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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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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태

책 제목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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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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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풍성하다. 그 풍성한 햇살을 받고 하루가 다르게 연초록 빛깔이 두껍게 대지 위를 뒤덮는다.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져 내리는 사이로 스멀거리는 아지랑이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어흥, 어여넘차 어허호옹∼.”

애절하고도 원망에 젖은 상두꾼의 목소리가 여름으로 다가서는 한낮의 적요로움을 비집고 상여는 읍사무소를 한 바퀴 돌아 군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근래에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대나무에 매단 만장(晩章)만도 수십 개나 되었다. 만장의 천은 명주나 한지가 아니라 하얀 옥양목이 아니면 혼방천으로 만든 신식 만장이었다. 그것에 써넣은 글귀 또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글귀가 아니라 하나같이 구호의 일색이었다.

‘대선 공약한 디제이 농민부채탕감 실천하라’ ‘수입 농산물에 우리 농민 죽어간다’ ‘부정부패 일삼지 말고 농민생활 살펴보리’ 등등.

붉은 머리띠를 불끈 두른 상두꾼들은 꽃상여를 뒤따라가며 검붉게 그을은 팔뚝을 쑥쑥 내지르며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가 끝날 때마다 “어흥, 어여넘차 어허호옹”하는 후렴이 애달프고 구슬프게 초여름 햇살에 섞여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한지로 물들여 꾸민 보잘 것 없는 꽃상여였지만, 수십 명이 메고 가는 뒤를 따라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다. 그들이 농사꾼임을 댓방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손에 주어진 괭이, 삽, 호미에서뿐만 아니라 막일하다 나온 흙 묻은 옷차림이 그러했다.

상여는 군청 앞에 이르러 광장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경찰의 데모진압대가 이미 철통같이 막고 있었다. 상두꾼 시위대는 군청 앞 도로에서 상여를 어리대며 구호를 외쳤다.

“정부를 대표해 군수는 즉각 나와 김만종의 주검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사죄하라!”

“어흥∼ 어여넘차 아허호옹∼.”

김만종의 주검을 실은 상여가 따갑게 내려꽂히는 햇살 속에서 또 다시 일렁이며 상두꾼의 외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무려 3시간여를 그렇게 목이 터져라고 외치며 어리댔지만, 궁전처럼 버티고 선 군청의 건물에서는 개미 한 마리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농민들은 이제 목이 타고 시었다. 몇몇은 뜨거운 햇볕에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그때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선 한 중년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유! 농민 잘살게 해 주겠다고 찰떡 같은 공약해 놓고 농민 죽이는 정책 펴는 이놈의 정부가 무슨 놈의 국민의 정분기여! 쇠귀에 경 읽기 아닌겝여! 우짤겨, 죽은 김민종만 불쌍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 아닌 겝이여! 우리를 대표해 먼저 가신 김만종 님의 장례부터 치러야겠구먼유. 그리구선 각자 돌아가 죽으나 사나 땅을 파야 산목숨 잇지 않겠는 겝여! 디제이 믿고 표 찍은 요놈의 손목때기가 썩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 아니관디유. 이제 요만했음 권력 잡고 힘깨나 쓰는 자들도 엔간히는 알아듣지 않았감유. 다들 그만 돌아갑시다!”

오늘 김만종의 장례날 시위를 주도했던 농민후계자 차문길의 주장이었다.

“시방 뭔소리하고 있는 기여, 한번 더 농민 부채탕감 해주겠다는 확답 받아야내야지. 우리야 청와대꺼정이야 못 가지만 군수라도 대신 가서 디제이 만나 약속 받아오도록 해얄건 아닌감여.”

갈매2리에 사는 윤민수 통장의 화난 음성이었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 지칠 대로 지친 시위대들은 차문길의 의견대로 상여 머리를 돌렸다.

이윽고 “어흥”소리가 한층 더 높아지더니, 드디어 상여는 군청 앞 광장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서고 말았다. 길게 늘어선 상두꾼의 행렬은 김만종 영구를 메고 그가 살아 생전 들랑이던 동구 앞을 돌아 수리봉 산자락으로 향했다.

“어흥, 어흥 어여넘차 어허호옹!”

저승길을 재촉이라도 하듯, 상여잡이 농민들의 한 서린 장단이 느릅나무 모퉁이를 도는 상여를 따라 아련히 퍼져 가고 있었다.

상여는 굼실굼실 수리봉 산자락을 오르더니 한 곳에 딱 멈춰 섰다. 그곳은 아직도 수마의 흔적이 남은 과수원 뒤꼍이었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한벌리 양지마을과 그 아래초리 낡은 터가 한 눈에 들어오고, 방금 상여를 메고 왔던 충주 방향 36번국도가 굽이굽이 뻗어 간다. 평소 같았으면 그 하얀 4차선 도로에서 허공으로 가득히 아지랑이가 구름과 함께 밀어 올려져 아스라이 치솟은 가섭산 머리 위로 빗겨 흩어짐도 좋은 풍광으로 여겨졌을 게다.

이 과수원 뒤꼍도 한가하고,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견줄 데 없는 전망 좋은 곳이자 양지 바른 명당 같기도 한 곳이었다. 거기서는 김만종이 영원히 묻힐 곳으로 묏자리는 이미 굴착기가 작업을 끝내 놓고 있었다.

상두꾼과 모여든 조문객(농민)들은 잠시 상여를 내려놓고 막걸리를 들이키거나, 소주를 한두 잔씩 꺾고는 다시 상여를 메었다. 그리고는 파놓은 묏자리를 빙빙 돌며 나이보다 늙어 뵈는 안골 의장이 앞소리를 먹이고 상두꾼과 조문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였다.

“억울하고 분하도다. 북망산천이 어디더노! 우리 농민 어찌하라고 당신만 가는 겐가!”

“어흥, 어허호옹 어여넘차 어허호옹∼.”

“손톱 닳고 허리 굽도록 이 땅 일궈 살자더니 빚더미만 쌓아 놓고 당신 혼자 어찌 가오! 애고애고 불쌍하고 억울해라 우리 농민!”

“어흥 어허홍, 어여넘차 어허호옹∼.”

상여 어리는 소리에 드디어 하얀 소복 차림인 김만종의 아내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터뜨리고 목농아 울었다. 그녀의 눈에는 닭구똥 같은 눈물방울이 쉬임없이 떨어졌다. 되새기고 추억할수록 생각나는 게 많을 것이고, 그럴수록 잘살아 보지도 못하고 살 준비만 하다가 먼저 간 남편이 불쌍하고 원망스럽고 한맺혔기까지 했으리라.

“워떻간디유! 저렇게 일만 벌여놓구선, 거기다 아직꺼정 자식들 공부도 다 못 시키고선. 정말 남일 같지 않구먼유.”

창숙이 서러워 흐느끼는 임영심에게로 다가가 위로겸 걱정되어 한마디 거들자, 영심은 창숙의 손목을 와락 잡고 끌어안으며 더욱 흐느껴 울음 범벅의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나 혼자 어떻게 살아? 어떻게….”

서로가 외로운 처지라, 문상수가 사는 이웃에 세간을 부려놓던 날부터 문상수의 아내 창숙을 형님이라 부르며 지내온 임영심은 흡사 넋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문상수도 도시에서 공직생활로 30년이 넘게 지내다가, 그의 아내가 태어나 자란 처가 쪽에 인연이 돼, 받은 퇴직금으로 허름한 집 한 채와 방치하다시피 한 밭 서너 뙈기를 장만해 이곳에 와 살기를 두어 해쯤 되던 때에, 김만종이 가족을 데불고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김만종 가족이 이사를 오던 그날, 문상수 내외는 처음 맞는 이웃을 위해 점심 한 끼를 대접했다. 그때 대접한 한끼의 점심이 인연 되어 오늘날까지 끈끈한 정으로, 이웃으로, 형님 아우로 살아왔다.

“저는 김만종이고, 저의 처 임영심이에요. 자식새끼 셋이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우린 두 내외뿐이에요. 문상숩니다. 저 아내는 진창숙이고요.”

서로 나이도 주고받아서 어느 사이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그날 점심은 문상수 내외가 텃밭에 가꾼 상추, 근대, 부추며 얼가리배추에다 머위, 호박잎을 뜯고, 돌미나리, 산달래, 고들배기, 씀바귀 등 남새건 들나물이건 온갖 푸성귀를 다 장만하고, 애호박, 감자, 가지, 오이 등을 삶고 볶고 무치고 지지고 끓인 반찬에다 검은콩 듬성듬성 섞어 마련한 밥상은 가지 수로 헤아린다면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진수성찬이었다.

모두가 식물 일색이요, 손수 가꾸거나 거저 채취한 자연산임을 아내가 강조하자, 도시에만 살았던 다섯 가족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고, 자기들도 그렇게 살 거란 희망에 한껏 마음을 부풀리었다.

그날 우리들은 한 식구처럼 점심을 들었고, 간간이 친구들이 올 때마다 갖고 와 먹다 남은 막걸리와 맥주를 마시며 살아온 과거사며, 앞으로 살아갈 계획과 희망을 대충 가식 없이 나누었었다.

그런 인연과 더불어 이곳에 터를 잡고 김만종 내외가 일군 과수원이고, 그 과수원의 뒤꼍에 만종이 묻힐 묏자리가 준비돼 있다. 그러니까 이사온 지도 벌써 오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김만종은 30년을 살던 서울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귀향해 오던 바로 그해부터다. 임자 없이 버려진 묵정밭을 1년 내내 손발이 부르트도록 피땀 흘려 일군 2천5백 평의 땅이었다. 김만종 내외가 거기다 신품종 복숭아를 심어 과수원을 조성한 것이었다.

그는 수확기에 일손이 모자랄 것을 미리 생각해, 거두는 시기에 차이를 두어 내외만으로도 수확할 수 있는 품종을 차례로 선택해 심었다. 맨 앞쪽에다 8월 초순에 익는 호기도를 심고, 중간쯤엔 9월 중순에 따는 스미골드를 심었으며, 맨 끝쪽으로는 10월 중순에 출하하는 엘 버터를 심어 놓을 만큼 본격적인 영농의 꿈을 가꾸고자 했던 과수원이었다.

그렇게 일군 땅에 복숭아 묘목을 심은 지 3년째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땅 주인은 땅을 사던지 아니면 곧장 내놓으라며 득달이 심했다. 그래도 만원된 서울을 버리고 농촌으로 이사를 간다니까 귀농정착금이란 걸 주었다. 겨우 그것 3백만 원으로 시작한 삶의 터전에 엉덩이를 제대로 붙이기 앞서 청천의 벽력이 떨어진 것이었다.

어떻게 해 볼 엄두나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기엔 흘린 땀이 그러했고, 쇠심줄같이 질긴 목숨이야 부지 못할 리 없겠지만, 어려운 와중에도 별 탈 없이 한참 공부에 열중하는 중3, 고3생에다, 2학년짜리 대학생 등 3남매를 생각하면 다시 이를 악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놈의 꿈이 그렇게 요란스럽더람. 불길한 꿈일수록 그렇게도 푸짐했던가!’

만종은 어젯밤 어지럽던 꿈을 손으로 훼훼 저었다.

‘그래, 아직도 새털만큼이나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누굴 원망하랴. 넘어져도 땅을 원망 말아야지. 다시 짚고 일어나야 할 땅이 아니겠나.’

만종은 다음 날로 농협에 가서 사정을 소상히 밝히고선 땅을 담보로 빚을 내 토지를 매입했다.

‘아직도 수확을 올리려면 1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산사람 입에 거미줄 치랴.’

그렇게 생각한 만종은 인근 과수원에 나가 적과(摘果)나 전지를 해주거나 막노동의 날일도 어지간히 해댔다. 덕분에 호구지책은 강구할 수 있었고, 다달이 불어나는 이잣돈도 일부씩은 갚아 나갈 수가 있었다.

‘한 해만 더 있으면 복숭아 수확에서 얻을 수익금은 적어도 몇 천만 원 씩은 될 터이니 4∼5년만 고생하면 빚없이 내 땅 부치며 등따습게 다섯 식구 살아가리라.’

만종은 이가 시리도록 악물었다. 장차 자식들 장가들이고 시집 보내려면 남의 집 길흉사에도 빠짐이 없어야겠지만, 만종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년에 한 번씩 내라는 적십자 회비도 내본 지가 몇 해 되었고, 노인정에 떡국 한 그릇, 라면 한두 상자 보낸지도 기억에서 삼삼할 정도였다.

그러니 약삭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인심에는 내 배가 불러야 남 걱정을 하기 마련이고, 내 곳간이 비어 있음에야 어찌 남의 쌀독을 걱정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런 형편이니 두 눈 질끈 감고 몇 해만 넘기자고 생각을 다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임영심도 오뉴월 뜨거운 햇살을 가리느라, 복숭아 묘목 살 때 푸른농원에서 공짜로 얻은 챙 넓은 볕가리개 모자를 생전 처음 눌러쓰고선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복숭아 묘목 사이 콩밭 이랑에 엎드려 노상 살았다.

그녀는 허리를 잔뜩 꺾어 엉덩이만 굼실굼실 돌려 가며 호미질에 여념이 없었지만, 살아온 날이며 살아갈 날을 헤아려 보면 애간장이 타서 주먹만 한 한숨인들 안 토해낼 수 있었으랴. 하지만 그녀도 남편 못지않게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고, 주먹으로 등허리를 두드리며 쓸개즙보다 더 쓴 침을 삼켰다.

그런 부모의 절박한 삶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래도 별 투정 없이 자라 주는 삼남매가 대견스러워 언제나 신세 타령일랑 접어두고, 햇살처럼 밝은 표정과 아침 이슬 같은 음성으로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감싸 주기에 인색함이 없도록 애쓰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 임영심이 있었기에 김만종은 이날 이때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제 생각을 혼자 담아 두지 못하고 생각한 대로 뱉고 토해버려야 속이 편한 그런 깔깔한 성질을 거머쥐고 살아왔다.

그 깔깔하고 곧이곧대로 사는 성품은 김만종으로 하여금 부정비리에 눈감지 못하게 했고, 수틀리면 욱하는 직선적 성격은 언제나 돌아오는 결과가 자기 손해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 치는 무모함일지라도, 단 한 번을 눌러두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 그는 그렇게 잘 나가던 대기업의 자재과장으로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룹 전체가 공중 분해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기고 말았다. 엿을 많이 주고 적게 주는 것은 엿장수 마음이듯이, 기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군사정권의 마음에 달렸던 그 시절, 군사정권에 고분고분하지 못했던 사주가 구속되고 회사는 법정관리라는 명분으로 군인이 접수하면서, 사원들은 모두 쫓겨났다.

군사정권하의 암울함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과 같았다. 김만종은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려 온갖 곳을 다녀보았지만, 쉽게 구해지질 않았다. 어린것들을 방에 가두어 둔 아내는 식모나 식당 종업원으로 나가는 판이라, 만종의 등은 더욱 뜨거웠다. 그는 할 수 없이 영업용 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택시 영업을 시작한 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늦은 저녁, 손님을 태우고 노원역 앞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젊은이가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같이 갑시다! 손님은 어느 방향이세요?”

먼저 탄 손님에게 물었다.

“의정부 쪽입니다만…?”

“좋습니다. 저도 그 방향이니까요.”

그때 김만종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합승은 안 됩니다. 내려주세요.”

“이 손님과 같은 방향인데 뭘 그래! 요즘 합승 안 하는 택시 어디 있다고… 입장 곤란하게 되면 내가 책임지지.”

반말로 거침없이 지껄였다. 그때 뒤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진행 신호가 켜졌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거리를 건너 택시 정류장에 세우고 다시 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발끈 화를 내며 말도 안 되는 엄포를 놓았다.

“여보, 운전기사 양반! 정말 이러기오? 승차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건 승차 거부가 아니라 합승 거부예요! 어쨌든 내려 주세요!”

“난 못 내려, 절대로 안 내려!”

젊은이가 실랑이를 계속하는 사이, 참지 못한 승객은 슬그머니 내려 달아나 버렸다. 미터기에 만 원도 넘게 찍힌 요금도 못 받고 손님을 놓쳐버린 김만종은 더 참을 수 없어 근처 파출소로 가 차를 댔다.

사실대로 진술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그 젊은이가 주먹으로 김만종의 뺨을 후려쳤다.

“이 새끼, 죽고 싶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거짓 진술이야!”

순간 김만종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고, 그의 주먹이 자동으로 상대의 면상에 날아갔다. 두 사람은 난타전을 벌이다 경찰이 뜯어말려 결국엔 쌍방 고소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김만종 앞으로 70만 원의 벌금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이의가 있을 때는 열흘 이내 정식 재판을 청구하라는 단서가 적혀 있긴 했지만, 김만종은 곧바로 검사에게 찾아가 항의했다.

“어째서 조사 한 번도 해 보지 않고, 죄 없는 사람에게 벌금을 내라 합니까?”

“뭐라? 지금은 비상시국이야. 삼청교육대에 보내야 정신 차리겠어!”

“비상시국이 무법천지인가요?”

“안 되겠어. 이 새끼 감방에 처넣어!”

검사의 한마디에 구속이 되었고, 형식적인 형사재판을 거쳐 두 달 만에 70만 원의 벌금형이 오히려 2년 6개월의 집행유예로 둔갑됐다.

어쨌든 풀려 나오긴 했지만, 참으로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훨씬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렇게 억울하게 뒤집어씌운 젊은이가 바로 신군부의 핵심 권력기관이었던 보안사의 기관원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이었고, 세월 속으로 묻혀버린 사실이었다. 김만종은 그 후로도 직장을 여러 곳 전전하면서 오래도록 일상의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고민은 했어도 절망과 삶의 의지는 꺾지 않았다. 불의와 부조리에 항거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의가 승리하는 경우가 없었다.

불이익은 언제나 약자 편이었고, 그것은 당연한 세상사임을 여기며 늘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김만종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없다면, 이 땅에는 진솔한 인간의 냄새조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루하고 막막한 세상에서도, 항거에 대한 결과와는 상관없이 꿈꾸는 자만이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희망이 있을 것을 확신하며 김만종은 사소한 감정의 군살은 저쪽으로 밀쳐 두고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랬건만, 지치고 병들고 부패한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싫어져서 한시도 더 버틸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군사독재의 전두환 정권은 물러났지만, "믿어주세요" 하던 노태우 정권도 어느 것 하나 믿을 만한 것 없는, 결국 별 수 없는 정권으로 끝나더니, '문민정부'라 자처하며 출범한 김영삼 정부도 청문회로 밤을 지새우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며 겨우 해놓은 업적이란 것이 고작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일뿐이었다. 김만종은 속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문민정부 하에서 더 보태진 것은 자고 새면 터지는 대형 사고였고, 그럴 때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이 매스컴을 장식했다.

기차 전복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항공기 추락 사고,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 어떤 정부보다도 기록적인 사고를 일으킨 정부였다. 물론, 전 정부가 저지른 만성적 부조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문민정부도 IMF 도래와 함께 자식의 권력형 부정비리로 패가망신이란 부끄러움을 안고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김만종 같은 서민이 살아가는 데 어떤 변화도, 어떤 혜택도 주지 못한 채로.

다시 정권이 바뀌었다. DJ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순서로 치면 제8공화국. 그러나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룬 ‘국민의정부’라 했다.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무인(無人, 백성을 배제한) 김영삼의 문민정부 등, 그 어떤 정부도 국민의 정부가 못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못 된 것은 이름만 국민을 팔았을 뿐, 정작 정권을 잡은 후에는 국민을 위하거나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권 장악과 동시에 국민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부정·비리·축재·권력 남용 등으로 국민 위에 제왕으로 군림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측근과 추종자들 모두 그러했다.

그런 현실을 반세기 동안 죽음을 넘나들며 지켜봐 온 대통령 DJ에게 거는 국민의 기대는 정말 목마르게 갈망해 온 처지여서, 김만종에게도 지난 어떤 정부의 대통령보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 믿었다.

바로 직전 대통령의 아들이 황태자로 군림하며 권력형 비리로 부정을 일삼아 국민의 분노가 한참 들끓던 때, 새 정부가 들어섰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부정비리 없는 깨끗한 나라’ ‘기본이 서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정부 벽두부터 귀가 따갑게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살맛 나는 세상이 올려나 보다.'

김만종은 잔잔한 흥분마저 느끼며, 대통령을 잘 뽑았구나 하고 자부했다.

그랬는데, 정말 그랬는데…

불과 몇 개월도 못 가서 '옷 로비'라는, 그 밍크코트인가, 족제비 코트인가 하는 사건으로 장관 부인, 검찰총장 부인, 재벌 부인, 대통령 부인까지 관련되었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며 청문회까지 열렸다.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지난 정권들 못지않게 부정비리가 공공연하고 본격적으로 자행되기 시작했다.

그 관련자로는 청와대 비서, 도지사, 국정원 차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군 장성, 국세청장 등등에, 여당의 실세인 K 국회의원까지 서로 경쟁하듯 수십 년 동안 줄인 배때기를 한꺼번에 채우느라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털 하나 뽑지 않고, 통째로 삼키기에 급급했다는 소식이 김만종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통령의 아들 삼 형제가 한술 더 뜨다가 둘은 감옥 가고, 하나는 조사를 받았으며, 처남까지 마찬가지로 설쳤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배때기 채우기의 공통점은 부정비리를 엄폐하기 위해 돈 세탁을 전문으로 했다는 점이다. 원래 돈이란 것은 검은 손에 들어가면 들어간 순간부터 악취를 풍기기 마련이라, 아무리 세탁을 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돈은 세탁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큐 60도 안 되는 진돗개만도 못했던지, 부정으로 취득한 돈을 숨기기 위해 한사코 돈 세탁만 해댔다.

그래도 좋다. 아무리 처먹고 숨기고 잡아뗀다 해도, 그 돈들이 십조, 백조가 되건 국민의 세금이니 배만 아플 뿐, 김만종에게 직접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어마어마한 부정이 고위층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동안, 윗물이 더러우면 아랫물도 더럽기 마련이라 높고 낮은 공무원들도 제각기 부정비리를 저지르기에 한창이었다.

눈만 뜨면 억억(億億) 하는 마당에, ‘깨끗하고 기본이 선 나라’가 공익광고로만 날마다 방송될 뿐,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만종이 그런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노라니, YS 정권 중반쯤 있었던 기억이 지금의 세태와 겹쳐지며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새삼 소름이 끼치고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 그가 당한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는 그날 서울교도소를 나서자마자 마구 구역질을 했다. 뱃속에 있던 오물을 북부지원 쪽을 향해, 마치 형사 단독 12호실 양대중 판사의 낯짝을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뱉아냈다. 그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씨팔, 이 개새끼! 니 같은 놈이 판사라고? 스스로 판단해서 뒤질 놈의 죽을사짜 판사다. 이 우라질 놈아!"

김만종은 교도소 앞에서 아내가 가져다준 생두부를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토해냈다. 그가 이토록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열흘 전,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고 법정을 나서면서였다.

"에이 씨팔, 법은 있으나 마나군. 검사, 판사놈들도 똑같은 놈이다. 앞으로는 죽어도 재판 청구는 않겠다. 에이 씨팔놈들…."

혼자 중얼거린 소리가 판사의 귀에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김만종, 이리 와!"

판사의 고함에 김만종은 돌아서서 양대중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법원 직원이 달려와 그를 붙잡아 다시 판사 앞에 세웠다.

"방금 뭐라고 했어?"

"혼자 중얼거린 것도 말해야 합니까?"

"뭐라 중얼거렸냐 말야!"

"씨팔놈들, 개새끼들이라 했습니다."

"누굴 보고 한 소리야?"

"판사 나리, 당신 보고요."

"뭐? 뭐라고! 법정 소란죄로 10일간 구류에 처한다. 끌고 가라!"

"흥! 중얼거린 소리 알아듣지 못해 놓고서도 소란죄라. 정말 엿장수 마음대로군. 씨팔, 현철이 재판 때는 방청객들이 그렇게 소란을 부려도 한 놈도 안 잡아넣더니. 씨팔놈, 힘없는 이 김만종한테만 똥깨나 뀌는군!"

김만종은 법원 직원에게 끌려가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정과 불의에 대해 절대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저항해 왔지만, 이렇게 욕설까지 내뱉으며 항거하기는 처음이었다.

김만종이 모는 차가 빨리 가지 않는다고 뒤차가 몇 번이나 불을 번쩍이더니, 신호 대기에 서자 그대로 들이받았다. 교통경찰이 와서 몇 마디 묻더니 쌍방과실이라며 벌금 딱지를 한 장씩 끊고, 이의가 있으면 정식 재판을 청구하라고 했다. 김만종이 그래서 청구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쌍방을 모두 불러주지도 않았고, 대질신문 없이 김만종만 불러놓고 생년월일, 이름만 확인한 다음 "경찰이 거짓말하겠어! 벌금 4만 원! 다음은 서팔랑이!" 하고 넘어가 버렸다.

이 따위 재판이었으니, 김만종이 아닌 공자나 석가모니라 해도 욕설이 안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 사연으로, 김만종은 별다른 정리할 것도 없는 세간을 대충 정리하고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조용한 농촌에서 묻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희망을 걸었다.

'아무렴 세상이야 부패됐지만, 선량한 농민 속이는 정치까지야 하겠나? 시대가 그러하니 중농정책이야 쓸 수 없겠지만, 농민을 위한 정책은 펼 테니 열심히 일하면 살길이 있으리라.'

그런 희망과 꿈으로 개간한 땅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잘도 자라주었다.

3년 만에 첫 열매가 달렸지만, 모두 따내버려야 다음 해에 튼실한 복숭아를 수확할 수 있다기에 죄다 따주었다. 그랬더니 다음 해에는 거짓말같이 튼실한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렸다.

제때에 적과도 잘 해주고, 시시때때로 농약을 살포해 줬더니 벌레 하나 먹지 않은 탐스러운 복숭아가, 거짓말 보태 애기 머리만큼이나 큰 것이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렸다.

"잘만 되면 올해엔 농협 빚 절반 정도는 갚겠구려."

김만종이 아내 영심을 보며 말했다.

"모두 당신 뼈 빠지게 노력한 보람이지요."

"나보다 당신이 더 고생했지. 한두 해도 아니고 그 뜨거운 불볕이며, 그 엄동설한 움막 속에서 잘도 참아왔지. 고진감래란 말이 있지 않소."

"대견스러운 건 아이들이에요. 군소리도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니까요."

"허허."

김만종 내외는 모처럼 과수원을 돌아보며 행복에 젖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팔월 초순, 아침 안개가 수리봉 산자락을 감아 올라갈 무렵, 벌써 만종 내외는 그 넓은 복숭아밭을 한 바퀴 돌아보고 농막으로 돌아왔다. 만종이 농막 앞 평상에 앉자, 아내가 범퍼로 퍼올린 찬물 한 그릇을 떠와 함께 마시고 있을 때였다.

건너마을에서 인삼밭을 돌보러 나왔던 청주댁이 여남은 발짝 건너편에서 인사 겸 말을 걸어왔다.

"서울댁, 올해는 복숭아 가격만 좋으면 돈 좀 만지겠구먼유!"

"그래야지요. 청주댁도 올가을에는 인삼 캐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야, 그럼 캐야구 말구유. 5년근에 산밭 임대 기간도 끝나구먼유."

"요즘 하도 인삼밭에 도둑이 설친다기에 개만 짖어도 내다보긴 하는데 걱정이네요."

"우리 산밭 옆에 서울댁이 사니 그래도 한 시름 놓고 지낸대유. 고맙구먼유."

"별말씀을요. 우리 농사 이만큼이라도 짓게 된 건 순전히 이웃 덕분인 걸요."

영심이 진창숙네와 청주댁을 함께 싸잡아 한 말이었다.

해가 중천에 솟자 낮닭이 홰를 치며 한가롭게 울었다.

그날도 김만종 내외는 뽑아도 자꾸만 자라는 복숭아나무 밑의 풀을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뽑았다.

범퍼로 퍼올린 물로 발을 씻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등짝이 방바닥에 달라붙기는 내외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밤, 아내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비가 많이도 오나 봐요."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안 되는데!"

만종은 자던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나 우의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동이 희뿌옇게 트고 있었지만, 비가 창대처럼 퍼부어지고 있었다. 만들어 놓은 배수로에는 이미 물이 넘쳐 흘렀다.

비가 그치지 않는 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사흘 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씨는 맑아졌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복숭아나무는 부러지고 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쨍하게 쏟아지는 초여름 햇살 아래, 만종은 멍하니 과수원을 바라보았다. 오 년에 걸쳐 피땀 흘려 일군 옥토는 불과 사흘 사이에 박토로 변해버렸다.

'도대체 내 인생의 터널은 어디서 끝이 날 것인가?'

만종은 재기의 가망이란 거미줄만큼도 없는 현실에 압도되어, 그저 망연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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