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4
72
0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칠십육 년 전 그 새벽,
포성이 강산을 뒤흔들고
한반도의 산과 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전쟁은 멈추었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총성이 침묵한 자리에는 철조망과 지뢰밭이 뿌리내렸고,
휴전선은 세월보다 길게 민족의 가슴을 갈라 놓았다.
남과 북은 서로를 경계한 채 군사분계선의 긴 침묵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묻는다.
언젠가 철조망이 걷히고,끊어진 철길이 다시 이어지며,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의 노래가
울려 퍼질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칠십육 년,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평화를 꿈꾸는 마음 또한끝나지 않았다.
분단의 세월보다 더 긴 희망이
오늘도 이 땅의 새벽을 밝히며,
우리는 다시 내일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하늘에는 해방과 독립의 깃발 대신
두 강대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북위 삼십팔도선,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진 산맥의 핏줄 위에
그어진 경계는 형제를 적으로 만들고
마을의 논두렁을 세계전쟁의
최전선 예비지역으로 바꿨다.
미국은 유엔의 이름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외침은
총성과 화염 속에 묻혀 갔다.
친일의 잔재는 새 주인을 맞았다.
워싱턴의 지도 위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대소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일본은 태평양의 성채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모택동의 붉은 군대가 강물처럼 흘러넘쳐
장개석의 군대는 무너져 갔다.
남북에 만들어진 두 개의 정부는
하나가 되자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삼팔선의 밤은 자꾸 뜨거워지고 있었다.
남북한 정부 수립 이후
공존이나 평화적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양측 지도자가 모두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를 자처하며
무력 또는 체제 우위를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동시에 냉전이라는 국제질서가
타협의 공간을 크게 제한했다.
두 정부의 상대에 대한 적대적 태도 속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은
안개 낀 능선과 개울가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수색대의 총성이 터지면서
개성과 춘천, 옹진의 들판에는
젊은 병사들의 피가 스며들었다.
1949년 6개월 동안 사백 번 넘는
남북 군사적 충돌.
총알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한군은 삼팔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세우려 했고
북한군은 포화로 응답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다.
“우리는 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정부에
중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을 자극하는
불길이 한반도에서 시작돼
세계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 클럽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연단에 섰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극동지역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헌장에 입각해
전체 문명세계와 함께 싸울 것이다."
애치슨은 의회에서 말했다.
"남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기는 어렵다.
미국도 그런 침략을 군사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은
순식간에 전선을 무너뜨렸고,
서울은 곧 불안과 피난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한은 지킬 수 없다"고 했던
미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북한 공격을 방치하면 일본이 위험하고,
동북아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소령과 중국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이 즉각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고
결의안 82호(25일), 83호(27일)에 이어
84호(7월 7일)가 통과되었다.
82호와 83호는 북한의 적대행위 중단과
회원국들의 한국 지원을 촉구했고,
84호는 미국의 연합지휘 아래
군사적 지원 체계를 열어주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반도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았다면
유엔군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의 계산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안보리 회의장에 거부권을 쥔
소련이 자리를 비운 것은
세계사의 미스터리다.
스탈린의 계산에 의한 불참이었다고
역사가들이 추측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소모전을 벌이면
소련이 어부지리를 얻고 동유럽을 장악할 수 있다는....’
소련의 빈자리가 역사를 바꿨다.
소련이 안보리를 비운 사이
결의안은 통과되었고 유엔군이 탄생했다.
21개국이 참여한 병력의 90%는 미군이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유엔군사령부'가 탄생했다.
유엔의 깃발을 들고 있으나,
미국 정부의 명령만을 받는 백악관의 군대,
그러나 미군의 총구 위에
유엔의 푸른 깃발이 휘날렸다.
유엔군은 유엔과 무관한 미 정부 부대였다.
유엔사는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는
미국이 지휘하는 다국적군이었다.
워싱턴은 유엔의 깃발을 들고 한반도로 향했다.
맥아더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으며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세계사의 역설이 시작된다.
유엔의 깃발아래 출전한 전쟁,
그러나 실질적 지휘는 미국의 손에 있는 전쟁.
깃발은 국제였고,
명령은 미국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유엔 헌장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군대의 지휘는 한 국가, 미국의 손안에서 행해졌다.
개전 초기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누가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했느냐가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의 하나다.
전쟁 직전 남북한은 자체적으로
전차, 전투기, 대포와 같은
무기를 직접 생산할 수 없었고
외부의 지원, 제공 등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미국은 남한이 북진 통일을 시도할 가능성을 우려해
전차, 중포, 전투기 같은
공격형 무기 제공에 소극적이었고
남한 군대를 주로 내부 치안 유지와
방어용 군대로 육성했다.
반면 소련은 북한군을 현대적인 정규군으로 육성했고,
전차·항공기·포병을 대규모 지원했다.
소련은 해방 직후 북한의 군사조직 육성 과정에서
관동군과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일부 제공했다.
6·25 전쟁 직전 조선인민군의 주력 무기는
소련이 직접 공급한 최신 소련제 무기였다.
북한군의 전차부대와 기계화 부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전차나 대전차포가 거의 없었고
제공권은 사실상 북한이 장악했다.
병력 수 자체는 북한이 다소 많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소련과 중국의 동의 아래
전쟁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사가들은 말한다.
김일성은 6·25 전쟁 수 개 월 전인
3~5월 사이 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지도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남한에서 전국적 규모의 혁명이나
봉기가 일어나
수주 또는 수개월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장기화되고
혁명이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엔안보리에서 결의안
82호와 83호가 통과되는 사이
서울이 위험해지자 27일 밤 정부 당국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정부는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니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일자리를 지키라."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 새벽 2시
서울을 탈출한 뒤였다.
정부만 도망가고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강다리가 끊어졌다.
피란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한국군이 다리를 폭파했다.
아이들의 울음이 강물에 떨어졌고
부서진 철교 아래로
사람들의 절규가 가라앉았다.
정부 수뇌부가 먼저 남하했고,
이어 한강교가 폭파되어
많은 시민과 국군이 고립되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미군사고문단도
이승만과의 약속을 믿었다.
폭발 시점을 사전에 협의하기로 했던 약속을.
그 약속이 아무 통고 없이 깨지면서
그들도 서울을 탈출하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퇴각하는 군경은
사상 전향을 서약했던
보도연맹원 등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터진 지 이틀째 되는 날
이승만이 명령을 내렸다.
“보도연맹원과 남로당원들을 처형하라.”
28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첫 처형이 집행됐다.
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분자들을
관리하던 조직으로
그 구성원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가입했던
일반 농민과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경의 총구 앞에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낙엽처럼 쓰러져 사법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전쟁 후 벌어진 수많은 학살은
전쟁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을 분류해 죽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법의 이름은 있었으나
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질서는 있었으나
정의는 없었다.
전쟁은 단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니라
이념이 인간을 죽이는
거대한 학살로 변해갔다
전쟁 직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의심하고 제거했다.
그것은 외부의 전쟁과 내부의 전쟁이
한 몸처럼 겹쳐진 참극이었다.
9월의 인천, 아침 안개를 뚫고
유엔군 상륙함이 진격할 때
일본인 항해사들이 조류를 읽고
배의 키를 잡아 안내했다.
폐허가 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 속에서
다시 살아나 병참기지가 됐다.
전후 복구의 기회를 잡았다.
패전국이 재건국이 됐다.
침략한 자가 회복하고
침략당한 자가 다시 전장이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북한군의 보급로가 끊기고 퇴각이 시작됐다.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물러갔다.
맥아더는 압록강까지 올라가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국경선 너머에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버티고 있었다.
중국군이었다.
겨울 산맥을 넘어온 중공군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고
유엔군은 남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서울은 또 한 번 함락되었다.
산과 들에는 얼어붙은 시신들이 누웠고
폭격기는 북녘 하늘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맥아더는 중국 만주 폭격과
핵무기 사용까지 제안했으나
미 대통령은 제3차 대전을 두려워 거부했다.
제한전쟁이 원칙이었다.
맥아더는 고집을 피우다 경질됐다.
.그러나 미국의 공격은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북녘 산하에 투하됐다.
도시, 마을, 사람이 사라졌다.
2년 동안의 소모전 끝에 정전협정이 시작됐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반대하며 외쳤다.
“무력으로 통일하자. 전쟁을 계속하자.”
그는 정전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국이 분노했고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신을 보냈다.
"한국이 휴전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다."
미국 행정부가 에버레디 작전이라는
비밀계획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북진 명령을 내리거나
돌출행동을 할 경우
이승만을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동맹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이 미국이 말하는 동맹의 실체였다.
결국 타협이 이뤄졌다.
이승만이 조건을 내걸었다.
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무장할 군사적 지원 등이었다.
미국이 받아들였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됐다.
이승만은 지독한 벼랑 끝 전술 끝에
상호방위조약과 군사 지원을 얻어냈으나,
이승만이 국치스런 조약의 대가로 미국에
군사적 주권을 퍼준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이 맘먹은 대로 군사력을
한국에 배치할 치외법권적 특권을 인정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 소련을 향해
미 본토 수호를 위한 군사전략 SIOP를
비밀리에 수행토록 만들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지휘할
작전통제권도 미국의 손에 저당 잡혔다.
일본이 물러간 뒤 미국을
실질적 점령군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 그 후로도 권력을 탐하면서 민주주의 파괴했다.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죄목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단두대에 세운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승만은 1959년 10월에도 미국에게 말했다.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다."
사사오입과 부정선거로 얼룩진
노독재자의 말로는
결국 4·19 혁명의 거대한 함성 속에
하야로 끝을 맺었다.
한국전쟁은 승자와 패자도 가리지 못하고
끝나지도 않은 채 멈추었다.
1953년 휴전이 되었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고,
정전선은 국경이 아니었으며,
분단은 잠시 멈춘 전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총성만 멎었을 뿐
삼팔선은 철조망이 되었고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남북 간 분단의 벽이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전쟁 피해는 엄청났다.
3년 3개월간 지속된 전쟁에 21개국이 참전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략 6백여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국가마다 집계가 서로 달라 혼란스런 가운데
남한 230 만여 명, 북한 292 만여 명의
인적 손실이 추정됐다.
또한 1천 만 명의 결핵환자,
1천 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인적 피해는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보다 피해가 더 컸다.
모든 도회지는 거의 파괴되었고
양측의 학살과 고문 기아로 인한
사망 등이 속출했다.
참전국 군대의 인적 손실은
정확히 집계된 적이 없지만
한국군 75만 명 사상,
북한군 50만 명 사상,
유엔군 18만 명 사상,
중공군 95만 명 사상으로 추정된다.
남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주요시설 파괴는 52%에 달했다.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으로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
남북한 전 지역에서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포성이 멈춘 뒤에도 한반도 땅의 사람들은
무장한 평화를 살았고,
무장한 침묵 속에서
세대를 이어 불안과 증오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유엔사는 오늘날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름은 유엔이지만
실질은 미국 주도라는 점,
그리고 해체의 열쇠조차
유엔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결단에
걸려 있다는 점은
국제법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의 이름을 쓰고
유엔의 깃발을 드는 것에 대해
1975년 유엔총회가 결의했다.
“유엔사를 해체하라.”
키신저가 약속했다.
“1976년 1월 1일부터 해체하겠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1994년 유엔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가
북한 외무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유엔안보리는 연합군을
하부조직으로 결성하지 않고
단지 그 지휘권을 미국이 행사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해체는 유엔에 있지 않고
미국 정부의 권한 문제일 뿐이다."
코피 아난 총장이 거듭 확인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이다.”
디칼로 유엔사무부총장도
2018년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2019년 5월 캠프 험프리의 미군기지에서
유엔사 부사령관 웨인 에어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단지 유엔사는 유엔 깃발을 사용하고
매년 미국 정부를 통해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면서도 유엔이 아닌
해괴한 미국의 군사조직은
여전히 한국에서 버티고 있다.
무장지대 DMZ의 통제권과 관할권은
여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지금도 유엔사 깃발은
평택의 기지와 판문점에서
비무장지대에서 펄럭이며
소리 없이 말한다.
“이것은 유엔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유엔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유엔의 군대는 아니라는 논란 속에서
그 조직은 지금도
비무장지대와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있다.
유엔사 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국 정부를 향해
떵떵 큰소리를 치며 위세를 부린다.
그 모습은 점령군 대장과 너무 닮아 있다.
미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이
분단된 한반도를
자신들의 최상의 적정선으로 여기는 오늘날,
유엔사의 깃발을 다시 키워
미군의 군사적 특권을 유지, 확대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대통령과 장군들이 사라졌어도
한반도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그날 삼팔선에서 시작된 총성은
형제의 가슴 속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혁명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이름 없는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울부짖었다.
폭격 속에서 아이를 업고 달리던 어머니,
끊어진 다리 앞에서 강물을 바라보던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노모의 눈물이
이 전쟁의 진짜 역사였다.
강대국들은 전략을 말했고
정치인들은 통일을 외쳤지만
폐허 속 민중은 평화를 원했다.
오늘도 비무장지대의 철책 위로
바람은 지나간다.
그 바람은 묻는다.
누가 이 땅을 둘로 갈랐는가.
누가 형제를 적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전쟁으로 권력을 얻었고
누가 이름 없이 죽어갔는가.
그리고 또 묻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과연 누가 끝낼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