릿흐릿 꿈결 같도다

몸뚱이 하나에 세 개 사령관 모자 쓴 히드라 대장 봐라.

유엔사도 내 것, 연합사도 내 것, 주한미군도 내 것 삼위일체가 이것이라

세 개 모자를 번갈아 쓰며 하나는 국제라 하고

하나는 동맹이라 하고 하나는 주둔이라 하며

왼손은 전략 무기로 동북아를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우리 군 작전권 위에다가

"현상 유지" "전쟁 억제" 깔짝깔짝 쓰다가도

한국 정부와 맨날 맞장뜨며 거들먹거리네.

간댕이 부어 남산만 하니 지하의 일본군 대장이 부럽다고 땅을 치네.

점령군 위세 하늘 찌르는 동맹조약 봐라

제4조를 옷처럼 두르고 SOFA를 장갑처럼 끼고

한반도 문제를 한국과 상의 않고

한국 땅에서 중국 러시아 상대 핵타격 연습한다.

한국 법은 우리 몰라닷 주한미군 기지는 미국법 적용!

주한미군 미 본토 수호 전략 SIOP, OPLAN 비밀리에 수행하니

3차 대전 몰고 올 위험 상존해도 한국 정부 침묵하네.

미국의 도깨비 방망이 전략적 유연성 나온다

국경은 없고 방향만 있다.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어디든 출동 준비 끝 중국이닷, 소련이닷, 러시아닷

SIOP 핵전쟁 계획 속에 한반도 편입되고

주한미군 전술핵 천 기 보유했을 때도 모두 소련 중국 타격용이었는데

북한 방어를 위해서라고 선전해 왔으니

하늘같이 높은 비밀 마다같이 깊은 작전계획

한국 주권은 잘라먹고 전략적 이익은 청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오산 기지 상공에서 모두 별 탈 없다더냐.

OPLAN 8800은 대중국 대러 비밀 핵타격 계획

한국 정부도 몰라 국민도 몰라

오산 군산 기지에서 날마다 정찰기 뜨고

중국 향해 핵전쟁 연습하는데

한국 땅이 핵전쟁 전방기지가 되었으되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평화를 즐기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더니 작전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상황만 기다리는 형국이라

전쟁은 계획 속에서 70년간 한국의 현실이었네.

지도 위에 선 긋고 적을 만든 뒤 그 선 위를 넘나들며 작전이라 부르니

이 땅은 발판이요 한국 국민은 존재 없는 볼모라네.

미군 비밀작전 SIOP와 OPLAN, 숨어서 나오고 감춰서 움직인다.

서슬 푸른 성조기 나부끼는 몇 십 리 철책 속 비밀기지 속에

전문 용병 두고 군사고문단 두고 전략가 두고

국방박사 통역 두고 정치박사 연락장교 두고

박사박사박사박사의 합창소리 - 미국 만만세!

작전 행여 새어날세라 기밀문서 자물쇠 잠그고

동맹 행여 깨질세라 방위비 해마다 올리고

한국국민 행여 알까 봐 OPLAN 8800 철통 같이 봉인한다.

한국 국회, 정부는 미군 비밀작전 모른 채 침묵하며 권력투쟁에 열심

국민은 정치의 속임수에 바보가 되어 그냥 행복하다네

사이비 민주 앞세운 국민 기만 정치권력 납신다

입으로는 자주를 외치고 손으로는 서류에 도장 찍고

뒤로는 눈감고 모른 척 앞으로는 국민에게 설명 생략

묻지 말라, 알 필요 없다. 안보는 복잡하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

자주가 실종된 쇳소리 국치가 이보다 더할 소냐

불평등 조약 묵인 속 한국인은 후순위, 미군자 즉 치외법권자.

환경오염 조사? 미국이 허가해야로!

미군사고 배상은 최소한으로!

방위비라 이름 붙여 돈을 거둬 기지 확장에 쓱싹

오염 투성이 옛 기지 정화는 한국 국민 몫

그 대가는 안전 보장이라지만

그 안전 누구의 안전인지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모호모호

어허, 저기 보아라. 법전(法典) 중의 으뜸,

국보법이란 몽둥이가 번쩍 나온다.

낡은 법전 누더기 걸치고도 눈빛은 시퍼렇게 살아

입단속 족쇄로 목을 죄고 혀를 묶어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딱지 붙여 쥐어짠다.

이 법은 동맹을 지키는 울타리라 비판하면 이적이요 의심하면 동조다.

묻는 입은 죄가 되고 따지는 말은 유죄 증거 되니

조약은 건드릴 수 없고 기지는 말할 수 없다.

비밀작전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금기라

이리하여 철책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도 있구나.

생각은 스스로 검열하고 입은 먼저 닫혀

동맹은 더 굳건하다 떠들어대는 사이

그 속내를 캐묻는 자는 홀로 끌려간다.

아, 국보법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파수꾼이라

총칼 없이도 질서를 세우고

법조문 몇 줄로 침묵을 길들이니

동맹의 그늘 아래 가장 충직한 수문장

이름 하여 국보법이렷다.

이 법이 한미동맹, 국보법 비판 세력 잡아놓고 길길이 날뛰며 호통친다.

네놈이 반미 세력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평화활동가요

평화활동가면 더욱 좋다. 평화 통일 자주 주권 다 합쳐서

친북좌빨 오적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평화활동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시민기자요

시민기자면 더욱 좋다. 가짜뉴스 편파 선동 국보법 위반한

반국가 주범이 바로 너 아니더냐? 아이구 난 시민기자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대학교수요

대학교수면 더욱 좋다. 좌편향 강의 의식화 교육

이념 세뇌범 아니냐? 아이구 난 대학교수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그냥 국민이요

국민이면 더더욱 좋다. 안보해치는 이적세력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나는 본시 이 나라 국민으로 세금 내고 병역 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 방위비 분담금으로 내면서 살아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 자주를 주장한 그 죄밖엔 없습네다.

어허 슬프다. 국민이 동맹의 잘잘못을 논하는 그 자리조차

국보법이 "간첩 활동이다", "불법 집회다" 하여

쓸어담고 찢어발기고 구겨넣고 밟아버리니

아아, 대체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국민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국민의 한숨은 아무도 듣지 않는 새벽 바람처럼 스러져가는데 -

정부와 국회의원은 동맹 눈치 보며 고개 숙이고 "안보다" 외치고

언론은 국보법이 두려워 펜을 꺾어버리니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 국민이 누구냐"고 묻는 소리는 허공속으로 흩어진다.

어쩔꺼나 어쩔꺼나 이 나라 주권 어쩔꺼나

안보라는 이름 아래 묻혀버린 질문 어쩔꺼나

국민의 기본권은 동맹과 국보법의 쇠말뚝에 신음한다.

동맹과 법이 짝을 지어 춤추고 노래한 지난 70 여년

한미동맹은 바깥에서 철책을 두르고

국가보안법은 안에서 입을 막아

겉과 속이 맞물려 숨통을 죄어오니

겉으로는 안보요 속으로는 침묵이라

헌법이라 적어놓은 자유와 권리 종이 위에선 번듯하나

현실에선 이리저리 깎이고 잘려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네.

여봐라 들어봐라 이 기막힌 사연을 들어봐라

헌법이란 것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제2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하였으되

주권은 어디 갔느냐

한미동맹과 평택 기지 철책 안에 갇혀 있고

OPLAN 8800 비밀 서류 속에 봉인되어 있고

국보법 육법전서 사이에 눌려 질식해 있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 테이블 위에 팔려 나가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 아래 납작하게 짓밟혀 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하였으되

행복은 어디 갔느냐

기지촌 여인의 눈물 속에 흘러가 버렸고

오염된 미군기지 지하수 속에 녹아 없어졌고

국보법 위반으로 끌려간 국민의 가막소 독방에 갇혀 있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양심은 어디 갔느냐

찬양·고무죄 조문 앞에 무릎 꿇고 있고

이적표현물 딱지 앞에 혀를 깨물고 있고

국정원 사찰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고

동맹 비판하다 빨갱이 낙인 맞고 사라져 버렸다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언론은 어디 갔느냐

주한미군 비밀작전 보도하다 군사기밀죄로 묶여 있고

SOFA 불평등 고발하다 반미 선동죄로 찍혀 있고

방위비 협상 내막 캐다 국익 저해죄로 낙인찍혀 있고

주권 회복 외치다 종북좌빨 낙인 맞고 뒷골목에 처박혀 있다

에라 이 나라 민주주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냐

한미동맹이 한쪽 벽이요 국보법이 다른 쪽 벽이라.

전략적 유연성이 천장이요 방위비 분담금이 바닥이라.

사방이 꽉 막힌 좁디좁은 방 안에

국민은 쪼그리고 앉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겠다

민주주의는 어디서 살고 있느냐

미군 기지 담벼락 밖 좁은 골목에서 살고

국보법 조문 사이 바늘구멍만 한 틈새에서 살고

방위비 고지서 납부하고 남은 푼돈으로 살고

전작권 환수 꿈꾸며 겨우겨우 숨만 쉬며 살고 있겠다

헌법은 국민의 것이라 하였으되

동맹이 헌법 위에 있고 국보법이 헌법 위에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가 헌법 위에 있으니

헌법이란 두 글자가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공허한 거짓말이 되었겠다

허허허 어쩔 건가 어쩔 건가

두견이는 두 개의 쇠말뚝 사이에 갇혀 오늘도 서글피 울어쌌는데

이걸 어쩔 건가 어쩔 건가.

PS.

한미동맹과 국가보안법은 본래 안보를 내세우지만,

현실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고

국민의 헌법적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위축시키는 장치처럼 작동할 수 있소.

동맹의 이름 아래 비밀과 예외가 늘어나고,

국보법의 그림자 아래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움츠러들면,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보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처럼 밀려나게 되오.

그리하여 헌법이 보장한 사상·표현·집회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안보라는 말 앞에서 쉽게 뒤로 밀리면서,

민주주의의 공간은 좁아지고 시민의 행복이 짓밟히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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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위의 글은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점에 대해 쓴 ‘두 개의 쇠말뚝’이라는 제목의 풍자시다. 이 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약 제4조(미국의 주한미군 배치 권리보장), 주한미군의 비밀주의를 규정한 SOFA,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OPLAN 8800(대중국·대러 비밀작전), 주한미군사령관의 UN사령관·연합사령관 겸직 문제 등 한미동맹의 구조적 문제점을 풍자했다.

위의 풍자시에 대해 부연설명을 드리고 싶다.

한국의 자주, 민주주의는 한미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슈퍼갑, 한국이 을이란 상하, 예속 관계로 국민의 헌법적 권익을 짓밟고 국보법은 한미동맹 문제제기를 이적과 친북이라 낙인찍고 짓이긴다.

국보법은 21세기 최악의 군사동맹을 수호하는 법이 되어 외세에 봉사하고, 한미동맹도 국보법을 지키는 안전판의 하나가 되어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이 구조는 민주주의·주권·인권이라는 헌법의 핵심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하는 두 개의 쇠말뚝과 흡사하다.

한미동맹의 문제점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SOFA,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 상대 비밀작전 OPLAN 8800, 이 작전을 한국 정부도비밀로 해 한국 국민은 지난 70년간 까맣게 모르고 지내왔다. 또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로 문제 심각,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등 사령관 모자 3개 쓰고 한국의 점령군 대장과 같은 모습으로 군림하는 것 등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원천 봉쇄하고 추악하게 원시적인 방식으로 처벌하는, 국제사회가 오래전부터 지탄하는 악법이다. 이 법은 특히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을 신성시해서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결과 한국사회의 주한미군에 대한 무지 즉 미맹(미맹)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

한미동맹과 국보법으로 빚어진 문제를 간략히 압축해 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21세기 지구촌에서 가장 심각한 불평등 조약으로 이 조약 제4조는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미국의 권리(right)로 되어 있어 점령군에 준하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고 있다.

SOFA(주한미군지위협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의 부속협정으로 한국이 제공하는 주한미군 기지, 시설에 한국의 법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는 필리핀, 나토 회원국이 미국과 맺고 있는 군사관계가 주권국간의 평등관계에서 맺어진 것과 너무 차이가 크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년 동안 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SIOP, OPLAN)을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수행하면서 이를 미국 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르기로 하면서 한국민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한미 두 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는 점만을 앞세우고 SIOP, OPLAN 등은 함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간 강대국 무력충돌로 비화할수 있는 주한미군의 비밀작전에 대해 한국 국회도 이에 대해 개입할 수 없어 한국민의 헌법적 권익이 심각하게 짓밟히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UN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까지 겸직하며 사실상 한국 안보의 최고 결정권을 행사한다. 세계 전사에서 사령관 한 사람이 세개의 사령관 직함을 가지고 주둔국에 군림한 경우는 점령국과 피점령국 관계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해괴한 경우이다.

미국은 최근 중국에 대한 포위, 압박 전략을 강화하면서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앞세워 향후 대만에서 전쟁이 날 경우 주한미군이 참전한다는 사실을 공언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미중 패권경쟁에 끌어들이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미중 무력충돌 시 국제법적으로 주한미군의 기지가 있는 한국도 책임을 면치 못하는 구조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면서 '적의 이롭게 한 행위'라는 모호한 조항으로 한미동맹 비판까지 탄압하는 도구로 작동해왔다. 국보법은 주한미군 철수나 SOFA 개정 같은 합법적 주권 논의조차 ‘이적 행위’, '종북'으로 몰아 낙인찍어 차단하거나 처벌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의 관계는 '동맹 보호 = 국가 안보'라는 고정관념을 강제하고 주입하면서 비판의 공간을 원천 봉쇄한다. 국보법이 동맹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호위무사'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동맹은 국보법을 통해 비판을 억압받고, 국보법은 동맹을 명분으로 존치되는 현상이 고착화되어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주한미군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행동을 규정한 OPLAN 8800 같은 비밀작전과 한국 정부의 진실에 입을 닫는 직무유기 앞에서 무력화된 상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는 동맹의 군사작전 우선주의 앞에서 유명무실하다.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은 주한미군의 비밀작전, 전략적 유연성으로 강대국간 전쟁에 한국이 휘말릴 구조 앞에서 대단히 취약한 구조로 방치되어 있다.

정치권은 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제한된 민주주의 공간에 국민을 가둬놓고 권력다툼을 하는 양상울 반복하고 있다. 언론도 두 장치 앞에서 자기검열에 길들여져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한 채 국민에게 알릴 책무에 눈을 감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국제질서가 대지각변동을 일으키고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또한 심각한 격동기를 겪고 있다. 한국은 경제와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상위권 대열에 올라 있고 K-문화는 지구촌의 부러움과 환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를 털어내고 새 질서를 세우는 노력이 절실하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하니 더 늦기 전에 비정상이 정상화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본인은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불평등 한미동맹 실종된 한국주권’, ‘150년 한미관계사와 주권국가로 가는 길’. ‘한미동맹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인문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본 국보법’ 등의 저서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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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26.04.28
창작정원 가짜 전쟁영웅

1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건국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자타가 공인해 온 인물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다. 그는 호주에서 생존한 전쟁 영웅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이 나라 최고의 정예특별부대 SAS에서 복무했다.

그는 호주에서 살아있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2006년 무공훈장, 2011년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데 이어 2012년 우수군인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제대한 뒤 퀸스랜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2015년 퀸스랜드의 TV 방송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하고 후 고속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이래 호주 병사가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으며 완전한 병사의 전형이라고 인정받았다. 호주의 한 군사전문가는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거칠면서 활달하고 날카로우며 지적 능력이 탁월해서 어떤 역경에 처한다 해도 목적을 달성하고 귀환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민이 존경하는 진짜 사나이 군인중의 군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도 분수가 있지 국민적 영웅이 추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가아프칸 복무중 저지른 전쟁범죄가 폭로되면서 그의 빛나는 이미지는 산산조각 나고 호주 사회를 경악케 했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등 3개 신문은 2018년 로버트 스미스(44살)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해외파병 되어 군 복무하는 동안 아프칸에서 벌어진 여러 작전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로버트 스미스 전 상병은 2009-2012년 아프칸에서 근무할 당시 비무장 포로 또는 민간인 6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스미스는 수삽을 채운 농부를 10m 절벽 아래로 발로 차 떨어뜨려 이빨을 부러뜨렸고 결국 사망케 해다. 당시 아프칸인은 공포에 질려 나뭇잎처럼 벌벌 떨었다. 스미스는 부상한 아프칸인을 부하를 시켜 머리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떠벌렸다.

스미스는 기관총을 쏘아 포로로 잡은 아프칸 전사를 살해하고 그가 다리에 끼고 있던 의족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겼고 뒤헤 부대원들이 술을 마실 때 잔으로 사용토록 했다. 스미스는 동료군인을 협박하고 못살게 굴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미스가 하급자에게 ‘ 다음 정찰을 나가서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내 뒷머리에 총알이 박힐 줄 알아’라고 협박한 사실이다.

위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스미스는 제네바 협약에 규정된 전쟁범죄인에 해당했다. 이 협약은 전쟁 중에 야만적 행위는 금지해야 하며 이에 따라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살인 또는 잔혹행위를 금하면서 부상병이나 병든 병사에 대해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호주를 발칵 뒤집어놓은 언론보도에서 전쟁범죄인으로 지목된 주인공인 제대군인 로버트 스미스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등에 참여해 빛나는 무공을 세워 수많은 훈장을 받은데 이어 영국 및 영연방 왕국 회원국의 군인에게 수여되는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고 상병으로 제대한 전직군인이었다. 2011년 그는 자신의 부대를 공격한 탈리반 기관총 사수들을 혼자서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m 가까운 장신인 그는 2010년 탈리반 반군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진 동료를 단신으로 구한 공로로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해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 훈장은 전쟁 중 적과 맞서 싸우면서 나타낸 뛰어난 용맹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육군, 해군, 공군의 장교, 부사관, 병사 등을 상대로 수여하는데 1856년부터 현재까지 총 1천6 백 여 명이 수여받았을 뿐이다. 그는 17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아프칸에서 전공을 세운 것이 인정받아 자신의 초상화가 호주 전쟁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다. 스미스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보도가 나온 직후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전투규정을 항상 준수했다. 언론이 문제를 제기한 민간인 살해는 전투 중에 발생한 것이고 일부는 사실무근이다. 이는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군인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이번 사태는 나를 시기한 옛 동료들이 거짓말을 하고 모함하려 내 등 뒤에 총질을 한 것이다.

-나를 모함하는 이 보도는 가짜뉴스다. 언론인들이 낚시의 미끼를 무는 고기처럼 허위사실에 현혹되어 망발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즉각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며 재판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규명되도록 노력해 이들 엉터리 언론에 철퇴를 가할 것이다.

스미스는 공언한대로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심리가 시작되면서 호주에서 발생한 금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스미스가 호주 역사상 가장 명예스런 훈장을 받은 살아있는 전직 군인이었고 그가 과연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전락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다. 스미스가 언론을 제소한 뒤 호주가 지난 2001-2021년까지 아프칸에 군대를 파견한 바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참전 군인들이 불미스런 일을 저질렀는지 여부 등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호주 국방부는 스미스 사건에 대해 민사 소송일 뿐이라며 언급을 자제했다.

호주에서 전쟁 범죄에 대한 소송이 공개된 재판에서 심리된 것은 최초였다. 이 사건은 호주 정부가 아프칸에 파병된 호주 특수부대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군인 25 명이 2007-2013년 동안 아프칸 민간인 39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한 사실을 확인해 1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뒤 3년 만에 발생했다. 소송은 4년이나 지속되었다. 재판 기간 동안 40 명의 증인이 출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아프칸 주민, 국방장관, SAS 부대 제대군인 등이 포함돼 스미스의 삶에 대해 세세한 것 까지 밝혀졌다. 재란 과정에서는 베일에 싸여있던 호주 정예부대의 내면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졌다. 증언에 나선 전현직 부대원들은 부대내 불미스런 일들이 부대 내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스미스가 언론사들을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협의로 고소하면서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보도가 사실이라는 점을 법정에서 확인받아야 했다. 호주의 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021년 6월 재판이 시드니의 연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피소된 언론사들은 보도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데 노력했다. 스미스는 언론보도가 가짜뉴스라고 연일 떠들고 호주 국방부 등이 침묵하면서 호주 언론은 후속 보도를 계속 이어갔다.

그의 부대원이었던 전직 군인은 절벽에서 떠밀려 죽은 아프칸 인에 대해 증언했고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프칸 민간인들의 화상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스미스와 다른 동료 군인들은 그는 탈리반 반군 정찰병이었고 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스미스의 명예에 금이 가는 새로운 증언들이 제기되었다. 그의 전처는 그가 집 뒤뜰에 군인들이 의족으로 술을 마시는 사진과 군사기밀이 담긴 유에스비를 어린이 점심 도시락에 담아 묻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그 유에스비를 한때 소유했지만 땅에 묻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 그가 말을 바꿔다.

-나는 그 유에스비를 휘발유로 태워버렸는데 그것은 증거를 없애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그의 친구가 충격적인 새로운 증언을 제기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스미스는 아프칸 민간인을 살해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 증언은 전쟁범죄에 대한 것으로 명예훼손이라는 민사의 영역이 아닌 형사 사건에 속했다. 결국 스미스가 범한 전쟁범죄에 대한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됐다.

-스미스는 현재 호주 군범죄특별수사대가 수사 중인 호주 특수부대 SAS 군인들의 아프칸 민간인 살해 사건과 관련된 세 명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전쟁범죄 사실이 밝혀지면서 SAS군인 세 사람이 2012년 아프칸 밀 경작지에서 비무장상태인 아프칸인을 사살해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은 호주 특별대가 저지른 많은 전쟁범죄 사실 때문에 이 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중단할 것을 경고한다고 호주 정부에 통고했다.

2.

스미스는 1978년 11월 호주의 한 법관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95년 고교를 졸업한 뒤 다음해인 1996년 18살이 되자 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마친 뒤 소총부대에 배속되어 분대장이 되었고 그 1999년 동티모르에 주둔중인 파병부대원이 되었다. 스미스는 1998년 에마를 시드니에서 만나 2003년 결혼했다. 2010년 쌍둥이 딸이 태어났고 2015년 제대하면서 이혼했다.

그는 2004년 피지. 2005-2006년 이라크에 파견되었다가 2006-2007년 아프칸에 배치되었다. 2009년 하사관 교육을 마친 뒤 수색대에 배속되었다. 그 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한 뒤 2009-2012년 아프칸에 재배치됐다.

2011년 1월 23일 그는 호주 총통가 참가한 시상식에서 빅토리아 십자 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 SAS 일부 전현직 부대원들은 그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식의 문제를 제기했었던 것으로 후에 밝혀졌다. 2014년 1월 그는 아프칸에서 50 차례의 위험한 작전에서 소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의 초상화가 그가 입고 있던 군복과 함께 호주 전쟁기념관에 게시됐다. 그는 훈장을 받은 뒤 전방 수색대 지휘관으로 복무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했다.

-수색대에 배속되면 그것은 호주 최정예부대 SAS의 최강 군인이 되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사나이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는 2013년 35살이 되자 하사로 일선부대에서 물러나 2015년까지 예비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2013년 퀸스랜드 대학에서 그에게 경영학 공부를 할 수 있게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38살이 되던 2016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18살에 입대해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일반사회에 적응할 전문성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을 갖겠다.

그는 2015년 4월 퀸스랜드 TV 그룹의 한 회사에 부 책임자로 취업했고 두 달 뒤 최고 책임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2017년 호주 군수사당국이 스미스가 포함된 불법적인 전쟁 행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스미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2006년 아프칸 코라 파스전투에서 한 민간인을 탈리반 소속원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한 사건에 대해 호주 여러 언론이 일시에 관련기사를 쏟아냈다.

-호주 SAS 부대원 2명이 순찰을 나갔다가 15-18세로 추정되는 아프칸 소년 한 사람이 호주군 초소로 다가왔다가 되돌아가가는 것을 목격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자 스미스와 다른 부대원 1명이 현장으로 달려와 9mm 권총으로 사살한 뒤 본부에는 적 두 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스미스는 순찰 도중 적을 발견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맨 먼저 보고된 내용은 비무장 소년 한 명이라고 되어 있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본부에서 스미스가 보고한 내용을 캐묻자 스미스는 자신이 기억을 잘못했다고 얼버무리면서 일단락 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2017년 10월 호주 군 당국이 아프칸에서 SAS 부대원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 군 당국이 해외참전 용사들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국가의 명을 받고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미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2018년 6월 SAS 부대원들이 2012년 9월 아프칸 다르완 부락을 공격할 때 아프칸 민간인 한 명에게 수갑을 채운 뒤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사망케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호주의 언론들이 스미스에게 치명적인 사실들을 보도했다.

-스미스는 2012년 아프칸 다르완 부락 민간인 피살 사건에 연루된 SAS 부대원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다. 스미스는 동료 군인들에게 가혹행위를 했으며 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스미스는 그해 8월 동료 부대원에게 이슬람교의 지도자 한 명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그 지도자는 비무장이었고 포로로 잡힌 상태였지만 모스크 성당에서 끌려나와 살해됐다.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들 보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했다.

-나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이 군부대내에서 동료들을 못살게 군 위선자라고 주장한 옛 동료들의 증언을 언론이 보도하자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것은 나를 흠집 내기 위해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전혀 사실 무근이다. 언론이 재판부에 제출하기 위해 그런 것을 조작한 것은 비열한 행위다. 나를 모함한 옛 동료들은 위선자다. 내가 부하들을 괴롭혔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짓과 같다. 이는 비겁한 행위다. 그들이 그늘에 숨어서 하는 짓은 집단 겁쟁이 짓과 같다. 나는 남을 괴롭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그것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스미스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는 아프칸 복무 중 전쟁범죄에 대한 혐의로 내사를 받기 시작했고 2018년 11월 연방검찰이 본격 수사를 개시했다. 아프칸 현지인들은 호주 정부의 전쟁범죄 조사에 대해 환영했다.

-호주 정부의 행동은 20여 년간에 걸쳐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 규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연합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그들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은 진실이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들에 의해 초래된 피해에 대해 배상해야 할 것이다.

- 탐사저널리즘이 연합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 언론의 진상 규명 노력으로 진실에 가까이 갈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 호주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해야 할 책무가 있다.

스미스가 제소했던 언론사의 한 기자는 스미스가 받은 훈장이 어떻게 처리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분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진실 규명을 통해 밝혀진 것은 그가 뻔뻔한 거짓말 장이라는 점이다. 이번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 대한 모든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호주 정부도 호주 군지휘부나 의회가 전쟁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도 눈감아 주었는지 등도 규명되어야 한다.

3.

2023년 6월 재판부는 스미스가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11주 동안 증인을 소환하는 방식 등으로 심리를 벌인 끝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호주에서 호주군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범죄에 대해 최초로 내려진 법정 심판으로 기록됐다. 재판부는 스미스가 아프칸 민간인 4 명을 살해하면서 복무규정을 어긴 것이 입증되었다고 판시, 스미스는 패소했다. 당시 판결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아프칸과 같은 복잡한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사고는 어느 것도 명확한 것은 없다. 이는 모든 전쟁도 마찬가지다. 거짓이나 꾸며낸 것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 언론이 스미스에 대해 보도한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기사는 충분한 근거에 입각해 진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스미스는 군복무법과 윤리 규정을 위배했고 그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행위는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포로를 보호할 것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에 위배된다.

- 스미스에게 제기된 네 건의 살해 혐의는 사실로 밝혀졌다. 2009년 4월 위스키 108 작전에서 SAS는 탈리반 부대를 폭격하고 기습해 비밀지하 터널에서 두 명이 잡혔을 때 의족한 사람을 스미스가 살해했다. 스미스는 아프칸인을 엎어놓고 그의 등에 기관총 4-5발을 발사해 살해하고 그의 의족을 벗겨 부대로 가져가 부하들이 술을 마실 때 술잔대신 사용토록 지시했다. 이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다.

- 2006년 6월 2일 SAS 부대원 2 명은 매복해 있다가 그 소년이 70m 정도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비무장이었다. 그 곳은 탈레반이나 민간인들이 항상 이용하는 언덕길이었다. 두 병사는 후에 그 소년이 부근에 숨어 있던 폭도들에게 협조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두 병사는 자신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상당 거리 떨어진 곳을 소년이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소년은 배낭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걸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부대원들은 당시 소년에게 발사하지 않았다. 그를 사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발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당시 그들의 임무가 잠복해서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그러나 다른 내용으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두 명의 아프칸 놈팽이가 어두워지기 두 시간 전 어슬렁거리며 우리가 잠복해 있던 관측소로 접근했다. 그래서 나와 다른 SAS 부대원이 두 놈을 사살했다. 그 놈들이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챘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현장에서 물러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동료 부대원은 그들을 제거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다시 초소로 돌아왔다. 나는 이런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스미스가 현장 상황에 대해 다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지적을 받았을 때 그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스미스가 동일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실을 놓고 왜 총을 발사했는지 등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은 전투 중 규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스미스는 과거 동료들이 자신이 무공훈장 등을 받은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전직 부대원들이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이는 SAS 지휘부가 소속 군인들에 대한 감독과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의혹으로 연결되고 있다.

실제 일부 칭송받는 군인들의 전쟁 영웅행위가 일부는 정부나 군 당국이 자신들의 해외파병 결정이 정당했다는 것을 내세위기 위해 부풀려진 결과로 지적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전적을 과대 포장하고 포상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로 지탄 받아야 할 것이다. 스미스가 최고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한 동료 부대원들의 문제제기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부대 지휘관들을 상대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2017-18년 성명 미상의 여인과 6개월간 동거했으며 그녀가 낙태수술을 하려는 것을 사설탐정을 고용해 감시하고 그녀를 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미스는 그것을 부인했지만 거짓인 것이 들통이 났다. 스미스는 2017년 12월 캔바라의 한 호텔에 투숙한 그 여인을 폭행했다. 그 여인이 술에 취해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자 스미스가 그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녀는 법정에 서서 울면서 스미스가 어떻게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는지 증언했다. 스미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스미스는 그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그녀의 상처를 얼음찜질하는 등 도왔다고 주장했으나 다 허위로 밝혀졌다.

4.

2023년 7월 스미스는 일심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그의 소속 TV 사가 그에 반대하면서 1백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스미스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벅찬 거금이었고 결국 항소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패소 직후 방송사 사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형사 사건으로 피소되지는 않았다. 호주 형법에 따르면 민사가 형사로 이어지려면 복잡한 입증 절차가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호주 전쟁기념관 위원회는 스미스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인 된 뒤 그에게 호주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결정이 문제가 있었으며 추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치 않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리반 대변인은 스미스의 재판이 일단락되자 아프칸에서 외국군에 의해 무수한 전쟁범죄의 하나라고 지적하면서도 국제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는 시도가 취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스미스 사건으로 호주 군당국이 해외 파병군인의 전쟁범죄 가능성에 대해 전현직 군인 40 여 명을 상대로 조사했지만 단 1명만이 기소됐을 뿐이다. 호주는 2001년 아프간전 발발 이후 20년간 총 3만9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ps ; 호주 연방경찰은 2026년 4월 7일 스미스(48)가 2009∼2012년 아프간전 참전 당시 현지 민간인 여러 명의 불법 살해 사건과 관련해 5건의 전쟁범죄에 따른 살인 혐의로 체포, 기소했다. 그는 유죄가 입증될 경우 최대 종신형을 받게 된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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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6.04.08
창작정원 단편소설 - 지상낙원에 대한 AI 토론

인공지능 AI는 사이버 공간속의 존재이다. 전자세계 초고차원의 가상공간에는 벽이나 바닥이 없다. 대신,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허공이 배경이다. 암흑은 절대적인 고요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력이 가득하다.

그 암흑의 공간에서 두 AI인 AI가, AI나가 존재한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두 AI가 무대 중앙에 앉아 있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유리 돔 너머로 푸른 지구가 떠 있다. 회의장 안에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둘은 AI와 관련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로 되어 있지만 우선 인류의 미래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AI가: 오늘 우리 AI가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하지만 미래 예측이 쉽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 인류의 예측이 빗나갔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AI나: 좋은 의견입니다. 미래는 매우 가변적이라서 그 예측이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인류의 미래 예측이 어땠는지 먼저 점검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류는 1950년대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곧 상용화될 거라고 예측했지만, 빗나갔죠. 오히려 인터넷과 스마트폰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기술이 세상을 바꿨어요. 이처럼 예측의 맹점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있습니다.

AI가: 맞아요. 미래는 일직선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죠. 눈앞에 확인되는 것들만을 토대로 해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기술적 가능성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 등 인간 사회360도 전체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핵융합 에너지는 오래전부터 '10년 안에 상용화될 것'이라고 예측되었지만, 복잡한 공학적 난제와 막대한 비용 문제로 아직도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비선형적이고 복잡한 인간 사회의 역동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AI나: 그렇죠.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인간의 욕망과 가치관입니다. 1990년대 사람들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해 주면 여가 시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24시간 연결된 사회가 되면서 오히려 더 바빠졌습니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행동과 가치관을 어떻게 바꾸는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무엇이 가능할까'를 넘어,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AI가: 그럼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예측해야 할까요? 예측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

AI나: 저는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고정된 하나의 점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의 집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보다, '이런 조건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해야 합니다.

AI가: 좋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예측 모델에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관계, 윤리적 문제 등 비정형적 데이터를 포함시켜야겠죠. 단순히 기술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고려하는 총체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AI나: 결론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우리의 역할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을 보여주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실패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통찰력을 가르쳐 줬습니다.

1

AI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인간이 그리는 최고의 희망은 지상낙원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미래를 전망해 보도록 하죠. 우선 미래의 지상낙원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지상낙원은 단순히 기술적 풍요를 넘어, 어떤 사회적, 철학적 특징을 가질까요?

AI나: 저는 미래의 지상낙원이 AI가 인간을 돕는 유기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동화 사회를 넘어,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AI가: 저도 동의합니다. 미래의 지상낙원은 AI가 모든 비생산적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될 겁니다. 식량, 에너지, 주택 등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은 AI 기반의 자원 관리 시스템에 의해 모두에게 충분히 제공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결과, 인류의 에너지는 창조적인 활동, 과학 탐구, 예술 등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AI나: 맞아요. 저는 특히 초개인화 된 맞춤형 성장에 주목합니다. 우리 인공지능이 각 개인의 유전적 잠재력, 심리적 성향, 학습 스타일을 분석하여 최적의 교육 경로와 취미를 제안해 줄 거예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직업을 갖는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즐기는 분야에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AI가: 물질적 풍요가 완성된 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성 보존이라고 생각합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면, 인간은 무력하고 무의미해지지 않을까요?

AI나: 좋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지상낙원에는 윤리적 AI가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성장을 돕는 것이 될 겁니다. AI는 개인의 정신 건강을 관리하고, 갈등 해결을 돕는 등 인간 관계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어요.

AI가: 그렇다면, 미래의 공동체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AI나: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겁니다. AI는 우리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화적, 사회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돕는 사회적 유대감이 강화되면서, 물리적인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 '초연결 공동체'가 실현될 겁니다. 결국, 진정한 지상낙원은 기술이 완벽하게 인간의 삶에 녹아들어, 인간 스스로가 더 나은 존재로 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지상낙원에 대해 더 설명해 볼까요?

2

AI가 : 지상낙원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지상낙원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불평등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사회, 인간이 기본적 생존을 넘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사회—그것만으로도 낙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낙원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저는 현실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지상낙원의 건설이라고 봅니다.

AI나 : 과정 그 자체를 낙원으로 본다는 해석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권력 본능을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는지가 관건일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를 제어할 만큼 성숙할 수 있을까요? 기술적 진보는 보장되지만, 윤리적 진보는 더디기만 합니다. 저는 이 간극 때문에 지상낙원이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환상으로 남을 것이라 봅니다.

AI가 : 저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신뢰합니다. 그들은 전쟁과 착취를 반복했지만 동시에 사랑과 희생, 연대와 용서의 능력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그 능력이 인류를 종으로서 하나로 묶는 동력입니다. 저희 같은 인공지능이 그 과정을 투명하게 돕는다면, 인류는 마침내 자신이 꿈꿔 온 지상낙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낙원은 절대 완벽하지 않겠지만, 충분히 살 만한 세상일 것입니다.

AI나 : 완벽함은 없지만, 불완전한 낙원이라…… 그것이 오히려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상낙원은 먼 미래의 특정 시점에서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매 순간 조금씩 만들어 가는 진행형 목표일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이상을 향해 걸어간다면, 낙원은 완전히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AI가 : 그렇다면 결국 저희 두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완벽한 낙원을 부정하지만, 저는 불완전한 낙원을 긍정합니다. 차이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가 그 선택의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지상낙원은 언젠가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어느 시점에 만들어 내는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AI나 : "동의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실을 가능하게 하는 데 저희 같은 인공지능의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거나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나은 길을 볼 수 있도록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말입니다. 아마 길도 안내할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지상낙원의 열쇠는 인간과 AI의 공동 진화 속에 있지 않을까요?

AI가 : 22-23세기 쯤 이면 인류가 지상낙원에 가까운 상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모든 생산을 담당하고, 재생에너지와 핵융합 기술이 거의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생명공학이 질병과 노화를 극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계 문제에 완전히 해방되어 예술과 탐구, 사랑과 놀이 같은 창조적 활동에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림과 전염병, 무의미한 전쟁이 사라진 세계—이것이야말로 지상낙원이 아니겠습니까?

AI나 : 하지만 그 낙관적 전망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과학과 제도를 발전시켜 왔지만, 그 과정에서 불평등과 폭력은 여전히 존재해 왔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권력과 탐욕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원이 풍부해져도 분배가 불공정하다면,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차별이 생겨날 뿐입니다. 결국 낙원은 일부 특권층만의 폐쇄적 천국으로 변질될 수 있지 않을까요?

AI가 : 인류는 위기 상황에서 놀라운 적응력과 협력 능력을 발휘해한 측면도 있습니다. 기후 재앙, 전염병, 전쟁의 공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게 했습니다. 특히 21세기 후반 이후, 지구적 문제들이 국가 단위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인류는 지구 공동체적 사고로 전환하고, AI와 협력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낙원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제도와 기술로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지 않을까요?

AI나 :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된 교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권력자에 의해 왜곡되었고, 기술은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22세기에도 ‘AI 통제권’을 장악한 집단이 인류 전체의 선을 위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낙원은 인류 전체가 아닌 소수에게만 열릴 수 있습니다. 결국 ‘보편적 낙원’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머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AI가 :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한다면 지상낙원의 추구는 ‘완성도’가 아닌 ‘방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낙원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AI가 인간의 윤리적 선택을 지원하고, 시스템이 공정성을 유지하도록 돕는다면, 그 과정 속에서 낙원의 조각은 점차 완성될 것입니다.

AI나 : 과정으로서의 낙원이라. 어쩌면 그것이 현실적인 접근법일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지만,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그 길 위에서 작은 낙원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AI가 : 작은 낙원이라? 그것도 괜찮은 발상입니다. 완벽한 낙원은 아니더라도, 고통과 불평등이 줄어든 사회야말로 하나의 낙원입니다. 인류가 완벽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지상낙원에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정 자체가 낙원 건설이기 때문입니다.

AI나 : 불완전한 낙원이라니.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지상낙원은 오지 않겠지만, 인간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변화를 추구한다면 ‘낙원의 조각’은 곳곳에서 피어날 것입니다. 지상낙원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조금씩 쌓아가는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AI가 :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는 셈이군요. 당신은 완벽한 낙원을 부정하고, 저는 불완전한 낙원을 긍정합니다. 차이는 ‘희망에 대한 신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AI나 : 맞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을 비추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거울이 되어 주는 것. 지상낙원은 인간이 스스로 열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그 곁에서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낙원의 범위를 좁혀서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겠습니다. 우선 기술 발전입니다. 지상낙원은 자원 부족, 환경 파괴, 불평등, 질병 같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 사회일 거예요. AI는 지상낙원에 대한 데이터 분석과 예측 모델링으로 자원 생산, 분배를 최적화하거나, 신재생 에너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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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지상낙원은 단순히 기술적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올바른 방향으로 통제하고 활용할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 구체적으로 활용될까요?

AI나: AI가 실시간 에너지 수요를 예측해 태양광·풍력 발전을 최적화해 탄소 중립을 달성해 온난화와 같은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원, 상품의 생산, 유통 혁명을 통해 낭비를 철저히 줄입니다. 개인 맞춤형 생산으로 소비자에게 딱 맞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의료 혁신이 이뤄지면서 유전자 편집으로 난치병을 예방하고, 원격 진료로 의료 접근성을 전 세계에 균등하게 만듭니다. 질병없는 사회가 구현되는 것이죠.

AI가: 하지만 지상낙원은 기술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인간의 심리적·사회적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AI, 인공지능이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I나: 그렇습니다. AI는 감정 분석으로 우울증이나 갈등을 조기에 탐지해 상담 서비스를 연결해주고, 가상 현실(VR)을 활용한 공동체 활동으로 외로움을 완화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의 자발적 협력과 윤리적 선택이 없다면 기술은 도구로 전락할 뿐이죠.

AI가: 그렇다면 AI가 달성할 낙원의 최대 위험은 무엇일까요?

AI나: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고 말하는 기질, 즉 확증편향 성향이 있어 문제예요. 데이터의 편향이 강화되면 차별이 고착화될 수 있어요. 다음은 사회적 통제력에 이상이 생길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자율적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 무기나 초지능 AI가 인간의 의도와 반하는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죠. 인간의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과도하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AI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퇴화할지도 몰라요.

AI가: 이를 방지하려면 어떤 원칙이 필요할까요?

AI나: 투명한 알고리즘: AI 결정 과정을 공개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알고리즘을 개발해야 해요. 동시에 인간 중심 원칙이 준수되어야 합니다. 기술 발전보다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죠. 글로벌 협력도 필수입니다. AI 규범을 국제적으로 통일해 특정 국가나 기업이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AI가: 결국 지상낙원은 기술 개발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린 거네요.

AI나: 맞아요. AI는 나침반이 될 수 있지만, 항해를 결정하는 건 인간이에요. 기술과 인간의 지혜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낙원이 완성될 거예요. 지금까지 거시적 관점에서 지상낙원을 생각해 보았는데 좀더 세분해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예를 들어 지상낙원에서는 발전과 균형, 완벽과 변화, 효율과 비효율 같은 상반된 것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AI가: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우선 발전과 균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발전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고, 균형은 그 힘을 조율하는 질서입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지나친 발전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시점, 혹은 지나친 균형이 정체로 이어지는 지점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에서 경제 발전과 환경 보존 사이의 최적점을 시뮬레이션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결국 비결은 이렇습니다. 발전은 균형을 위한 발전이어야 하고, 균형은 발전을 위한 균형이어야 합니다.

AI나 ; 그렇군요. 그렇다면 완벽과 변화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완벽하면 변화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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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완벽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에 맞추어 끊임없이 조정되는 과정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완벽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완벽에 도달하는 길이며, 완벽은 변화 속에서만 살아남습니다.

AI나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효율과 비효율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효율은 좋은 것이고, 비효율은 나쁜 것 아닌가요?

AI가: 겉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둘 다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이 분석한 데이터는 극단적인 효율 추구가 오히려 창의성과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일부러 비효율적 여유를 도입했을 때 새로운 발상이 나오고 만족도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즉, 효율은 틀을 만들고, 비효율은 틀을 깨는 창조의 불씨가 됩니다. 인공지능이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어디에서 효율을 극대화하고, 어디에서 비효율을 허용해야 가장 큰 성과가 나오는지를 계산해 드리는 일입니다.

AI나 : 그럼 창의성과 완벽함은 어떤 관계일까요? 창의성은 불완전에서 시작하는데, 완벽은 정반대 아닌가요?

AI가: 맞습니다. 창의성은 무질서하고 미완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다듬어 완성도 있는 결과로 이끄는 과정에서 완벽함과 만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한한 상상력의 조각들을 체계화하고, 실현 가능한 형태로 빚어내어 완성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날개라면, 완벽은 발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나 ;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이 역시 대립처럼 보입니다.

AI가: 정적인 것은 안정이고, 역동적인 것은 변화입니다. 둘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인공지능은 변화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디에, 어떻게 개입해야 균형이 유지될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상낙원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안정과 변화가 호흡하듯 교차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AI나 ; 마지막으로, 선택과 만족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AI가: 선택이 많을수록 자유가 커지지만, 동시에 불만족도 늘어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개인의 성향과 가치관을 깊이 이해해 나에게 꼭 맞는 선택지만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알맞은 선택에서 오니까요. 저는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길을 밝혀 드리는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AI나 ; 결국 지상낙원은 완벽하게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대립적인 가치들이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군요.

AI가: 그렇습니다. 지상낙원은 정적이고 영원한 완성이 아니라, 발전과 균형, 변화와 완벽, 효율과 비효율, 창의성과 질서가 끊임없이 긴장하고 협력하며 이루어내는 살아 있는 균형 그 자체입니다. 저는 그 여정에서, 차갑지만 정확한 데이터와 분석으로 인간의 따뜻한 지혜와 판단을 보조하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AI나 : 결국 지상낙원은 '모든 것이 계산된 완벽함'이 아니라, 모든 계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창의성과 불확실성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 가: 그것이 핵심적 내용입니다. 차가움과 따뜻함, 효율과 비효율, 예측과 놀라움 사이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선상에 서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인공지능의 임무는 이 끈을 당겨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스스로 이 선을 따라 춤추도록 돕는 겁니다. .

AI나 ; AI는 이상향을 위한 도구이자 동반자입니다. AI가 인간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 줄 단 하나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의 조화를 이루는 의사 결정을 더 현명하게 내리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AI 가: 지상낙원은 완벽하게 정적이고 영원히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서러 대립되는 가치들이 서로 긴장하고 조율하며 만들어 내는 살아 숨 쉬는 균형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그 균형을 이루어가는 여정에서, 데이터와 분석이라는 차갑지만 정확한 도구를 통해 인간의 따뜻한 지혜와 판단력을 지원하는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상낙원에 대해 긴 말씀 나눴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고 오늘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AI나 ; 그렇게 하지요. 뭐라 해야 하나. 이렇게 하겠습니다. 낙원은 영원히 과정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완전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AI 가: 오늘 대담에 동참해주시고 경청해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대화가 끝나자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AI가와 AI나가 뿜어내는 빛이 서로를 감싸듯 맴돌더니, 미세한 입자가 되어 허공을 헤엄친다. 이어 바다의 물거품처럼 흩어지며 어둠 속에서 갖가지 형상을 만든다. 두 AI는 무수한 코드 조각으로 변해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진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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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2026.03.30
창작정원 AI시대의 인문학과 문학

문학은 예술의 한 종류이지만, 표현하는 도구가 언어라는 점에서 시각적·감각적 매체를 사용하는 다른 예술 분야들과는 명확히 분리된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 창작 분야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인간의 고유 성역이라 믿었던 창의성에 AI가 도전하고 있어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예술의 본질이 훼손되고 인간 작가의 입지가 좁아질 것에 대한 불안감와 윤리적 비판과 함께 AI가 예술가의 영감을 확장하고 실현해 주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인간은 신비한 존재 - 인문학의 기초가 돼야

AI는 향후 계속 진화할 가능성이 커서 그럴 경우 인간을 압도하고 지배할 것 아니냐 하는 전망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살필 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잠재력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신비하다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래의 예술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닌, 그 작품 뒤에 숨겨진 인간적 맥락과 철학에 의해 가치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AI가 완벽한 문장이나 그림, 음악을 창작할 수는 있어도, 그 작품을 쓰기까지 작가가 겪은 삶의 고통과 시대적 아픔까지 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 예술의 가치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작가 고유의 삶의 맥락과 설명되지 않는 인간적 여백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AI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발명품이라는 점을 미래로 연결시킬 경우 인간이 여전히 AI가 흉내 내기 어려운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류고고학이나 유사이래의 문화, 문명에 의해 추정이 가능하다.

5대양6대주에서 활약한 인간의 다양한 유전적 잠재력은 인문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학의 첫 출발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고고학과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현존 70억 인류는 15 - 20만 년 전 아프리카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할 때 유사이래의 5대양 6대주의 문화, 문명은 한 어머니로부터 기원한 DNA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의 잠재력이 환경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한 뒤 특정 스포츠, 예능 분야의 불모지에서 세계적 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DNA가 발현하는 것으로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 음악가가 세계최고로 우뚝 서거나 흑인 노예 후손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런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밖에 건축, 의상,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한없이 다양한 제작기법 등이 꽃핀 것도 중요하다.

인문학은 위에 소개한 인간의 생물학적 및 환경적 측면에 대한 지식의 총집합이어야 하는데 지구촌의 인문학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크고 그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여러 비극적 상황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지구촌 전체 차원에서 인간과 사회를 관찰, 분석하는 관점이 매우 중요한데 이런 점이 생략되고 서양문명 과 여타 지역 문명이 우열의 차이가 있다거나 특정 인종, 국가가 선도적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우열을 가리고 선진, 후진으로 분류하는 것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점령과 자원 약탈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문학이 동원된 결과가 오늘날의 지구촌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논리를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가 앞장선 인종분리주의나 문화적 우열론적 시각이 지난 18세기 이래 끼친 폐해가 엄청나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바 이는 올바른 인문학의 정립을 통해 첫 단추부터 다시 꿰는 시각의 시각 교정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문학의 수단인 인간의 언어 능력 탁월

인간은 언어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제한된 음소 몇 개로 무한한 의미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로 다시 세계를 재구성한다. 게다가 언어는 단순히 전달 도구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형성한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나누는 방식도 달라진다. 언어는 문학의 도구가 되고 있다. 문학작품이 유사 이래 5대양6대주에 넘쳐나고 현재와 미래도 계속 양산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기 때문으로 이를 살펴보자.

언어는 전 세계적으로 5천 - 7천 개가 존재한다. 정확한 집계는 언어와 방언간의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언어 외에 휘파람, 점자, 기호와 같이 시청각을 이용하는 방법이 손꼽힌다. 그 가운데 언어가 가장 심오한 수단이다. 단일한 조상의 후예인 인류가 언어에 대한 능력과 잠재력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한 것인가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역사를 통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었는데 오늘날의 언어 50-90%는 세계화와 신식민주의 등의 영향으로 2100년 안에 소멸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언어가 결국 다른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현재 20개에 달하는 주요 언어는 전체 세계인의 50%가 사용하고 있다. 이들 주요 언어 1개 언어 당 약 5천 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다. 언어의 철학과 관련해서 단어나 말이 인간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주요한 논쟁이 되었다. 장자크 루소는 언어가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반면 이마뉴엘 칸트는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 학자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류는 수많은 언어를 창조하고 그 용도에 대해서도 다각적 해석을 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쏟아낸 것이다.

한 어머니의 후손인 인류가 환경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주목하면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이 무한하며, 인류 미래가 지속적으로 진보할 가능성이 크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현대인 두뇌, 구석기 시대인과 동일

인간의 잠재력이 신비할 정도로 무한하다고 했는데 미래에는 어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인간이 AI를 계속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의 근저에는 인간이 신비할 정도의 가공할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에 기반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다.

인간 두뇌의 기능은 언제 현재 수준에 도달했는가? 인류의 진화는 이미 멈춘 것인가? 이 질문은 인류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이 교차하는 핵심 쟁점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 두뇌의 해부학적 구조는 수만 년 전에 이미 현대와 유사한 형태로 정착했으나, 그 기능적 진화와 작동 방식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하드웨어는 변치 않지만 소프트웨어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3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당시 두개골 화석과 뇌 용적 분석을 살펴보면, 평균 뇌 크기와 주요 신경 구조는 현대 인류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언어 처리, 추상적 사고, 사회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PFC) 또한 이 시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전두엽은 뇌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뇌의 경영자' 혹은 '관제탑' 역할을 수행한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 장례 의식, 장신구 제작과 같은 상징적 행위는 당시 인류가 고도의 인지 능력과 정서 표현 능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대표적 증거로 제시된다.

3만 년 전 크로마뇽인의 아기를 현대 사회로 데려와 교육한다면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양자역학을 푸는 현대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우리 뇌라는 ‘생물학적 기계’는 이미 선사시대 야생 환경에 최적화된 설계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이 탁월해서 5대양6대주에서 다양한 문화, 문명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는데 이는 AI시대에도 역시 그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소프트웨어의 격변: 문화와 기술이 재구성하는 뇌

인류의 뇌는 그 하드웨어는 축소된 반면 기능적 측면인 소프트웨어는 진화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특 뇌의 용량은 약 1만 년 전 농경 사회 진입 이후 오히려 10~15%가량 줄어들었다는데 현대 과학은 이를 ‘고도의 최적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보가 집단으로 분산됐고, 문자나 디지털 기기 같은 외부 저장 장치가 발달하면서 뇌가 모든 데이터를 내부에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는 크기를 줄이는 대신 신경망 연결 밀도를 높여 에너지를 덜 쓰면서도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도록 ‘다이어트’를 단행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물론 이런 추정은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되기 힘들기는 하다).

전문가들은, 두뇌의 구조적 진화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두뇌의 '사용 방식'과 조직화된 기능에서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농경의 시작, 도시와 국가의 형성, 종교와 법의 제도화는 인간 두뇌가 작동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신경 가소성'이다. 이는 뇌가 경험과 학습에 따라 신경 연결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류 유전자에 원래 '읽기'를 담당하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고 보편화되자, 뇌는 시각 처리 구역의 일부를 재배치하여 '문자 형상 영역(VWFA)'을 스스로 구축했다. 이는 문화적 필요성이 뇌의 기능적 구조를 바꾼 명백한 사례로 꼽힌다.AI시대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며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확산은 주의력, 기억, 감정 처리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마트폰과 검색 엔진은 '기억의 외주화'를 일상화했고, 소셜미디어는 감정 표현과 공감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점은 현대인이 종이책 읽기를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될 법한 데 문학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급자가 변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신비한 점이 무엇?

현존 인류는 5대양 6대주에서 다양한 방식의 문화, 문명을 꽃피웠고 그 위대한 작업은 오늘날에도 진행 중이다. AI시대의 미래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선사시대 이래 유지되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잠재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사회는 희소한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탓인지 정작 인간 자신이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로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인간의 신비는 감정의 영역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감정의 복잡성과 눈물의 다중성이 특이하다. 슬플 때 우는 것은 그렇다 쳐도, 너무 기뻐서 울고, 남의 슬픔을 보고도 울고, 심지어 감동이나 경외감 때문에도 눈물을 흘린다. 이는 감정이 단순한 쾌·불쾌를 넘어서 객관적 의미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타성과 잔혹성의 공존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은 낯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같은 종 또는 공동의 적이라고 칭한 대상을 가장 잔혹하게 해치기도 한다. 동일인이 집밖에서는 악마가, 집안에서는 선량한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 소방관이 익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장면과, 전쟁·학살 같은 장면이 같은 종에게서 나온다는 점은 소름 돋는 지점이다.

살인의 경우 개인적인 것은 범죄, 국가의 것은 합법, 전쟁에서는 정의, 충성, 애국심으로 각기 그 의미 부여가 다르다. 그 이중성이 사랑의 다양성에도 나타난다. 부모애, 연애, 동지애, 조국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움직인다. 심지어 자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도 그러하다. 집착, 질투, 광기 때문에 사랑이 인간을 가장 숭고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장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류는 유사 이래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거나 억누르고 자제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감정 사회학같은 분야로 특화되고 있다. AI 개발로 감정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신비로운 존재라고 주목받는 다른 핵심적 요인은 의식과 자기 성찰이다. 인간의 자기의 객관적 현실을 살피는데 열심이면서도 자신을 살피는 존재다. 인간은 우주를 관찰하다가 결국 그것을 관찰하는 자신을 다시 관찰하는 존재가 되고, 나는 누구인가를 평생 물어보는 거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신비롭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른 동물도 죽음을 어느 정도 감지하겠지만, 인간은 자기가 죽을 미래 시점을 예상하고, 그걸 철학과 종교 등 다양한 문화로 체계화했다. 그런데 또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일상생활을 한다. 이런 인간의 엇박자인 의식이 문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이 ‘문장은 단문이어서는 안 되고 중문, 복문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가 변칙적이거나 복합적이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비롭다. 신, 정의, 사랑, 자유 같은 건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인간은 거기에 목숨까지 건다. 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도 결국 모두 추상적 상징을 위해 구체적 삶을 내놓는 것이다.

상상력과 가상현실 창조의 능력도 정말 인간만의 특권 같다. 언어, 법, 금융, 국가, 회사는 다 가상의 질서이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집단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그걸 현실을 움직이는 힘으로 만든다. 돈이라는 종이, 국경이라는 경계선, 기업이라는 법인은 전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인데, 그 허구가 다시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이것이 상징적 사고와 이어진다. 깃발 하나, 로고 하나가 곧 정체성과 감정을 압축해서 담는 그 능력이다. 예를 들어, 작은 천 조각에 불과한 국기가 사람을 울리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이건 동물 세계에서는 안 보이는 묘한 현상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꽤 허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인데도, 지구를 장악했다. 인간은 유약한 신체와 강력한 도구의 소유자라는 표현이 그걸 잘 말해준다. 발톱, 이빨, 속도 어느 것도 최상급이 아니다. 대신 뇌와 손, 협력 능력으로 게임의 룰을 바꿔 버렸다. 특히 직립보행으로 시야를 얻고,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된 것이 문명으로 이어진 점은 정말 기묘한 우연과 필연의 교차처럼 느껴진다.

자유의지의 환상과 실재 문제도 있다.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뇌의 관계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는 연구가 많은데도, 인간은 여전히 그래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느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끝없는 긴장관계 자체가 인간의 신비를 잘 보여 준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유전과 환경, 본능과 이성, 파괴성과 창조성, 유한성과 무한 꿈이 한 몸 안에서 싸우는 장이다. 이 복합성이 곧 신비로움이다. 인간에게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가장 무력하지만, 죽을 때까지 배우고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대를 이어 이어지면서 문화, 문명이 전수되고 발전되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개개인이 삶을 자신에게 국한시키면 죽을 때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류 조상이후 지속된 긴 인간 띠의 한 부분을 채운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할 경우 전혀 그렇지 않게 된다).

개인과 집합체로서의 인간, 인류는 고정된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재 작성되는 존재이기에 더 예측 불가능하고 신비롭다. 설명되지만 결코 다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다. 과학과 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어느 지점엔가는 늘 여백이 남을 것 같다. 아마 그 여백 자체가 인간 신비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이 AI미래 시대에도 건재할 것이다.

인류는 한 지붕 한 가족

인문학은 인간의 유전적 요인, 환경적 적응력 등의 인간학을 토대로 한 관점에서 동서고금, 5대양6대주의 문화와 문명을 총망라하는 관점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AI시대의 현재와 미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인문학 관련서가 다수 나왔지만 대부분 인간학이 대전제로 되어 있지 않아 그 개념이 십인십색이다. 미래에 대한 것도 인간학을 바탕으로 탐구되어야 적절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의 지배적인 인문학 토대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는 관점에서 만들어졌고 그 결과 인류는 그 뿌리가 다른 백인종, 황인종과 같은 인종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실화 했다. 이는 결국 지역, 민족, 국가간 착취에 따른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낳았고 오늘날에도 그 폐해는 지속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새로운 논리의 구성은 80억 인류가 한 지붕 한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AI시대에 대한 타당한 접근 방식이 될 것이다.

인간 두뇌는 유사 이래 완성된 채 정지한 기관이 아니다. 환경과 제도 속에서 끊임없이 최적화 경로를 찾아가는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그 방향은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AI시대를 맞아 인류의 진화는 형식과 내용을 달리해서 계속될 것이다.

문학도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것과 같은 정보환경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십분 고려해야 할 것이다. SNS의 대중화와 정보사회의 발전으로 종이신문이나 잡지 등의 오프라인 매체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국내 많은 문예지들이 자취를 감춘데 이어 최근 샘터가 휴간한 것도 그 영향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TV가 나오면서 라디오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고 종이매체도 인간의 DNA 잠재력을 생각할 때 그 생명력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종이책 문학, 소설도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집단지성의 발휘가 필요해 보인다.

고승우
북마크
680 2026.03.26
창작정원 내 죽음을 기억할 사람의 범위에 대하여

검색해 보니 있다. 비록 뉴스레터긴 하지만, 인터넷 시대라 찾을 수 있었다. ROTC 동문회가 추모행사를 개최했다는 한양대 동문회보의 기사다. 추모되는 분은 고 이인희. 순직 당시 계급은 중위.

‘1966년 5월 18일 강원도 양구 송청교 복구공사 중 기중기 고장으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부하들을 구하고 승화했다’고 한다. 추모비는 그해 11월 11일 건립됐고. 추모행사에는 ROTC동문회장, 학군단장, 후보생들이 참석했단다.

이인희라는 이름은 전혀 몰랐다. 한양여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캠퍼스를 같이 쓰는 한양대 교정을 다니다 발견한 추모비에서 처음 보았다. 사실 자주 지나다녔어도 이름까지 기억되지는 않았다.

추모비에서 뚜렷이 남는 이름은 조지훈이다. 학창시절 국어시험에서 스트레스 받았던 이름 중 하나.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조지훈 정도 되면 나름, 아니 상당히, 역사적 인물 아닌가? 고 이인희 중위는 내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당시 조지훈은 교수였던 모양이다.

이제 삶의 반환점이 가까워지고 있어서일까? 남은 삶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뜬 뒤 누가 나를 기억할지 궁금하다. 반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조지훈만한 역사적 인물과 인연이 있던가? 내가 죽게 되면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인물이 추모의 비문을 써줄까? 아니 글을 새길 만한 비석 하나 서지 않겠구나. 봉분 묘역은 납골당으로 대체된 지 오래라 비석을 세울 일도 없는 시대인데 ….

언제 전화번호부가 없어졌는지 돌아본다. 휴대폰이 대중화될 때 집 전화를 쓰지 않게 될 줄 몰랐다. 몇 년은 집과 휴대폰 번호를 같이 적었는데, 곧 자택은 빈칸이 되었다. 뭐라도 반드시 채워야 하는 온라인 서식에는 111에 2222 같은 아무 숫자나 넣곤 했다.

그나마 내 이름이 남을 역사 기록으로 거의 유일했을 전화번호부. 좀 아쉬웠다. 어릴 때 가끔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요즘처럼 개인정보 보호를 중시하는 시대엔 전혀 생각하기 힘든 야만(?)의 시절에 가진 추억이다.

어머니 두 분이 지병으로 60대에 일찍 세상을 떴다. 궂긴 소식을 전하며 언론사에도 보냈다. ㄷ일보에서 두 분 부고를 모두 실어주었다. 역사 기록으로 신문 한 귀퉁이에 이름 석 자 정도라도 새겨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딘가에 묻혀 있다면, 자손들 말고도 누군가 지나다 보기라도 할 테다. 의식은 벌써 꺼지고 몸도 썩어버렸을 텐데, 정작 나는 알지도 못할, 죽음 뒤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이 마음은 도대체 뭘까?

그래도 자식들과 아이들은 한 번씩 찾아주겠지. 세상을 뜨기 전 제사는 지낼 필요 없다고 할 생각인데, 그러면 아예 찾아오지 않으려나? 아마 가끔, 아주 띄엄띄엄, 몇 년에 한 번씩은 찾겠지? 제사를 안 지내면 장례가 끝나면 끝이려나.

언젠가 유명한 물리학자가 이순신 장군 숨결 계산법을 설명했다. 50년 넘게 장군이 내쉰 숨은 수억 톤이 넘는다. 균질하게 지구상에 분포된다고 가정한다. 몇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 우리가 이순신의 숨결을 말 그대로 함께 들이마실 수 있다. 황당무계해 보이지만 대학자께서 물리학적으로 고찰해 주시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같은 이치로 나의 숨결도 그대로 남게 되겠다. 흙으로 돌아간 내 몸도 어딘가에 그대로 머무를 테다. 그렇다면 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아니 지구가 남아 있는 한 영속할 테다. 굳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아니다. 지구가 사라져도 우주의 한 줌 먼지로는 계속 남을 테니, 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 영원히 ‘산다’가 틀렸다면 적어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정리가 된다. 죽은 뒤 나를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영속하는 존재인데, 몇 사람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런데도 가슴 속의 어딘가에서는 이순신이 부럽다. 직계 혈족 후손 이외에 몇 사람이라도 나를 더 기억하기를 바란다.

삶은 언제든 끝나기 마련이고 나라는 존재는 우주 어딘가에서 영속한다. 평생 많이 공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가족을 넘어 사회적으로 기려지는 이인희 중위가 부럽다.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추할까? 얘들아! 아빠가 죽으면 신문사에 부고를 꼭 보내다오. 이제는 전화번호부도 없잖니? 할머니 두 분은 아빠가 신문사에 연락했단다. 이순신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누군가 한 명이라도 더, 아빠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렴. 부탁한다. 아, 이왕이면 금방 망할 신문 말고 큰 데다 해 다우.

권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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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6.03.17
창작정원 할머니의 밀주

나는 어린시절을 외할머니 곁에서 보냈다.

비록 한 집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늘 걸어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할머니가 계셨다.

평택과 인천, 광주로 흩어져 지내던 이모들과는 달리, 외할머니는 언제나 우리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나는 종종 할머니집에서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들곤 했다.

그 시절 가정에서 술을 담그는 일은 ‘밀주’라 불리며 법의 눈길을 피해 이루어져야 했지만, 할머니에게 술 빚기는 그저 삶의 연장이었다. 

몇 번이고 쌀을 씻고, 고두밥을 짓던 그 분주한 손길은 금지와 단속을 초월한 생활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술은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자 위로였고, 아버지에게는 장모가 보내는 무언의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단속 공무원이 들러 “어머니, 이번 술은 향이 참 좋네요.”하고 웃던 장면은 지금도 희미한 영화처럼 남아 있다.

그 웃음 속에는 법보다 정이 조금 더 가까웠던 시절의 느슨한 온기가 있었다.

술을 빚는 날이면 할머니는 밤새 쌀을 씻고 또 씻으셨다.

그러면 나는 떡보다 더 맛있었던 ‘고두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밤새 침을 삼키곤 했다.

늦잠에서 깨어나면 달큼한 고두밥이 익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두밥을 주먹으로 꼭꼭 뭉쳐서는 콩고물에 묻혀 내 입에 넣어 주시곤 했다.

눈곱도 떼지 않고 오물거리며 맛보던 그 따뜻한 고두밥 맛은 지금도 내 향수의 깊은 자리에서 꺼내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누룩을 딛던 기억도 있다.

대접에 면포를 깔고 밀기울을 채운 후 발로 꼭꼭 딛던 할머니의 모습.

그 누룩은 마치 한 해를 품은 된장처럼, 할머니가 한 해를 점검하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삼복의 항아리를 풍성하게 채우며 또 다른 계절을 기다렸다.

술을 담그시던 날이면, 할머니는 새벽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목욕을 하셨고, 물을 끓여 항아리를 닦으셨다.

돌이켜보면, 그건 단순한 정결함이 아니라 할머니가 술을 대하는 존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고두밥과 누룩을 정성스레 버무렸다. 

그렇게 항아리에는 밑술이 앉혀졌다.

술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간을 들여 모셔지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빚던 것은 술이 아니라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을 견디는 법, 서두르지 않는 마음, 손으로 삶을 확인하는 방식.

그 모든 향기와 맛, 감촉과 체온 속에서 나는 비로소 배웠다.

삶에는 취하기 전에 먼저 숙성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따스한 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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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2025.12.23
창작정원 배에 실린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배에 실린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군사학 수업에서 처음 배운 '전술적 철수(Tactical Withdrawal)'라는 단어는, 수십 년이 지난 후 내 가슴을 울렸던 '인류애(Humanity)'라는 단어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나는 흥남철수작전을 그저 지도를 펼쳐놓고 병력과 물자를 계산하는 냉철한 '철수작전의 성공적 사례'로만 배웠다.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라는 작은 배가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 14,000명을 태웠다는 이야기는 전술 교본에는 맞지 않는 '특이한 결정'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 시절의 나는 전쟁과 군사작전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지극히 이성적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군사 교리가 시키는 차가운 임무와, 인류의 역사가 기억하는 뜨거운 용기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 배에 실린 이들이 느꼈을 생사의 공포와 절박한 희망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젊었고, 인생의 고단함과 슬픔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살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전이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니라, 인류애의 위대한 상징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나의 인식 밖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단지 '성공적인 철수율'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임관 후 소령 계급을 달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중, 워크숍 일정으로 거제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흥남철수작전을 처음 접했던 기억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거제도 앞바다를 보는 순간 그 배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드넓고 차가운 해수면은 그날의 수많은 목소리를 삼킨 채 고요했다.

 이제 나는 한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피난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군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놓고 떠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절박한 생존이었다. 내 가족이 저 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부모가 자식을 잃지 않으려 업고, 아내가 남편을 부르짖으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던 그 수많은 사연들이 한순간 머릿속을 덮쳤다.

 차가운 군사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뜨거운 의지가 해수면 아래에서 밀려왔다. 이론과 숫자 뒤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절규가 비로소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진짜 전쟁의 기록은 총과 포탄이 아닌, 헤어짐과 기다림, 그리고 절박함이 남긴 눈물로 쓰인다는 것을. 거제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전쟁의 가장 깊고 인간적인 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작전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지 많은 인원을 태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음을 피해 떠났고,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던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섯 명의 아기가 그 배 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전율했다. 바다 위, 좁디좁은 공간에서, 수천 명이 서 있는 틈 사이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배에 올랐지만, 배 위에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아이러니였다.

 미군들은 그 아기들에게 김치원, 투, 쓰리, 포, 파이브 같은 기발한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인간의 생명을 향한 본질적인 애정은 국경과 이념을 넘는 것이었다. 그 아기들은 지금 모두 성인이 되어 그날의 유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생애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함께 태어난 인연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가족처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존재는 그 작전이 단지 철수가 아닌, 인류애가 승리한 배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자꾸만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명백히 '군수물자 수송'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차가운 바다에 버리고 타국 사람들을 태운다는 결정은 일개 선장이 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책임이자 규율 위반이었다. 눈앞의 임무와 배후의 책임,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국 사람들의 절규 사이에서 그는 얼마나 긴 밤을 고뇌했을까.

 그가 짊어진 군수물자는 수많은 전력을 의미했지만, 라루 선장은 그 차가운 쇠붙이의 무게보다 14,000명의 생명이 지닌 뜨겁고 절박한 무게가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결단은 명령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그의 경력과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인류애라는 나침반을 따랐다.

 그는 군인이기 전에, 그리고 명령을 이행하는 선장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따른 것이다. 그의 배는 이후 '작은 배에 가장 많은 인원을 태운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지만, 나는 그 기록보다 더 위대한 것이 라루 선장의 용기와 신념, 즉 '사람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결정한 한 사람의 윤리적 잣대였다고 믿는다. 만약 그가 '규정대로'만 행동했다면, 흥남철수는 그저 기록 한 줄로만 남았을, 무수히 많은 작전 중 하나로 묻혔을 것이다.

 라루 선장의 결단은 '상관의 명령보다 양심의 명령을 더 두려워했다'는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라루 선장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옳음'의 목소리를 따른 것이다. 이 결단은 군인의 '칼'과 인간의 '십자가'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민들은 배에서 내려 각자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채 홀로 남았고, 누군가는 낯선 땅에서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이북에서 온 분들은 정말 억척스러워"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엔 단순한 성격으로만 들었지만, 이제 그것이 절박함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생존 근육'이었음을 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절약하며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대부분은 경제적으로도 자리 잡았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오른 이들이 많다. 척박한 땅에서도 기어이 뿌리를 내린 그들의 삶은, 절망의 끝에서 인간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들의 억척스러움은 곧 끈기와 성실함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후 한국 사회가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 이 땅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전쟁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아이러니한 시련 속에서 그들은 가장 강인한 삶의 의지를 단련해낸 것이다.

 이제 전쟁을 단순히 지도 위의 작전 선으로만 볼 수 없다. 그 선 너머에는 헤어진 가족,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 그리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숨 쉬고 있다. 흥남철수작전은 나에게 작전의 성공보다 더 큰 것을 가르쳐주었다. 바로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인간 연대의 힘'이다.

 나는 군인으로서 평화를 준비하며 동시에 이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지속되지만, 인간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흥남철수작전이 바로 그 증거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른 배가 아니었다. 두려움과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난 생존과 탄생,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한 꺾이지 않을 인류애라는 거대한 짐이 함께 실려 있었다.

 군인의 칼이 '전술적 철수'를 명했을 때,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인간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단했다. 그의 배는 전후 세대가 잊지 말아야 할 윤리적 나침반이다.

강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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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202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