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18
0
내 펜에는 작은 구멍이 피리처럼 나 있다
펜대를 타고 흐르는 바람이
펜촉에 내려와 칼날처럼 번뜩인다
지구 위에 수없이 나서 죽은 인류의
들숨과 날숨이 들어 있는
바람은 생명이다
그 생명으로 나는 시를 쓴다
만세 전 지구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탄생은 예고되었나니
그때부터 불던 바람이
나의 출생과 더불어
강물에 앉은 달빛처럼 출렁이더니
내가 띄운 종이배와 함께
흐르고 흘러 이 세상 몇 바퀴나 돌았을까
내 작은 꿈이 난파되어
제갈매기처럼 꺼이 꺼이 울며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 펜대를 흐르는 것은
펜촉에 매어달린 저 눈물겨운 활자들이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우주의 정처없는 에트랑제가 된다
어느 삶인들 고단하지 않은 삶이 있으랴
어느 인생인들 슬프지 않은 인생 있으랴
어느 길인들 나그넷길 아닌 곳 있으랴
나 남루하여 가진 것 아무것도 없어도
펜대 한 자루 피리처럼 간직하고
천년 학처럼 고단한 삶과 슬픈 인생을 노래할지니
노래바람 되어 우주를 돌고 돌아 또 다시
만고에 태어날 누구의 펜대를 울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