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아는 거지만, 수필은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길지 않게 서술한 산문이다. 여기에는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일기나 특정한 타인만을 대상으로 해서 보내는 편지에서부터,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다루는 기사나 전기 같은 것, 예술품을 완상한 감상문, 여행 체험을 다룬 기행문, 어떤 개념에 대해 논증하는 철학론까지 두루 포함된다. 이런 범주에서도 특히 근
- 박덕규문학평론가
누구나 다 아는 거지만, 수필은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길지 않게 서술한 산문이다. 여기에는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일기나 특정한 타인만을 대상으로 해서 보내는 편지에서부터,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다루는 기사나 전기 같은 것, 예술품을 완상한 감상문, 여행 체험을 다룬 기행문, 어떤 개념에 대해 논증하는 철학론까지 두루 포함된다. 이런 범주에서도 특히 근
커튼이 자동으로 열리더니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알람 소리가 울린다. 침대에 있던 호연은 몸을 뒤척인다. 알람 소리가 한 번 더 울리지만 그대로 있다. 호연이 못 일어나자, 마리의 소리가 들렸다.“지금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침대는 자동으로 반 접히더니 앉은 자세로 바뀌었다. 이제야 눈을 뜬 호연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마리, 오늘 아침은 뭐야?
1뻑뻑한 두 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어젯밤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네 시였다. 키보드 위를 떠돌던 손가락 끝은 피로로 묵직했다. 숱하게 나를 괴롭혀 온 우울과는 달랐다. 컴컴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컴퓨터 화면 속 엽편도 되지 못할 몇 줄의 문장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다.백스페이스키를 연타했다. 텅 빈 파일의 하얀 배경을
내가 다름 아닌 마리오네트라니, 어리둥절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행지에서 본 꼭두각시 인형이 떠올랐다. 여러 개 줄로 조종하는 그것은 턱 관절이 빠지며 커다랗게 입이 벌어질 때는 우스꽝스러운 한편, 어딘지 공허한 표정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엄연한 이름을 두고 그리 지칭하다니, 별일이었다. 그새 별명이라도 생겼나 여기며 지켜보기로 했다.수업이 끝난 뒤
1파주 다율리·당하리 지석묘군에서 새암공원까지 이어지는 숲속 8km의 산책길에 발을 들여놓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만이 아니라 몇 겹의 시간을 한꺼번에 밟아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길의 앞머리에는 넓은 돌뚜껑으로 눌러 놓은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엎드려 있고, 중간쯤에는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키 큰 비석과 봉분들이 줄줄이 널려 있으며, 끝자락에는 신도시
이충서는 월말 특집 마감을 하고 홀가분하게 부원들과 함께 몇 군데 주점을 돌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 귀가 지하철을 탔다. 밤이 깊어서인지 승객들은 많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빈자리를 찾아 앉아 조는 듯 마는 듯 가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눈을 떴다. 그런데 바로 건너편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아, 평생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여자, 생각할
여름 숲은 늘 바빴어요.매미들은 아침 햇살이 나뭇잎에 닿기 바쁘게 맴맴맴 목청을 높였어요. 나비들은 꽃밭 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잠자리들은 연못 위를 쌩 지나며 비행 솜씨를 뽐냈어요. 숲은 온통 움직이고, 소리 지르고, 춤추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하지만 참나무 가지 위에는, 제자리에 묵묵히 멈춰 서 있는 조용한 벌레가 있었어요. 유난히 길고 단단한 주둥
매달 넷째 주 토요일이면 하늘이네 집은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해서 양로원을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엄마, 지난번엔 참치김밥을 했으니까 오늘은 김치김밥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매운 걸 못 드실 텐데 괜찮을까?”엄마는 어르신들이 매운 걸 못 드실까 봐 걱정이 되었어요. 옆에서 햄과 달걀, 맛살 부스
늦가을 햇빛에 눈이 부시다. 감나무잎 사이로 출렁이며 비껴 들어오는 햇살이 가슴을 파고든다. 예년만 못하지만, 주황색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유년 시절 도시로 이사 왔을 때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은 감나무를 처음 보았다.5월이 시작되면 연두색 싱싱한 감잎이 달린 가지 사이로 노르스름한 감꽃들이 빼곡히 피어났다. 자고 일어나면 나무 밑에는 떨어진 감꽃
퇴근길, 이미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노상 모니터에 처박느라 길게 늘어진 모가지가 뻐근하다. 찌뿌둥한 허리를 뒤틀어 양껏 괴롭히고 나서 거리를 찬찬히 둘러보니, 어느새 흥청망청 쑥덕쑥덕 난리통인 번화가를 걷고 있다.“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노는구나.”짧게 볼멘소리를 해본다.이 시절을 살아내는 여느 청년들과 같이 나 또한 나랏일이 걱정이고,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