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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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무조건 항복.”
태평양의 포성이 멎자마자,
승리의 북소리 뒤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서냉전은
총과 탱크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보와 공작,
신문 기사와 침묵 속에서도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총성이 아니라 이념의 칼날로,
지구촌의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공포로
동북아를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한 군사전략을 강행한다.
패배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동북아의 성채로 만들고,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막는 전진기지로 삼겠다.
소련은 유럽에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트루먼은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 5만 명을 중국 북부로 보내라.
7함대를 황해로 진입시켜라.
장개석이 일본군 점령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라.”
트루먼은 표면적 이유로 일본인·한국인 60만 명의
송환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 군을 앞세워
모택동 공산 세력을 저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중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격화됐다.
트루먼은 일본과 한반도 점령통치를 지시하며 외쳤다.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막아라.
사회주의가 번지지 않게 하라.”
맥아더는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사령관이 되어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점령 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을 동북아 대소 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글라스와 파이프가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지휘 속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영국도, 소련도, 중국도
자문만 할 수 있었다.
맥아더가 장악한 SCAP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5,700명이 체포, 4,300명이 기소됐다.
98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92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맥아더는 진술서를 변조했다.
천왕이 전쟁범죄와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이는 훗날 문서로 밝혀졌다.
왜였는가.
“천왕을 기소하면 일본인들이 반발한다.
반발이 커지면 소령과 공산주의가 파고든다.
천왕 한 명의 죄를 덮는 것이
동북아 전략에 더 유리하다.”
그것이 미국이 만든 냉전의 계산법이었다.
서울의 하지도 남한을 대소 초소로 만들라는
본국 정부 지시를
맥아더를 통해 전달받았다.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소련 견제'라는 대일본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집행된다.
1945년 10월 중국에서 작전하던 미군은
모택동의 공산군과 수차례 무력 충돌한다.
미국은 장개석·모택동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맥아더를 앞잡이 삼아 일본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왕을 감싸고, 전범 재판 지휘하며,
일제에 복무하던 관리들을 미군정에 참여시킨다.
미국은 반인륜적인 범죄 집단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부대원 전원 면책해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다.
미국에 의해 인간 백정인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은
살인마에서 정보 제공자로 둔갑해
전후 유력인사의 삶을 누렸다.
인간 악마들과 거래한 미국의 민낯이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인간 괴물들을 사면하고
선혈이 낭자한 데이터를 챙겼다.
인류에 대한 범죄 기록이
미국의 군사 자산이 됐다.
나치 로켓 기술자를 풀어준 것처럼.
악마와의 거래는 냉전의 규범이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핵심 의료진은
'인체실험 데이터 및 생화학 무기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책 특권을 받았다.
미국은 이 귀중한(?) 데이터를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이 주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다.
생화학 무기 개발과
인간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기 위해
최소 수천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대상자들을
인간이 아닌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피해자들은 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정계 인사, 중국인 항일군인 및 민간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이었다.
실험 대상이 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산부, 영유아, 소년 소녀도 예외 없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다
731부대 출신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학장, 유명 제약회사 임원,
국립보건원 간부 등 일본 의학계의
주류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인간을 통나무로 여기며 학살했던 이들이 전후
' 의학 박사'이자 '사회 지도층'으로 대접받았다.
731부대의 만행은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과학과 의학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민중은 해방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질서를 먼저 말했다.
독립보다 반공,
자치보다 통제,
공작을 통한 대중조작
그것이 점령의 언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협상 테이블 위에 한반도의 운명이 놓였다.
미국이 제안했다. 10년 신탁통치.
소련이 반박했다. 즉시 독립.
타협안이 나왔다. 5년 신탁통치.
진실은 그랬다.
그런데 같은 날 서울의 한 통신사가
긴급뉴스를 신문사에 전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바뀐 뉴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민중일보, 신조선보가 실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처럼 인쇄됐다.
남한이 들끓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니.
소련이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니.”
소련의 타스통신이 반박했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국무부가 1942년부터 입안했다."
뉴욕타임즈 1945년 12월 28일자는
진실을 정확히 보도했다.
그러나 서울의 신문들은 계속 가짜뉴스를 실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의 검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한 내 반소·반탁 감정이 극에 달해
좌우 대립 격화된다.
거리에서 반탁운동이 터졌다.
반소 감정이 폭발했다.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한 언론을 검열하던 미군정은
이 가짜뉴스를 왜 방치했는가.
맥아더 밑의 정보책임자 윌러비의 언론검열과
보도지침에 충실히 따랐던 남한 언론.
그 언론은 미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으로
남한의 반소 감정을 부풀리기 위해 동원됐다.
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조작 목적이었다.
거짓 보도는 남한의 하늘에 반소의 불길을 퍼뜨렸다.
좌와 우는 갈라졌고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이후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라났다.
1946년 ~ 1947년 냉전의 심화와 미·소의 대립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열기도 뜨거워진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할
최전방 전진기지 만들 작업에 속도를 낸다.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미국의 장개석 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시행된다.
60개 사단 무장이 가능한 4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장개석 군이 대공세를 펼친다.
위기에 몰린 모택동은 미국이 내전을 부추겨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1946년 3월 ~ 5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본회의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논의를 둘러싼 미·소의 입장 차이로
진전 없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남한 내 독립 요구 시위와
총파업을 좌파 공작이라며
좌파 탄압과 언론 통제를 강행한다.
하지 중장은 좌파 신문을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로 몰아
언론사를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1947년 5월 ~ 8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8월 12일 최종 결렬된다.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상정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소련은 반대하며 미소 동시 철군과
남북 대표 참여를 주장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치열한 논쟁
소련의 반대결의안은 부결되고
미국의 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
미국 안을 40대 0(기권 6)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
모스크바 5개년 신탁통치 안은 묵살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발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불참
“조선인 대표 없는 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다”
1948년 1월 위원단 서울에서 임무 착수
북한 지역에 대해 소련군정이 출입을 거부하고
위원단은 활동을 계속 했다.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 과업을 계속하라”
그렇게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옆 중국 대륙에서
소련 저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고
수억 달러를 추가지원 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전세가 뒤집히고 있었다.
1948년 모택동의 군대는
만주를 장악했고
국민당의 무기와 도시를 차례로 삼켰다.
부패한 국민당은 무너졌고
미국은 장개석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자
미국 외교관들은 철수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 지역' 총선을 결정했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자,
유엔 소총회는 미국의 안에 따라 '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1948년 5월 ~ 9월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1948년 9월 모택동 군이
만주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개석 군의 탄약을 무더기로 노획했다.
장개석 군 내부의 자멸적인 부정부패를 목격한
미국은 추가 지원 거부를 검토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4월 ~ 5월 공산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
미국은 공관원을 철수시키면서도 대사에게
대만으로 도망치는 장개석을 따르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민족통합 주장하면서 5·10 총선거 거부한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쏜 범인 안두희는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다음해 6.25 전행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육군 포병 장교로 원대 복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동경에 있던
맥아더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지휘를 받았다.
G-2는 윌러비가 대장으로
극동 전역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군사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971 방첩대는
주한 CIC의 핵심이었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은 CIC와 무관한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영원한 분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1947년 말 유엔(UN)이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선언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등
민족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남한 지역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석 달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선거 거부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통일 운동과 반이승만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엄청 많았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선생 등을 비롯해
이분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간 간부급 및
청년 단체 지도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됐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패퇴했으며
남한 역시 부정부패가 자심해
희망이 없다는 판단한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 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국민당 수뇌부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 보낸 원조 물자와 자금이
국민당 고위 관리들의
주머니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이 준 무기가 모택동군에게
밀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극도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우리가 장개석에게 지원한 돈 중 수억 달러가
뉴욕의 부동산 투기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보고,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개석 정권을 포기했다.
당시 남한 상황도 타이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막대한 원조가 제공되었으나,
정권 비호 세력에게 불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 직전인 1950년 1월초
이승만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중단 하겠다"
'애치슨 라인' 선포 소식을
스탈린, 중국, 김일성이 들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선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는다.”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오판이었는가.
아니면 유도였는가.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해,
산천이 핏물로 물들고 포화가 가득할 때,
패전국 일본은 축배를 들었다.
일본은 미군의 거대한 병참기지가 되어
막대한 특수를 누리고 경제를 재건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나면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데
맥아더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하려 했고
그 곁에서 정보책임자 윌러비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겨울 산맥 너머에서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장진호의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미군병사들이 얼어 죽자
맥아더는 만주를 핵공격하자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를 파면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쉰 두 나라가 협상대표로 모였건만,
중공과 대만,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사실상 혼자 설계한 조약으로
일본에게 파격적 특혜를 줬다.
전쟁 배상 의무를 최소화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 근거를 줬다.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빠졌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씨앗이
그 빠진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성노예, 강제징용 등 역사의 상처도 방치됐다.
1905년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그 밀약의 20세기 판이었다.
미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극동전략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일본을 대소 전초기지로 삼는
전후 동북아 대립 구도를 완성했다.
미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 받은 한반도를
강화조약 배상 대상에서 제외할 때
이승만은
그가 당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한다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낸 것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조약이
미국의 극동 전략 수립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침묵한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몰빵에 몰두한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은 정전 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동시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치외법권적 특권인 ‘권리’로
인정해주면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유엔사 후방기지 협정으로
동북아 전략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최종 보루로 만드는 작업을 마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전범 처벌을 흐지부지하고,
한국에서 친일세력을 복권시켰으며,
막후 정보 공작(CIC, CIA)을 통해
한국과 일본 내의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척결했다.
미국 정보기구 G-2 부장인 윌러비 소장은
맥아더의 눈이자 귀이자 손이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였다.
그는 악명 높은 특고경찰을 중용했다.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탄압하던 비밀경찰이었고
독립 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자들이었다.
윌러비는 그들을 비밀리에 공직에 복직시켰다.
낡은 술을 새 병에 담았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을 잡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휘하에서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는 남한에서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세력이
권력기구로 복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52년 미국의 일본 미군정 종식을 앞두고
일본 극우 세력이
미군 정보기구 G-2의 묵인·개입 하에
일본의 재무장을 노린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거점으로 묶어두기 위해
자민당 정권과 온건 야당 분열 공작에
수백만 달러의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의 예외뿐,
자민당의 집권, 미국의 그림자 아래 이어졌다.
CIA가 만든 정당, 미국이 유지한 정권.
일본 민주주의의 이면이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정책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소련과 사회주의, 동북아에서 저지하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았으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경감되고 미국 기지가 되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미군은 오키나와에 남았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3각 군사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방기지이고
유엔사와 그 후방기지가 둘을 연결한다.
미국은 동북아를 하나의 군사작전 공간으로 재편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워싱턴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소련을 막는다는
하나의 명분 아래 만들어졌다.
진짜 목적은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거였다.
동북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들어
한반도를 그 패권의 최전방기지로 삼는다.
그 설계는 1945년 이후 7년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계 위에서 한반도가 살고 있다.
2026년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으로
중국과 인도, 태평양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3각 군사협력체제가 더욱 강고해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자주와
전작권 환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와
어떤 관련 속에 이뤄지는지
국회, 언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70 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미맹에 모두 취해 있는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