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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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도시를 그림자만 남긴 채 태워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증발했고
강물에는 불탄 인간의 형상이 떠내려갔다.
그곳에는 일본인만 있지 않았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핵의 불길 속에 버려졌다.
소형차 크기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5만 명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착취당하던 조선인이었다.
일제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날의 태양보다 뜨거운 빛 속에서 산화했다.
해방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 외무상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다 말했다.
"내일부터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이틀 후, 소련군은 만주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동군 100만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탄 '팻 맨'이 두 번째로 떨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포고 다음 날,
소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없이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압박용 메시지였다."
미국은 스탈린을 굴복시킨,
막강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두 도시의 피해는 엄청났다.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일본 원폭 투하 후 피폭자에 대한
보도와 정보 유출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했다.
1945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관(GHQ/SCAP)은
일본 전역에 엄격한 언론 규제를 시행했다.
원폭 관련해서 특히 심했다.
원폭은 일시에 한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갖가지 형태로 부상을 당했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고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갔다.
병원과 같은 구호시설과 식수와 식량 수급 시스템이,
교통과 통신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완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폭 피해를 압축한 문장이 생겨났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
미국은 피폭 현장 취재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피폭 영상 자료는 압류하고 기밀로 분류했다
미군이 촬영한 뉴스릴이나
일본 영상팀이 촬영한 필름은 모두 압수했다.
필름 일부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피폭의 생물학적 피해는
일본 국민에게조차 철저히 차단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의학 연구 결과물까지도
발표가 금지되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도 검열 대상이었다.
검열 통제는 점령이 종료된 195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폭 투하의 참혹함을 감추고
전쟁을 끝낸 인류애적 무기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집중 보도토록 하면서
미국의 반인륜적인 원폭의
참혹한 파괴력을 철저히 감추었다.
미국식 합리주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8월 15일 미군 지휘부는 종전 후의
동북아 전략을 매듭짓고
소련에 공식 통고했다.
"한반도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다."
스탈린은 수락했다.
원자탄의 위력 앞에서,
그는 한반도 남쪽을 포기하기로 선택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통보했다.
항복을 선택하고 저항을 접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천황의 떨리는 육성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삼천만 동포가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겨운 "만세"를 외쳤다!
한반도 전역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해방이다!”
태극기를 꺼내 들었고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이미 각자의 진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에서 내려왔고 미군은
남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해방의 주인공은 승전한 제국들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분단의 출발점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이미 차가운 냉전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미국이 종전 이전부터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미국은 종전 수년전부터
동북아를 주목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본이 무너지면, 미국은
동북아 어디를 차지할 것인가”
그 질문 속에 한반도가 끼워 넣어졌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익숙한 땅이었다.
그것은 미 국익을 위해 점령해야 할 대상 이었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을 향해 가자
미국의 극비 문서 속에
일본, 만주,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점령대상으로 포함됐다
서울도, 개성도, 군산도 ‘점령 대상’이었다
1945년 8월 중순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 후
소련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소련은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켰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기세였고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해 평양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을
소련이 너무나 쉽게 수락한 것은,
미국이 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기가 꺾인 탓이었다.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에는
일본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모습은 세계 1,2 차 대전 때
연합군내에서도
점령지역 쟁탈전 등이
심각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만큼 미국 핵폭탄에
크게 주눅이 든 탓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4일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그들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이
인천항에 발을 들였다.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하지 중장은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조선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해방을 기다린 35년.
그 끝에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조선민중은 광복을 외쳤지만
강대국은 점령을 준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 중장과 T.C.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갔다.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닌
다른 외세의 상징, 성조기였다!
미군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해방 직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도
그 어떤 정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일제 총독부의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알았다는 이유였다.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원래의 권좌로 복귀시켰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점령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버렸다.
서울의 미군정에는 한국어 통역군인이 전무해서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워싱턴 정부는 서울의 미군정과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과 남한에 동일한 군정원칙이 적용된다.
친미파를 양산하라.
미국익을 위해 철저히 복종할
자들을 군과 경찰로 등용하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만들어라.”
미국 정부는 동북아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을 방패로 삼으려 했고
군정사령관도 본국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할
야전군 사령관들을 기용했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장군들은 배제한 채
동북아를 미국 진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맹종할
군인들을 앉힌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된 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전국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원하지 않는다."
1946~1947년, 38도선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남과 북의 균열은 더 깊어졌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중심이 된 통일 전선을 구축했다.
남쪽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익 세력이 결집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던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약속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념대립의 대 혼돈 속에 한반도는
좌우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탁통치 합의가 불발되고 1947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반발했다.
"38도선 전체에서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고 맞섰다.
미국의 단독 총선거 강행에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지지하면서
남과 북은 분단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 다른 이념 속에 불신이 쌓였다
하나는 자유를 말했고
하나는 해방을 말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같은 언어로 욕하고 같은 땅에서 죽어갔다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저지라는
거대한 성벽만을 쌓아 올렸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전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제주 4.3항쟁이 일어났다.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외침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름다운 탐라의 섬, 한라산의 붉은 흙은
미군과 조선인 군경 토벌대의 칼날 아래 숨져간
3만여 무고한 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비공식 기록은 그보다 훨씬 많다.
제주의 피는 단독정부의 초석 아래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조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38도선 이남에서만 펄럭였다.
북쪽에서는 한 달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서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은 산천을 노래하던 민족은
두 개의 체제와 두 개의 군대와
두 개의 미래로 나뉘었다.
드리는 말씀
연재하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