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6월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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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문장 하나가 여자를 멈추게 했다.
그제야 그는 느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사소하며, 하찮은지.
8개월 동안 톨스토이와 체호프를 옮기는 작업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출판사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 끝맺음의 순간에야 실감되었다. 재검토를 마쳤지만, 이 한 문장은 여전히 미지근한 여운을 남겼다.
번역은 단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온도를 옮기는 일이라고 그녀는 늘 생각해왔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인데도 제법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봄은 시작되었고, 매화가 지며 집 앞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바람에 떨어진 작은 꽃잎들을 밟으며 복이를 차 뒷좌석에 태웠다. 시트에 직접 털이 닿을까, 큰 수건도 깔았다.
시동을 거는 순간, 복이가 낮게 끙끙거렸다. 여자가 복이를 돌아보자, 복이는 불편한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끙끙거림이 여전히 이어지자, 여자의 기억은 처음 할머니가 여자가 사는 윗층 집에 들어오던 날로 흘러갔다.
“나… 여기서 죽어도 되능겨?”
2층 마당 위 작은 방 앞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햇살에 반쯤 바랜 초록 페인트가 남아 있었다. 옥상처럼 트인 곳이었다. 여자는 예전에, 지금은 고인이 된 시어머니를 따라 빨래를 널러 몇 번 올라온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부동산 아저씨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머니, 여기 좋으네! 마당도 있고. 어디 가도 이런 거 못 구해요.”
흰머리가 군데군데 난 부동산 아저씨가 능숙하게 말을 보탰다. 이제 선택만 남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할머니를 바라봤다. 그러나 할머니는 되려 여자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희끗한 숏컷 머리와 얇게 자리한 주름, 더덕껍질처럼 가늘고 거친 손.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여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느긋하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조급함도, 초조함도 없었다. 여자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히 서 있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반 년째 비어 있던 옥탑방이었다. 남편과 여자는 편하게 그곳을 ‘옥탑방’이라 불렀다.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오래된 빨간 벽돌 2층 집에서 그렇게 박말순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이사 첫날, 할머니가 빈대떡 두 장이 든 접시를 내밀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을 뻗었지만, 접시가 완전히 건너오지 않도록 잠깐 망설였다. 낯선 친절이 집 안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바쁘다는 듯 접시를 건넨 손을 떼고 팔을 휘적이며 돌아섰다.
할머니는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좁고 가파른 계단 위를 걸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시멘트가 둔탁하게 울렸고, 그 모습이 시어머니의 잔상과 겹쳐 잠시 마음이 아련해졌다. 할머니가 떠난 자리에 현관문을 닫고 부엌으로 가 젓가락 한 세트를 뽑아 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물을 마시다 말고 말했다.
“짐 나르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어. 월세는 알아서 해.”
그가 물컵을 들고 식탁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문득 월세가 들어오는 통장이 떠올랐다. 적금 하나를 더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편이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약병이 한가득이야. 어디가 안 좋으신가 봐.”
여자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결정은 이미 끝나 있었다. 빈대떡 접시를 식탁 위에 놓고, 한 귀퉁이를 잘라 입에 가져갔다.
“빈대떡은 맛있네.”
“아니, 지난 주말에 상우 형님이랑 간 전집보다, 이게 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날 집 공사였잖아.”
지난 주말, 남편은 거의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하는 사람들 내가 다 뒤치닥거리 했어.”
그는 빈대떡을 집으려다 말고, 물잔을 찾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땐… 회사가 좀 술렁여서.”
접시를 앞으로 밀며 피식 웃었다.
‘결국 다 핑계였네.’
깜박 잊고 있다가 여자는 접시도 돌려줄 겸 사과 몇 알을 들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마당에서는 털이 복슬한 강아지가 이리저리 뛰며 신이 난 듯 놀고 있었다. 여자는 강아지 알레르기 때문에 잠시 숨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어제 말했쥬? 길에서 혼자 떠돌다 나만 따라오드라고. ‘니가 복이다’ 해서 복이라 혔슈.”
복이를 다루는 할머니의 능숙한 손길을 잠시 바라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품에서 느꼈던 안도감이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엄마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좋은 쪽으로.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보호소…라꼬 하는 곳도 이제 좀 좋아졌다 허드라그유. 우선 데꾸 왔슈.”
“여러 마리를 좁은 곳에 가두는 철장 보호소도 있어서, 아마 잘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여자는 순간,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한 건가 싶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얼른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지만, 마음 한켠에는 따뜻함과 동시에 불필요하게 엮이고 싶지 않은 거리감이 함께 남았다. 여자는 그 미묘한 감정을 달래듯 천천히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되자, 여자는 끓여 놓은 감자국과 친정엄마 고 여사가 놓고 간 반찬을 밥과 함께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남편 맞은편에 앉아 낮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복이란 강아지… 오늘 봤어. 털 많은 하얀 개. 보호소에 잘 맡길까 몰라.”
남편은 젓가락을 들었다 놓으며 오른손 검지로 휴대폰 화면을 아래에서 위로 넘겼다.
“알아서 하시겠지.”
남편에게 퍼준 뜨거운 감자국 김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마주 앉아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침 틀어놓은 TV에서는 출산율이 점점 줄어든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
“이제 당신도… 애 생각은 없는 거지?”
남편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여자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차라리 잘됐지.”
젓가락이 그릇에 닿으며 쨍, 작은 소리를 냈다. 남편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밥만 한가득 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은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국은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후덥지근해졌다. 장마가 시작되자, 옥탑방만은 잠기지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걸로 할머니가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
종종 안부 문자를 보내 자신을 확인해 달라던 할머니에게, 오늘도 메시지를 남겼다.
〔할머니, 여름 잘 나고 계신가요? 비가 많이 오는데 조심하세요.〕
〔나 잘 있슈. 근디 복이는 시방 내가 계속 키워도 되겄슈?〕
갑작스런 할머니의 질문에 여자는 잠시 멈춰 생각했다. 죽어도 되냐고 묻던 할머니가, 이제는 복이가 여기 살아도 되는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규칙과 책임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여자는 바로 답장을 쓰지 않았다.
후두둑, 후두루루둑,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여자가 창문을 걸어 잠그자 남편이 말했다.
“옥탑방. 복이 키워도 된다고 했어.”
여자의 손이 순간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건 규칙이었잖아.”
남편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싫으면 당신이 가서 말해.”
잠시 끊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저런 부탁 거절하는 게 더 어렵더라.”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나 알레르기 있다는 거 누누이 말했는데 몰라?”
“그리고 왜 당신은 늘 남의 부탁은 쉽게 받아? 뒷처리는 하지도 못하면서.”
마음에 늘 쌓아왔던 말이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숨이 막힐 듯 팽팽한 가운데, 남자가 조용하고도 차갑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애 생기면, 그것도 불필요해?”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
말하고 나자 순간 가슴이 터질 듯했다. 침묵 속 빗소리만 세졌다. 여자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고, 방금 잠근 창문을 다시 열었다. 세찬 바람에 여닫이 창문이 확 열리며 빗물이 마루 위로 쏟아졌다.
“미쳤어?”
남편이 여자를 밀치고 창문을 닫았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이번에는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자, 바람과 빗물이 얼굴을 후려쳤다. 차갑고 아팠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바깥으로 한 발 내딛자, 맨발이 젖은 땅에 파묻혔다. 그 순간, 복이가 마당을 뛰던 모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고 숨을 내쉰 것이. 여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었다. 뛰면서 소매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을 하염없이 닦아냈다. 뒤돌아보니, 남편은 창문 안에 갇힌 채 서 있었다. 눈이 커진 얼굴로. 웃음이 터졌다. 미친 듯이. 그의 얼굴이 더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천둥 번개 속, 여자의 웃음은 먼 메아리처럼 사라졌다.
첨벙. 물이 고인 곳에 발을 디디자, 아스팔트의 거친 감각이 그대로 올라왔다. 차갑고 선명했다. 나쁘지 않았다. 흠뻑 젖은 티셔츠와 짧은 바지는 몸에 들러붙어 축 늘어져 있었다. 마치 비 맞은 짐승처럼. 그 모습이 우스워, 여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볍게, 그러나 한참을 멈추지 못하고.
그날 밤 남편은 샤워를 하고 나와 말없이 이불을 들쳐 누웠다. 여자는 먼저 불을 끄고 등을 돌렸다. 잠시 창밖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꾸루룽, 울림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한동안 빗소리만 이어졌다.
잠잠해질 즈음, 딸깍. 유리 사이드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는 소리만 들렸다.
남편과는 며칠째 냉전 상태였다. 복이를 허락한 이후 시작된 침묵이었다. 책상에 앉아 전날 번역해 둔 문장을 다시 읽었다. 단어는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다른 문장처럼 보였다.
사람의 마음이 먼저 변하면 문장도 그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녹두 빈대떡 한 접시가 책상 위에 놓였다. 남편이었다. 컴퓨터 화면을 흘끗 보며 말했다.
“당신이 이번 프로젝트 따낼 줄 알았어.”
여자는 가만히 있다가 접시를 자기와 먼 쪽으로 밀어냈다. 남편은 말없이 간장 종지와 물 한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잠시 머뭇거리던 손을 거둬들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남편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부쳐 보낸 빈대떡이었다. 남편은 그저 옥탑방에서 아래층으로 옮겼을 뿐. 먹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남편이 방을 나간 뒷모습을 보고, 여자는 손에 있던 펜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젓가락으로 방금 부쳐온 전 가장자리를 가르니 바삭하게 부서졌다. 기름 냄새가 아직 따뜻하게 퍼졌다.
“할머니, 안에 계세요? 접시 가져왔어요.”
문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느릿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자는 조심스레 접시를 내밀었다.
“요즘은 짜장면도 다 일회용 쓰잖아요.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그러시는 거죠?”
할머니가 배시시 웃었다. 주름 사이로 잠시 얼굴이 환해졌다. 여자는 그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마당 옆 텃밭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량했던 곳에 채소들이 푸르게 자라 있었다. 문득 체호프 단편 속 들판이 떠올랐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며 말했다.
“왔으니께 좀 따먹어유.”
할머니가 낡은 삼선 슬리퍼를 끌고 텃밭으로 휘적거리며 갔다. 허리를 굽혀 상추와 고추를 따더니 여자의 품에 안겼다. 그걸 받아들고 여자가 작게 웃었다.
“빈대떡도 진짜 맛있었어요.”
여자가 말하자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간 녹두에 이거저거 처넣으면 되쥬. 전쟁 나고 가난할 적도 아닌디 지금 맛있는 게 얼매나 많어유. 하긴… 그땐 엄니가 그거 한 장 부치면, 동네 애들이 냄새 맡고 문 앞에 줄을 섰어유.”
할머니는 잠깐 옛날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말을 이어갔다.
“책상에 곧잘 붙어앉아 있더만. 오르락내리락 하믄서 창문으로 보이던디, 예쁜 색시.”
‘색시’는 아니었는데, 정정하려다 말았다. 이미 결혼한 지 6년째였다.
“아, 저는 번역 일을 해요. 체호프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어요.”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가 체혔다그려! 그런 걸 우리말로 옮긴디?”
두 사람은 멋쩍게 웃었다. 복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 편이 마음이 놓였다.
매주 일요일 이른 아침이면 옥탑방에서 분주한 기척이 들렸다. 단정히 차려입은 할머니가 난간을 꼭 붙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움직임은 느렸고, 중간중간 한숨과 투덜거림이 섞였다.
“아휴, 이 계단… 내 다리가 아주 그냥.”
한 발 한 발 계단을 디디면서도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 있었다. 계단 끝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잘 봐유, 이래뵈도 안 굴러유!”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일요일마다 어디 가세요.”
뒤에서 남편이 들리지도 않을 말을 툭 던지자, 여자는 괜히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곤 창가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할머니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골목 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교회일까, 마실일까. 여자는 생각하다가 남편에게 이참에 물었다.
“할머니 여기서 죽어도 된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하라고 했어?”
남편은 커피를 내리다 말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엄마 생각 나서… 이 집도, 말하자면 엄마 집이잖아.”
그 말을 들으며, 여자는 창가에 기대 골목 끝으로 할머니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계절이 바뀌며 할머니의 옷차림도 두터워졌다. 주중이면 사람들이 옥탑방을 드나들었다. 무언가를 들고 올라갔다가, 비닐봉투를 가득 들고 내려오기도 했다. 말소리와 찬송가, 음식 냄새가 아래층까지 흘러내렸다. 옥탑방이 숨 쉬는 듯했다. 여자는 창가에 앉아 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따라 그렸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번역 원고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자는 한 줄 한 줄 문장을 옮기며 고독과 삶의 무게를 따라 적었다. 「사랑에 대하여」의 한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고독한 사람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품고 살다가, 기회가 오면 털어놓고 싶어진다는 대목이었다. 떠오른 사람은 박말순 할머니였다. 늘 듣는 쪽이던 할머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에 두고 살아왔을까. 여자는 문장 위에 시선을 오래 두었다. 옥탑방에서 지내는 박말순 할머니의 삶이란, 뜻은 알 것 같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 자기 말로 번역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할머니가 오고 첫 겨울이 시작되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자 옥탑방 마당에는 평상만 남았다. 옥탑방은 아래층보다 따뜻했지만, 보일러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남편은 가끔 들러 보일러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그런 건 늘 남편이 먼저 챙겼다. 처음 연애할 때 그의 관심은 따뜻했지만, 이제는 한 박자씩 어긋나 있었다. 여자는 그 어긋남을 설명하지 않고 넘겨왔다. 그날도 남편은 늦은 밤, 여자를 앞세워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싸한 냉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른 저녁에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은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따로 설치된 보일러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할머니, 추우면 저희도 힘들어요. 따뜻해야 집입니다.”
할머니는 눈을 찡긋하며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따뜻해야… 집이긴 허네. 근디 이 집, 전기세 생각은 안 하누?”
그 장난기 어린 얼굴에 잠시 소녀 같은 빛이 어렸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방 안 온도를 두 칸 더 올리고, 복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비볐다. 여자는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먼저 옥탑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따뜻한 공기가 등 뒤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남편의 말, ‘따뜻해야 집’이 이해되지 않았다. 늘 집안일을 챙기고, 공간을 정리하며,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는 것들을 신경 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습관처럼 몸에 남은 관리의 감각이 지금 옥탑방의 적막 속에서도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여자는 손끝을 괜히 말아 쥐었다.
시간이 흘러, 달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옥탑방 위층에서는 할머니의 인기척이 간간이 들렸다.
“복이야! 복이! 내가 시방 죽을 때가 된겨.”
가끔 할머니가 복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복이가 사라졌으면 하고 잠시 바랐던 적도 있었다. 낮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오래 이어졌다.
〔새댁, 아래 안 시끄러웅? 나가 삼봉리적 부ㄹ더 노래가 요즘 생각나서. 아, 복이 데려온 곳ㅅ 거기여.〕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할머니, 잘 계시지요? 방 수도관 얼지 않게…〕
‘방 수도관 얼지 않게’를 쓰고 나서, 곧 〔꼭꼭 보일러 틀고 계세요.〕로 바꾸었다. 할머니의 답장은 점점 느리고, 오타도 많았다. 한켠이 무겁게 채워졌다.
〔여기가 울 아들 집허고 가까ㅂ쥬.〕
어느 날 문자가 왔고, 여자는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들.’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었다. 집 근처라니, 돌아가셔도 번거로운 일은 줄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묶여 있던 짐이 그래도 툭, 풀리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답장이 없어.”
3월 초입,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여자는 낮게 말했다. 옥탑방에서는 며칠 전부터 하루 종일 툭툭 걸어다니던 할머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신발을 벗으려다 말고, 자기를 따라오라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신발장에 넣어둔 옥탑방 열쇠를 손에 쥐고 그를 따라갔다.
‘혹시 모르니까….’
남편이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소심하게, 두려움이 밀려오자 나중에는 퉁퉁퉁, 힘껏 두드렸다. 안에서 복이가 발톱으로 문을 절박하게 긁었다.
“복이 소리만 들려. 여기 열쇠 있지?”
남편의 말에 여자는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남편이 받아 돌리자, 딸깍 하고 문이 풀렸다. 곧 복이가 낑낑대며 남편에게 매달렸고, 방 안에는 고요가 흘렀다.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할머니의 눈은 감겨 있었고, 베개 옆 약병이 몇 개 엎어져 있었다.
조용한 방 안, 남겨진 물건 하나하나가 할머니의 긴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복이가 몸을 비비며 올려다보자, 여자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쥐고 있는 사이, 남편은 전기장판 흔적을 확인한 뒤 할머니의 휴대폰을 찾아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구조대가 도착해 방 안을 살폈고, 안내에 따라 이송 준비가 이어졌다. 그때 아들도 도착해 함께 병원차에 올랐다.
장례식은 아들이 있는 가운데 치러졌다. 봄이 오기 전 꽃샘추위, 그리고 남아 있는 겨울의 쓸쓸함이 와 닿았다. 마당의 채소와 토마토는 이제 먼 이야기 같았다. 여자는 녹두를 갈아 김치를 넣고 지진 빈대떡을 다시는 먹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지고 문득 눈물이 났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한낮에 옥탑방 문을 열었다. 발끝에 닿은 빛이 방 구석까지 번지며, 오래전부터 그녀를 안내하던 듯했다. 먼지까지 밝힌 빛이 바닥을 반짝이게 했고, 그녀는 오랫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아들이 부탁했다는 이유로 올라온 것이었지만, 그 사실조차 흐릿하게 느껴졌다.
방 안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앉은뱅이 나무상 위에는 성경책이 중간까지 펼쳐져 있었고, 필사 노트의 글씨는 서로 겹쳐 거의 읽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 삶의 흔적과 정적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 완벽한 침묵이 천천히 여자의 어깨를 조였다.
마지막 장에 적힌 날짜는 3월 9일, 할머니가 눈을 감은 날이었다. 여자는 그 날짜를 오래 바라보았다. 옥탑방의 고요와 계단을 오르내리며 쌓였던 긴장이 몸 전체를 한꺼번에 밀어냈다. 입안이 바짝 말랐고, 목 깊은 곳에서 뜨거운 숨이 치밀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은 바르르 떨렸다. 몸을 앞으로 숙이자, 방 안의 정적 속으로 모든 감각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여자의 숨결이, 떨리는 손이, 긴장이. 그제야 진득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몸 안의 억눌린 모든 것이 흘러나왔다. 촤르르륵.
그날 밤, 여자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톨스토이 작품 속, 단단한 눈빛을 가진 인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 질문 앞에서, 할머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음 날, 할머니의 아들이 처음으로 옥탑방을 찾았다. 그는 방을 한 번만 보고 가도 되겠느냐고 말했다. 계단을 오르며 잠시 멈췄고, 마당에서 서서 주변 지붕과 골목을 천천히 훑었다. 여자는 그 시선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풍경을 더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문인가요?”
작은 창고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머쓱하게 손을 놓았다. 아무 말 없이 여자 뒤를 따라 옥탑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제 집에서는 오래 못 산다고 하셨어요. 당진이 고향인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양주를 잠시 거쳐 제 아파트로 들어오셨거든요. 걱정 말라면서 나가셨어요.”
아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아프신 양반,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알려 달랬는데… 그러면 제가 더 불편해진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렇게 놔두면 안 됐던 거였죠.”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를 보며, TV에서 보던 파렴치한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방을 둘러보다 냉장고 문에 붙은 삐뚤빼뚤한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냉장고 - 김복자 권사’, ‘냄비 2 후라이팬 1 - 명자 동생’, ‘낮은 상 - 고물상 석구할배’.
아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이러네요. 폐 하나 안 끼치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말끔히 닦인 바닥에 주저앉자,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여자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가 우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동네에서 인기 많으셨어요.”
말을 꺼내자 어색함이 몰려왔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셨어요. 빈대떡도 해주시고, 채소도 나눠주시고요.”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더 묻지 않았다. 여자는 할머니에 대해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어떤 감정은 끝내 옮겨지지 않은 채 남기도 한다는 것을.
“저, 그런데 할머니가 키우던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어요. 임시로 저희 엄마에게 맡긴 상태인데….”
아들은 잠시 듣더니, 자신이 맡아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짧게 말했다.
“강아지 문제는 알아서 해 주세요.”
여자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며칠 뒤, 동네 사람들이 옥탑방을 정리했다. 방은 금세 비워졌고, 여자는 빈 공간을 바라보며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정리되는구나 생각했다.
4월, 옥탑방은 다시 사람을 맞을 준비가 된 듯 보였다. 여자의 책상 위엔 아침마다 남편이 가져다 놓은 캡슐 커피가 놓였지만, 식은 채 버려지는 날이 많았다. 이별이라는 단어가 이제 생각이 아니라 문장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복이를 맡겼던 고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 개 데려왔으니 얼른 문 열어.”
현관문이 열리자 복이가 먼저 들어왔다.
“어휴, 나는 못 키우겠어.”
고 여사는 도망가듯 돌아갔다.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고 여사답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반찬을 해주는 것도, 용돈 겸 몇 만 원을 통장으로 보내주어야 다음 반찬이 왔다.
문이 닫히고, 집 안에는 여자와 복이만 남았다. 복이는 낯선 바닥을 냄새 맡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자는 숨이 막혔다. 누군가 자신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기분 때문이었다. 재채기가 연달아 터지며 코끝이 붉어졌다. 남편은 늦는다는 문자만 남겼다.
‘이런 순간엔 늘 내 몫이구나.’
복이를 바라보자, 어린 시절 문이 밖으로 잠긴 집 안에서 울던 동생들을 달래던 자신이 떠올랐다. 숨이 조여왔다. 여자는 벽에 몸을 붙이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물은 복이의 기척을 지워주며 쏴아, 하고 쏟아졌다. 그 사이 휴대폰을 들어 온라인 카페에 접속했다.
강아지 입양 글을 올리고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알림 몇 개가 울렸다. 댓글은 모두 비난뿐이었다. 한 줄씩 읽다가 화면을 껐다.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여자는 복이를 혼자 두기로 했다. 내일 남편이 회식이라 차를 놓고 간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거실을 힐끗 보니, 복이가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아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이 커피를 내리기 전, 캡슐 하나를 머신에 넣었다. 박말순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거시기, 뭘 넣은 겨? 이렇게 맛나도 되는 겨?”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에 데운 우유와 시럽을 더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던 말이었다. 여자는 잠시 웃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밀어내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머그잔을 든 채 방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는 러시아어 사전과 포스트잇, 연필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밤새 붙잡고 있던 문장의 흔적들.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며 방 안이 천천히 밝아졌다. 여자는 어젯밤 늦게까지 단편 원고를 다시 읽었다. 오늘 조금만 손보면 출판사에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알람을 끄고 조용히 출근 준비를 했는데, 회의가 있는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예전에는 몇 번이나 잔소리하던 넥타이였다.
여자는 프린트한 번역 원고 위, 고치고 싶은 문장들만 표시한 채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와 커피를 내려놓으려다 이미 놓인 잔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말없이 사전 옆에 내려두고, 어깨에 손을 올려 두 번 토닥인 뒤 방을 나갔다. 곧 현관에서 신발 신는 소리가 들렸다.
“나 간다.”
그는 방을 향해 짧게 말하고, 복이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자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옷장문을 열어 재킷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두고 간 차 키를 집었다. 손이 분주해졌다. 사료와 물그릇, 먹이그릇, 간식들을 큰 봉투 하나에 담았다. 복이는 소파 위에 엎드려 여자를 지켜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는 시선을 피한 채, 부은 코를 문지르다가 크게 재채기를 한 번 했다. 그 순간 소파에 턱을 괴고 엎드렸던 복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놀란 얼굴이었다. 여자는 말없이 다가가 수건으로 복이를 감싸 안고 차에 태웠다.
시동을 걸고 휴대전화로 남양주 삼봉리를 검색하며, 근처 어딘가에 들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목적지까지 오십 분 남짓. 가만히 라디오를 켰다. 클래식 채널에서 제목 모를 현악곡이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질서 정연한 음악이었다. 채널을 돌리자, 사랑과 그리움이 어쩌고 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삼봉리로 접어들자 아스팔트가 군데군데 패여 있었다. 바퀴가 지날 때마다 둔탁한 진동이 올라와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들판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지만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자, 바람이 마른 풀을 흔들었다. 뒷좌석에서는 복이의 가느다란 숨소리만 들렸다.
손에 묻은 콧물을 훔치고 차에서 내려 종이봉투를 꺼냈다. 들판 가장자리로 가 사료를 한곳에 흩뿌리자, 알갱이가 마른 풀 위로 사각거렸다. 몸을 수그려 가까이에 수건도 펼쳤다. 허리를 펴 들판과 먼 하늘을 훑자, 바람이 불며 여자의 머리카락 몇 올이 얼굴에 살짝 닿았다. 먼지와 함께 겨울 내 묵어 있던 흙이, 봄바람과 함께 코끝에 닿았다.
잠시 주저하다가 시선을 차 안에 있는 복이에게 돌렸다. 창문 너머 작은 몸이 떨 듯 여자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차로 다가가 복이를 꺼내 땅에 내려놓으니,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네스를 채우고 매듭을 확인하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먹이 근처, 나뭇가지에 줄을 묶다가 날카로운 마른 껍질에 손등을 긁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복이는 짖지 않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묶은 줄을 단단히 확인하자, 천천히 사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냄새는 맡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줄을 묶은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풀면,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차에 태울 수도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복이의 눈을 피해 괜히 주변을 보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차로 돌아왔다. 바람 속 정적이 여자의 마음을 움켜쥐었다.
여자는 시동을 걸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차를 움직였다. 후방거울 속 들판 한가운데, 작은 복이가 점점 멀어졌다. 라디오에서는 유행가 가락이 흐르고, 창문을 모두 닫자 차 안에는 복이 냄새가 비릿하게 차 있었다. 속이 울렁여 핸들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익숙한 동네에 접어드니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차를 세워 물을 사 마셨지만, 텁텁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차 문에 기대 서자, 복이의 울음과 남편과의 말다툼, 지난 몇 달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혹시나 하며 손가락으로 확인한 생리 날짜는 이미 두어 달이나 지나 있었다. 몇 걸음 걸어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고, 아무 생각 없이 차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아침, 복이가 앉아 있던 소파에 몸을 묻듯 쓰러졌다. 몸이 닿자, 미세하게 꺼진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졸았다 깨기를 반복하던 중, 어디선가 복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 조용하지만 끈질긴 존재감이 마음속 불안을 찔렀다. 여자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소파 옆을 의식했다. 순간, 복이가 곁에 와 앉아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붉은 혀가 여자의 오른손등을 부드럽게 핥자, 갑작스런 축축함에 눈을 크게 떴다. 해는 이미 지고 거실은 어둑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테스트기를 세면대 위에 늘어놓으니, 환풍기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붉은 선이 하나, 둘 나타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손가락 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물을 만지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에 습기가 맺혀 있었다. 세면대 가장자리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놀라움도, 기쁨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복이와 여자 사이의 공백, 그리고 이제 부여받은 사실만이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쉬자, 입 안이 싸하게 차가웠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세상과 여자 사이에 얇은 막 하나가 끼어든 듯, 모든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남편은 밤 아홉 시가 넘어 현관문을 열었다. 여자는 자지 않은 채 문지방에 서서, 그가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바닥에 툭 던졌다. 거의 힘겹게, 셔츠와 바지를 벗고 속옷 차림이 된 채 침대가 있는 방으로 비틀거리며 겨우 걸어갔다. 휘청대는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닿자, 그 끝에 드러누워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 말만 또렷이 들렸다.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집도, 사람도… 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말처럼 들렸다. 이미 지나간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 그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던 여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침대 옆에 서서 자신의 오른쪽 손등에 난 긁힌 자국을 만져 보았다. 상처를 따라 길게 피가 굳어 있었다. 낮의 들판을 떠올렸다. 복이는 끝내 짖지 않았고, 돌아서던 자신의 등이 마음속 깊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두려움 없이 복이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번역은 단어가 아닌 온도를 옮기는 일이어도, 사람의 마음은 문장보다 훨씬 늦게, 아주 천천히 번역된다는 것을, 막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여자는 임신 테스트기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둔한 플라스틱 소리가 나고, 서랍이 닫혔다. 현관 쪽으로 시선이 갔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 희미하게 빛나는 차 키, 그리고 낮에 입었던 코트.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자 엔진 소리가 밤 공기를 가볍게 가르며 흩어졌다. 할머니가 떠난 옥탑방을 떠올리며 목이 간질거려 몇 번 기침을 했지만,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열나흘 달빛이 길을 열었다. 차는 앞으로 움직였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조금씩 들어갔다.
낮과 달리, 밤은 어딘지 더 낯설었다. 여자는 차의 헤드라이트와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 눈으로 더듬더듬 복이가 있는 곳을 찾았다. 희끗한 털뭉치가 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서야, 천천히 차를 멈췄다. 시동을 켠 채 차에서 내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웅크렸던 복이가 잽싸게 몸을 일으켜 꼬리를 흔들며 서 있었다.
하네스 줄이 나뭇가지에 묶여 가까이 오지 못하는 복이를 향해 손을 뻗자, 따뜻한 체온과 털의 감촉이 두 손바닥에 가득 채워졌다. 여자는 처음 만져보는 복이의 몸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시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봄밤의 들큰한 공기와 달빛, 가로등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자, 마음 한켠이 은근히 녹아내렸다. 오래 움츠려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며 작게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