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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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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희곡작가

책 제목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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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_창작의산실_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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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_ 민호|그림자|민호의 처

 

흰 천 위에 투영된 그림자들. 출근길에 시달리는 봉급쟁이 일상. 도시의 소음이 점점 꺼져 들어가면 사무실에서 결재받는 모습으로 압축된다. 결재판 들고 손가락질하며 윽박지르는 그림자. 그 앞에 마주 선 그림자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소리      서 있는 존재는 불쌍해.

 

혼자 된 그림자 옆으로 그림자들이 놀리듯 둘러싸며 마임을 펼친다. 망연히 서 있던 그림자는 천천히 서류 집어 봉투에 담는다.

 

소리      다리가 두 개 있는 짐승은 그나마 날개라도 달렸는데, 그중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어찌 잘난 척하든지 날개 대신 두 팔만 있거든? 서 있는 꼴이 너무 안 됐어. 이봐! 피곤하면 누워. 죽는 연습이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아?

 

무대 앞으로 술 취한 민호와 그림자가 나온다. 서류 봉투 들고 있는 민호는 술기운에 휘청거린다. 그림자 역시 분신처럼 행동한다.

 

민호처    여보!

 

화들짝 놀라는 민호. 그림자는 재빨리 민호의 발목으로 달라붙어 바닥에 눕는다.

 

민호처    (시계를 가리키며) 이 과장니임? 오늘은 또 무슨 핑계로 그렇게 바빴수?
민호      구, 국가경쟁력 10% 높이기!
민호처    능력도 좋아. 어떻게 25% 소주 먹고 술주정은 130%야?
민호      (한 걸음 옮기려 하지만 발끝에 놓인 그림자에 묶여 휘청 넘어진다)
민호처    못 말려!
민호      (드르렁 코 곤다)
민호처    부부 컨설팅 혼자 연구하면 뭘 해? (관객 향해) 진짜 문제더라구. 40대 사망률 전 세계 1위! 국가경쟁력? 남편부터 일으켜 세워 줘?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벽이면 아랫배 잡고 벌떡 일어나? (눈 흘기며) 그게 아니고, 망할 놈의 인간이 속 쓰리다면서 혹시 뒷일 모른다고 암보험이나 들어 놓자나? 그래서 그랬지 걱정 붙들어 매라고. 아니, 죽는 사람 많으면 보험회사 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겠어?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마당에 반찬값은 둘째 치고 돈 빠져나가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긴데. 그나마 사는 재미, 뭐겠어? 맨날 나만 샤워하면 뭘 해? 나도 애들 과외비 핑계대고 호텔 아르바이트나 뛸까?

 

퇴장하며 던진 민호처 말꼬리에 민호는 벌떡 일어선다. 그림자도 민호 뒤에 선다. 침울한 민호의 표정이 여러 형태로 바뀐다. 두웅 두웅. 북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민호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분리된다. 혼란스럽게 핀 조명이 민호와 그림자를 번갈아 비추는 순간 그림자가 증발한다. 무중력으로 빨려 들어가듯 부양된 몸짓. 민호는 어찌할 줄 몰라 두 발을 동동 구른다. 바닥에 뒹구는 서류봉투. 민호는 집으려 하나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는다.

 

소리      고통은 늘 새롭고 갈등의 찌꺼기는 늘 오래전부터 남아 있는 것이지.
민호      (입만 크게 벌려질 뿐. 감정 표현이 되질 않는다)
소리      그게 바로 자네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마지막 감각이네.
민호      누구야?
소리      누구? 이야야? (메아리로 되받는다)
민호      (웅크린 그림자 보고) 너무 마셨나 내가?
그림자    생선 시리즈!
민호      너, 이 자식!
그림자    명태는 명예퇴직, 조기는 조기퇴직, 동태는 동반퇴직, 황태는 황당스런 퇴직….
민호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모가질 비틀어 버릴 테다!
그림자    (손칼로 잘렸다는 표시하며 더욱 비아냥) 봉급쟁이 모가진 둘인가?
민호      죽여 버리겠어!
그림자    안됐지만 죽은 건 바로 자네야.
민호      내가?
그림자    증명이야 간단하지. 내가 이미 니 곁을 떠났으니까.
민호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그림자    인간은 말야. 살아 있을 땐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죽음 앞에선 꽤나 논리적이란 말야. 허기사 자위행위 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는 특권이니까. 더구나 평생 봉급만 받고 살던 자네가 생각을 바꾼다는 자체?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지.
민호      누구야? 정첼 밝혀? 노상강도? 밤도둑?
그림자    천만에. 영혼을 빨아먹고 사는 빛의 마술사.
민호      빛의 마술사?
그림자    니 분신? 그림자
민호      부담스럽군. 너 같은 부양가족이 내게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림자    생선시리즈!
민호      이 자식이!
그림자    흥분할 거 없어. 나도 자네하고 한평생 지내왔으니까.
민호      한 평생 살아왔다며 감히 그런 말이 나와?
그림자    네 자신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민호      밥맛없어. 가뜩이나 심란한데?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림자    네가 원하지 않아도 어차피 떠나야 할 팔자네 또 다른 윤회랄까?
민호      윤회?
그림자    질량불변의 법칙이지
민호      그 얘기 알어? 만득아아 꼬르륵! 귀신이 통곡하다가 틀니 빠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림자    (퇴장하며) 여유 피는 거 보니까 아직 인육의 기름기가 덜 빠졌군.

 

그림자가 움직이자 민호도 빨려가듯 스르르 움직인다. 벽을 잡고 버티는 민호. 그림자가 퇴장하기 전에 넘어진다. 민호 역시 연상 작용으로 고꾸라질 듯 넘어진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민호는 주위 둘러보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내뿜는다. 그림자가 떠나니 역시 무중력 상태. 두 팔을 움직여보나 허우적댈 뿐, 감각이 되살아나질 않는다.

 

소리      서 있는 존재는 불쌍해. 날지도 못하는 저 두 팔로 허우적대는 꼴이란? 이봐 척추나 곧바로 세우라구. 그동안 행복이 뭔지 축복이 뭔지나 알고 살긴 산 거야? 갑자기 의심스럽군. 넌 이미 죽었어. 인간의 방향감각이란 그림자라는 잣대가 있어야 하는 법.

 

민호처    여보!
민호      (깜짝 놀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민호처    (서류 봉투 집어 들고) 아니 이 양반이 포장마차 간 거 아냐?
민호      나 여기 있어.
민호처    남들은 승진하려고 컴퓨터니 토익이니 눈이 뻘건데 이 양반은 맨날? 뭐? 술상무 자리가 하나 비었다나? 핑계는?

 

민호는 씨익 웃으며 민호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지만 민호처는 몰라본다.

 

민호처    (허리 틀며) 맨날 샤워만 하면 뭘 해?

 

민호처, 엉덩이 흔들며 들어간다. 장난기가 발동된 민호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린다. 민호처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민호      (까꿍) 나 없다아!

 

민호처는 고개 한 번 갸우뚱하곤 그냥 퇴장한다. 어이없는 민호. 자기 뺨을 때리고 꼬집지만 어찌된 상황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곤혹스런 표정으로 바뀌는 민호.

 

민호      이봐! 이봐! 빛의 마술사! 그림자! 내가 잘못했어. 이리 나와! 널 사랑한다구!

 

그림자가 해골을 들고 나온다.

 

민호      오, 나의 분신!
그림자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나의 분신은 자넬세. 도대체 인간들은 헤어질 땐 아픔을 느끼면서 왜 만날 땐 아픔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민호      이봐 문제가 생겼어!
그림자    (뜨악한 표정)
민호      내 마누라가 날 몰라봐.
그림자    (시끄럽다는 듯 해골을 바닥에 탁 내려놓는다)
민호      (기에 질려) 그게 뭐지?
그림자    네 머리?
민호      (목을 쓰다듬는다)
그림자    (수저로 해골에 담긴 골수를 퍼먹는다) 저승밥이지. 우리가 살아 있을 땐 인간의 수명을 조금씩 깎아 먹고 지내지만 떠날 땐 마지막으로 인간의 골수를 떠먹지. 그래야 이 세상 미련 없이 떠날 테니까? 골수 중에 가장 으뜸은 역시 봉급쟁이 게 최고야. 본젤라또!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단 말야. 약간 비린내가 나서 탈이지만?
민호      그, 그거?
그림자    맞어, 네 꺼.
민호      (머리 쥐어짜며) 으으으, 이봐 잠깐. 이건 인권침해야
그림자    아직도 골이 덜 비었군. (더 박박 긁으며) 명태는 명예퇴직, 동태는 동반퇴직?
민호      이 자식!

 

민호는 그림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른다. 컥컥거리는 그림자.

 

그림자    잠깐! 위치로!
민호      (두 손을 뿌리친다)
그림자    우리 자기 직분에 충실하자구. 아무리? 카악! 골수에도 가시가 있나?
민호      (자기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린다)
그림자    그림자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네. 우리 이렇게 하자구. 자네 목에 손을 대라구 싫으면 손에 목을 대보라구.
민호      (망설인다)
그림자    글쎄 내 말 들어.

 

민호가 자기 목에 두 손을 대자 그림자가 따라 한다. 민호가 목을 누르며 캑캑대자 그림자 역시 똑같은 동작을 취한다. 원숭이 흉내 내서 속이듯 더욱 누르는 민호. 그것도 잠깐 그림자가 미련스럽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다시 골수를 퍼먹는다.

 

그림자    (트름) 꺼억.

 

진지하게 행동하던 민호가 그제서야 눈치채곤 노려본다.

 

그림자    나두 알어. 니가 그런 식으로 맹하게 살아왔다는 걸?
민호      (알아줘서 고맙다는 듯 울먹이며) 그래에, 너두 잘 알잖아 난? 난 앞만 보고 살았어.
그림자    누가 앞만 보고 살래?
민호      앞뒤 가리고 살기 힘든 판에 뒤돌아볼 틈이 있었냐구!
그림자    알어 알어. 그 뒤에서 난 너만 보고 살았으니까.
민호      근데?
그림자    해바라기 인생 다 그렇지 뭐. 한 마디로 안됐어.
민호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마.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림자    그런 감정이 우리 그림자한테도 있었으면 좋겠다.
민호      니들은 몰라? 처자식이 있다구 난! 명예퇴직은 제도적인 살인이지. 엄격히 말하면 가정 파괴범이라구!
그림자    이미 환경오염 딱지가 붙었는 걸? 분리수거가 제도적인 모순이라고 생각해?
민호      빌어먹을 자식! 죽여버릴 거야.
그림자    참아. 그림자 없는 인생? 무얼 뜻하는지 알지?
민호      이봐 난 지금껏 남의 눈에 피눈물 흘려보게 한 적도 없다구? 잘했어 잘했다구 알잖아?
그림자    글쎄, 모르는 것보다 안다는 게 훨씬 괴로울 때가 많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 다신 부르지 말라구 바쁜 몸이니까.
민호      가지 마. 곁에 있어 줘. 잘할게. 앞으로 열심히? 남들한테 더 잘할 수 있어.
그림자    이미 늦었어.
민호      안 돼! 나 해야 할 일이 많다구. 떠나더라도 뭔가 정리해야 할 시간이라도 줘야 되잖아? 처자 두고 이대로 갈 순 없어.
그림자    걱정 말라구.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으니까.
민호      책상 서랍 하나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게 말이 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앞만 보고 그냥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가 당한 거라구.
그림자    천당 갈 거야.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민호      (울먹이며) 하필이면 왜 나야? 난 이제껏 날 위해 살아본 적도 없어. 어둠만이 내 친구였지. 수많은 밤을 너와 고민한 거 알잖아.
그림자    그놈의 불면증 때문에 아직도 피곤해.
민호      당사자인 난 얼마나 지겹겠어.
그림자    그러니 이제 내 품 안에 편히 쉬어? 재워 줄게. 과거의 주머니는 나한테 다 맡기고?
민호      나 죽은 게 확실해?
그림자    그럼 살아 있다는 확신은 있어?
민호      내가 지금 말을 하잖아
그림자    살아 있을 땐 하고 싶은 말 있어도 하지 못한 주제에?
민호      눈을 뜨고 있잖아
그림자    보고 있어도 못 본 척했고….
민호      봐, 니 소릴 들을 수도 있어.
그림자    들어도 못 들은 척.
민호      숨을 쉬고 있잖아. 봐, 심장이 뛰어.
그림자    쯧쯧, 산다는 기준이 뭔데? 안됐어.
민호      그럼, 나 꿈꾸고 있는 거 맞지?
그림자    누워 봐.
민호      왜 그래? (눕는다)
그림자    살아 있는 사람은 허리에 손이 들어가지만 죽은 사람은 빛조차 들어가지 않거든.
민호      ……?
그림자    그림자하고 일대일 비율이면 죽음을 뜻하지. 아이고오!
민호      왜 그래?
그림자    자넨 죽었어.
민호      아냐, 조그만 아파트 하나 구하느라 허리가 굽어서 그래. 다시 넣어 보라구.
그림자    답답하군.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걸 모르더니 결국 죽었으면서도 죽었다는 걸 모르니? 자, 눈 감아. 이제부터 달콤한 어둠이 자넬 지켜줄 거야?
민호      죽은 게 맞나? 갑자기 마음 편해지는 걸 보니 이상해.
그림자    그래, 그런 기분으로 날 따라오면 돼?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잖아.
민호      거기는 어떨까?
그림자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지. 우린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사니까. 누구에게 종속된 그런 존재도 아니구.
민호      아냐 제발! 다시 한 번 기횔 줘!
그림자    기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나 있는 법.
민호      난 죽음을 준비한 적이 없어.
그림자    미련스럽게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도 있나? 우리 그림잔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지 못하게 의미 없는 생을 매듭지어 줄 뿐.
민호      후회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어.
그림자    걱정 말게, 자네에겐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민호      또 그 헛소리.
그림자    기회 달라며? 윤회는 곧 기회를 뜻하지. 내가 먼저 그리 가야 자네가 태어날 수 있다니까.
민호      그러지 말고 나하고 여기 있어. 보너스 타면 너 다 줄게. 그럼 영생할 거 아냐.
그림자    겨울이 가야 봄이 오는 법. 죽음 뒤에 삶, 난 그 진실을 얘기하고 있어.
민호      펭귄이 다이어트한다고 제비 되냐?
그림자    (해골 치며) 빈 수레 요란하다! 잘난 척이 결코 자존심은 아니거늘!
민호      말투하곤 점점 비위 상하게 만드는군? 그래, 네 말마따나 비린 내 나는 속세 떠나고 싶다.
그림자    어때, 죽어 보니까? 사는 건 잠깐이지만 죽는 건 영원하거든.
민호      (신경질적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다!
그림자    아무래도 내가 가는 게 낫겠어.
민호      감정 없는 놈하곤 역시 농담도 못하겠군. 사십 평생 같이 지내왔다는 게 의심스러워. 근데 자꾸 어딜 간다는 거지?
그림자    자네 기록을 가지고 다음에 태어날 후생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잖아.
민호      내 인사 기록?
그림자    그래, 니가 불빛 아래 행동했던 모든 기록을 저장하고 있지. 그게 내 의무니까?
민호      꼭 내신 성적 받은 기분이라 찝찝하군.
그림자    인과의 법칙!
민호      말야 말야 나아? 개나 돼지로 태어나진 않겠지? 난 그들에게 할 말이 없어.
그림자    먹을 입만 있었겠지.
민호      산 입에 거미줄 칠 수야 없잖아 (한숨 쉬고) 발버둥치던 지난날이 생각나?
그림자    그렇게 살아야 했던 이유? 다 기억할 수 있나?
민호      글쎄, 내 아이큐만큼? 닥치는 대로 살았으니까 피부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림자    근육이 풀어지면서 점점 잊혀지겠지.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과 함께?
민호      또!
그림자    어제가 있어야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법.
민호      법, 법 그러지 마. 목을 조이는 그 답답한 법 없이 살아온 내 인생이야!
그림자    알고 있네. 법보다 더 답답한 도덕 속에 자네가 살아왔었다는 것도….
민호      힘들었어. 갑자기 겉늙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자    내 생각에 자넨 겉늙은 게 아니라 겉돌았을 뿐이야. 모순덩어리인 이 세상에서 그 정도 살았으면 잘 산 거지 뭐. (가려고 한다)
민호      어딜 그렇게 간다는 거야? 이봐, 같이 가자구.
그림자    아무래도 그게 궁금해.
민호      ……?
그림자    빛과 그림자 할 일이 따로 있다지만 희한하거든. 이번엔 꼭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민호      뭔데?
그림자    출생의 비밀! 정자 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있는진 몰라도 애들이 국화빵 찍듯 부모를 닮는 걸 보면?
민호      그거야 XY 염색체? 가만 있어 봐? 그럼 그 정자 속에 내가 있는 거야? 혹시? (개 돼지 소리 낸다)
그림자    방귀 뀌다 똥 싸긴. 육체는 부모의 염색체로 유전되지만 영혼의 유전인자는 자기 혼이라 의복과 같아서 자기에 맞는 옷을 늘 갈아입지.
민호      이율배반적이잖아. 부모를 닮지 않는다면?
그림자    공식대로 그 아버지에 그 어머니라면 그 아이가 태어나야 될 텐데 개천에서 용 나오거든. 사람들은 자기 기록 맞는 곳에 새로운 경험을 위해 태어나지.
민호      그 말은 내가 다시 태어나도 그 형식의 틀에 묶여 제도적인 사육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지? 좋았어! 난 죽어도 봉급쟁이는 싫어!
그림자    다음엔 사장 한 번 돼 보라구!
민호      뭐라구? 나보고 중소기업 사장하다 자살하란 말야?
그림자    저러니 만년 과장이지.
민호      내가 왜 사는지 이율 모르겠어.
그림자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않았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은 있으니까.
민호      분명히 너 내 기록 갖고 있는 거 맞지?
그림자    내 직업인 걸.
민호      그럼 가르쳐 줘 내가 누군지? 날 깨닫게 해달란 말야.
그림자    깨달음이 뭔지 아나?
민호      글쎄.
그림자    깨달음의 순간이란 전생의 힘이 와닿는 순간이네.
민호      전생의 힘이라니?
그림자    달마대사가 면벽수도 7년 했다는데, 벽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깨우침을 터득할 수 있을까. 토굴 속에 있던 중이 범종 소리에 놀라 깨달음을 얻었다든가, 기도 중에 은혜를 입었다든가, 그런 소릴 들었을 테지.
민호      ……?
그림자    그때가 바로 과거 힘이 와 닿는 순간이네.
민호      어떡하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그림자    사람이 태어나면 모든 것이 성장하지만 퇴화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네.
민호      그게 어딘데?
그림자    천리안, 제3의 눈이라고도 하는 곳. 눈썹과 눈썹 사이를 인당이라고 부르지. 이 지점의 수평선상. 그리고 우주의 기를 빨아들이며 내뱉는 곳, 어린아이 머리를 만지면 숨 쉬는 곳이 있잖나. 백회를 말하지. 그곳에서 수직선상과 만나는 부분에 송과체라는 것이 있지. 거기가 영혼의 보금자리네.
민호      영혼의 보금자리?
그림자    의학적으로도 사람의 인체 중에 두 가지가 해명이 되질 않았지. 맹장과 송과체. 맹장이 하는 역할은 아직도 해명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들어서 송과체인 송과선에서 멜라토닌이란 생명의 호르몬을 분비하고 지시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불로초를 발견한 셈이야. 천기누설을 알아내다니? 구도자들이 명상하며 선을 하거나 기도해야 하는 곳도 바로 그 부분이지. 영혼이 머물렀다 간 그곳. 그곳에 생각을 깊게 끌어들이게. 그러면 자네 전생도 볼 수도 있고, 미래까지 감지할 수 있다네.
민호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그림자    임산부가 한 번도 먹지도 않는 음식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태아의 욕구일세. 또 있지. 문화의식이나 교육조차 받지 않은 어린아이가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걸 가만히 들어보라구. 전생의 얘길 하는 걸 알 수 있네.
그림자    궁금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자가 엄청난 기록과 정보를 어떻게 수용하는지? 그걸 알면 나도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두웅, 해가 뜨려 한다.

 

그림자    큰일났군. 빨리 가야겠어. 아무튼 자네 불면증 때문에 진짜 피곤해….
민호       이봐, 같이 가자구, 같이 가!
그림자    거긴 자네가 갈 곳이 못 돼. 자네 기록이 지워지기 전에 빨리 후생으로 옮겨야 하니까.

 

둥둥 난타치는 북소리. 그림자는 깜짝 놀라 뛰기 시작한다. 민호가 따라가다 미끄러지듯 벌러덩 넘어진다.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애쓰는 민호. 그러나 이번엔 끌려가지 않고 반발작용에 의해 튕겨나간다.

 

민호      날 두고 너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봐라! 잘났다 그래! 넌 죽지 않아서 좋겠다! 감정도 없는 놈! (울먹이며) 이제 모든 게 끝났군. 결국 혼자가 됐어. 버리는 것보다 버림받는다는 게 이렇게 허전할 줄 몰랐어. 버림받은 우리 애들은 누가 키우지? 조막만한 손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견뎌? 못나더라도 이 애비가 있어야 하는 건데? 왜 하필이면 나지?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구! 아무 짓도 안 한 게 무능력이라면 그것도 죈가? 처자식 두고 비겁하게 살지 않은 놈 있으면 당장 나오라 그래! 그래, 난 떳떳하게 살았어. 떳떳하게 살았다구! 우리 애들이 날 이해할까? (누워서 펑펑 운다)

 

해가 뜨고 무대가 밝아진다.

 

민호처    오늘따라 이 양반이? 여보!
민호      (꼼짝하지 않는다)
민호처    여보!
민호      (손가락 움직여 본다. 민호처와 시선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난다)
민호처    북어국 끓여 놨어요.
민호      당신?
민호처    왜 그래요 또?
민호      아냐. 내일부터 콩나물국으로 바꾸라구. 난 말야. 명태 눈알만 보면 으이!
민호처    아무래도 생활비 쪼개서 내일 당장 보험 하나 들어야겠어요.
민호      아니 죽는 놈 많으면 보험회사 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겠어?
민호처    그럼 술 좀 작작해요.
민호      술? 오늘부로 끊었어!
민호처    그럼 오늘부터 일찍 들어오는 거예요?
민호      근데 말야. 나 혹시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
민호처    어머머, 그럼 같이 샤워하고 얼마나 좋아?
민호      이 여편네가? 서류 봉투나 줘.

 

민호는 주위 둘러보며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호처    (봉투 주며) 뭐 찾아요?
민호      그림자? 아, 아냐.
민호처    금단현상이 심각하네요 벌써.
민호      여보, 혹시 말야. 지금 당장 천당 가는 티켓 하나 주면 당신은 가겠어?
민호처    (웃으며 고개 가로젓는다)
민호      영원한 내 그림자! (왈칵 끌어안는다)

 

길게 늘어지는 두 사람의 실루엣에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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