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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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신문을 펼쳐 든 순간 가슴이 아려 왔다. 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일제의 막사나 감옥에서 그리고 황량한 연병장에서 아버지는 그 얼마나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이태원의 미군부대 내 어느 레스토랑에서 모임이 있었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난 회원들이 뒷이야기를 나누자고 모인 것이다. 스테이크로 유명하다던 그 음식점에서 찍은 사진마저도 어느 결엔가 사라져 버려서 지금은 그 이름조차도 기억할 수는 없다.
미국의 일부를 옮겨다 놓은 듯한 이곳은 출입도 까다로웠다. 초행인 나는 레스토랑까지 들어가는 좌우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 이 부근이 일제강점기의 육군형무소가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형무소 하면 보통은 험상궂은 죄인들로 가득 찬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만, 독립투사나 민주의 가치를 지키려다 투옥된 분들의 의연한 모습도 잊을 수는 없다. 비좁고 차가운 감방이 때로는 애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일본의 쥬오(中央)대학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일제 말엽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이 되었다. 용산에 있는 어느 부대에서 조교로 있던 중, 탈출을 모의하였다. 곧 중국으로 이송되면 곧바로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로 망명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 동지가 동족의 간교한 모략에 빠져서 그만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된 것이다. 모의한 동지 모두가 육군구금소(나중에 육군형무소로 개칭)에서 치도곤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몇 번인가 말씀하셨다. 해방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났는데, 아버지는 그때의 옥중기를 자세하게 집필하여 ‘조선 제22부대 학도병사건(朝鮮 第22部隊 學徒兵事件)’이라는 제목으로 『1·20학병사기(學兵史記)』에 발표하였다.
코에 수건을 씌워 놓고 물을 부어서 숨을 막히게 하고, 좁은 감방에 6∼7명을 넣고는 서로 말을 못 하게 벽과 마주하게 하고, 마실 물이나 세숫물조차도 늘 부족하게 제공하는 등 일제의 잔악한 만행이 적나라하였다. 더욱이 같은 민족으로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모함한 인간의 사악함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대신 붙여진 수의의 번호는 ‘76호’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생을 사시면서 ‘76’이라는 숫자를 가장 혐오하고 기피하셨다.
아버지가 겪으셨을 쓰라린 고통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아 학병사기를 읽는 내내 몇 번이나 가슴을 움켜쥐었는지 모른다. 그때 당한 물고문과 매타작 등으로 아버지의 건강은 많이 나빠져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평생 각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고민되었던 서류 뭉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에 투옥되어 독립을 도모하였던 옥중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고초를 함께 겪으셨던 살아 계신 동지 몇 분들과 독립유공자 신청에 관한 일건 서류를 작성하여 보훈 당국에 제출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미결수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여, 서류를 반려 받았단다.
수년 후 이러한 사정을 안 주변에서는 너무 억울하니 다시 한 번 신청을 하라고 집요하게 권고를 하였다. 그런 호의에 힘입어 이번에는 아버지 단독으로 움직이셨다. 독립운동 모의의 사건 전모가 게재되어 있는 65쪽에 이르는 상세한 내용의 『1·20학병사기』도 어렵게 구해서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객관적 입증 자료 미비로 포상에서 제외되었단다. 총알이 신체에 아주 조금만 스쳐도 참전유공자가 되고, 친일파나 김일성 친인척이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감안해 보면, 아버지의 경우는 공적이 몹시 폄하된 경우는 아닐까! 사건을 몸소 겪은 분들의 진실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가 패망을 하면서 당시의 문서를 소각 등의 방법으로 급하게 처리한 까닭이다. 아버지는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줄을 대어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기록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셨으나 허사였다. 일말의 근거도 남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병상에서조차 남기신 마지막 수필은, 「독립무공자의 변(獨立無功者의 辯)」이다. 경직된 보훈 당국의 처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한때나마 노욕에 북받쳐서 미망에 빠졌던 일을, 앞서 간 옥중 동지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 남은 생애는 떳떳한 독립무공자로 사시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나는 유품을 정리하면서 남아 있는 서류를 발견하였지만, 더 보강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다시 제출한다 해도 돌아올 대답은 이미 정해진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겪었던 진실은 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떳떳한 독립무공자의 자손임을 긍지로 여기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