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12월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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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추적추적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세상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며 아직 추스르지 못한 내 마음을 아프게 휘갈겨댔다. 사위는 적막하기만 했다. 비에 젖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툇마루 밑으로 찾아 들어 꼬박꼬박 졸린 눈을 깜빡였고, 이따금 한 무리의 참새들이 비를 뚫고 후드득 처마 밑으로 날아들 뿐이었다.
장대비는 늦여름에 찾아온 장마의 서막이었다. 거의 한 달에 걸쳐 오락가락 비를 뿌려대면서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몰고 왔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잠식하자 태양은 자취를 감춰 버렸고, 바람 한 점 없는 고요는 마음속에 내재된 두려움을 가중했다. 전국을 영향권에 두고 제주도를 거쳐 서해안으로 진로를 잡았다는 태풍은 그 위용을 과시하며 인간에게서 재산을 빼앗고 목숨도 앗아갔다. 자연의 위엄 앞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다행히 태풍의 주경로에서는 벗어났지만 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는 실개천이 금세 황토물로 철철 넘쳐났다. 그 바람에 개천 쪽에 자리한 우리 사과밭으로 누런 흙탕물이 흘러들어 나무 밑동까지 삽시간에 물이 차 버렸다. 막 붉은빛을 띠기 시작한 사과들이 비바람에 툭툭 떨어졌다.
나는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그날의 기억 때문에 두 팔로 동그랗게 감싸고 앉아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차라리 거친 바람이 세상을 집어삼켰으면, 태풍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으면…. 그러면 모든 것이 그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누구도 답해 주지 않는 물음을 던지며 나는 세운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한 달 전, 사과 열매에 여리여리한 연둣빛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방학이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방학이 무색하게 학업과 취업 준비로 정신없는 고3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여유를 부려보고 싶어 토요일에는 오전 실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미리 약속해 두었었다. 바로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렜다.
“은실아, 내일은 언니캉 사과밭에 일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아버지가 은호를 무릎에 눕힌 채 부채질을 해 주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툇마루에 둘러앉아 저녁상을 물린 직후였다.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였다. 때마침 옆집 아재가 우리 집 양철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대문이 끼익 우는 소리를 냈다.
“여보게, 낼 농약 칠라는데, 품 좀 살 수 있겠나? 이파리에 진딧물이 잔뜩 낐어.”
아재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사과 봉지 씌우기와 시나브로 밭을 점령하는 잡풀, 그리고 새로 출시된 과수용 농약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여름이 되자 사과밭은 잡초와의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었고, 병충해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사나흘에 한 번씩은 농약 냄새가 마을을 훑고 지나갔다. 예외 없이 아버지도 불과 이틀 전에 우리 밭에 농약을 쳤는데, 냄새로 두통이 나서 종일 힘들어했었다.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마당이 부산스러웠다. 선잠을 깬 나는 빼꼼히 방문을 열어보았다.
“은실 아부지요, 요새 농약 치고 병원 신세 지는 사람들이 많대요. 저 옆 마을에선 아예 며칠째 자리보전하고 있는 사람도 있답디다. 당신, 조심하이소.”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등에 대고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방수복으로 무장한 아버지가 한 손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바쁜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해가 올라와 더워지기 전에 후딱 일을 끝내야 한다며 아재도 뒤따라 잰걸음을 놓았다. 이어 사과밭에서는 농약 분무액이 새하얀 연기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들어오기 전에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부엌에서 콩나물 익는 냄새가 났다. 여름이면 차갑게 식힌 콩나물국이 자주 상에 오르곤 했는데, 약간의 청양고추를 송송 다져 넣어 칼칼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냉콩나물국은 여름에 자주 먹는 우리 집 단골 메뉴였다.
아침 햇살이 처마 끝에 걸리자 일을 끝낸 아버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움직였더니 시장하다며 목 뒤에 둘렀던 땀수건을 빼서 손으로 툴툴 털었다. 이마의 땀을 마저 훔쳐낸 아버지는 수건을 빨래통 안으로 던져 넣고 수돗가에서 조심스레 방수복을 벗었다. 나는 은색 대야에 물을 받아 주었다. 작업복에 묻어온 약 냄새가 코를 훅 찌르며 스쳐 갔다. 나는 콜록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한쪽 다리를 휘청하더니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부엌에서 어머니를 돕던 언니가 냉국을 한 사발 들고 와서 아버지에게 건넸다. 후루룩거리며 국물을 마시는 아버지 안색이 왠지 검어 보였다.
평소 같으면 토요일엔 하릴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오전 실습을 마치자마자 영화 약속을 접고 곧장 집으로 왔다. 어젯밤 아버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툇마루의 낡은 선풍기만 혼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사과밭에 간 모양이었다. 햇빛에 달아오른 얼굴을 선풍기 바람에 몇 번 갖다 대다가 옷을 갈아입고 밭으로 향했다. 그때 검은 새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지르며 홱 날아갔다.
“으앗! 깜짝이야. 저놈의 새가?”
멀리 날아가는 새에게 한껏 눈을 흘겨 주었다.
사과는 어느새 내 주먹만 해져 있었다. 이맘때쯤에는 사과에 봉지를 씌워 줘야 했다. 일손은 부족하지만 이렇게 해주면 사과의 빛깔이 더 탐스러워지고, 따기 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준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은실아, 열매 떨어질라. 봉지 잘 씌워야 된대이. 사다리 오르내릴 때 안 다치게 조심하고. 알아들었나?”
평소 차분하지 못한 내가 영 미덥지 못한지, 아버지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주의를 시켰다. 사과나무 수령이 십 년이 넘다 보니 모두 키도 크고 가지도 벌었다. 가지 끝은 손이 닿지 않아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콩나무를 타고 구름을 통과하여 하늘 궁전에 도착하는 내용이었는데, 나도 사과나무를 타고 올라가 궁전에 다다르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만약 그곳에 진짜로 간다면, 다시는 내려오지 않으리라 꿈꿨다.
물론 그건 나의 헛꿈이었다.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이리저리 들고 옮겨 다니느라 부러질 것처럼 아픈 두 다리와 두 팔이 나의 현실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나무 끝에 달린 사과를 올려다보며 봉지를 씌우노라면 목이 빠질 것처럼 뻐근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려 옷이 금방 눅눅해졌다. 나만 빼놓고 영화 구경에 빠져 있을 친구들이 생각나 괜히 심술도 났다. 힘든 마음에 이러쿵저러쿵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애써 달래 주며 말끝에 조심하라는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나 조심하이소. 식전 댓바람부터 약 치더니, 낯빛이 별로 안 좋은데….”
한두 해 하는 일이냐며 괜찮다고 아버지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농사라는 게 때를 놓치면 허탕을 칠 게 뻔한 일이라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아버지도 나나 언니가 사과밭에 나오는 날이면 유독 말이 많아지곤 했다. 아버지는 과수원 일에 딸들을 동원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부를 사기도 어중간한,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네댓 마지기의 사과밭이라 급한 대로 가족끼리 꾸려 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인부를 살 만큼 살림이 넉넉하지 않다는 속사정도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되는 바였다.
아버지 나이 오십에 얻은 늦둥이 은호는 세 살이 되고부터는 사과밭에도 곧잘 따라다녔다.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아서 풀꽃도 따고, 떨어져 뒹구는 사과 열매를 주워 모아 한 줄로 세우며 자동차 놀이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가 일하는 사과나무 주위를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돌아다니기도 했다. 두 팔을 벌리고 등을 구부려 엉거주춤한 걸음새로 새가 나는 흉내도 냈다. 그런 은호를 바라보는 아버지 입가에는 주름 사이로 연신 미소가 흘렀다.
어머니가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며 은호 간식을 챙기러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했다.
“막걸리도 한 병 챙겨 오게. 오늘따라 와 이래 목이 칼칼하노. 은실아, 너거도 좀 쉬라. 엄마 따라 집에 갔다 오등가.”
아버지는 말을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을 따라 사과나무에 노란 봉지꽃이 피어났다.
잠시 쉬라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던 일을 멈추고 밀물처럼 사과밭을 빠져나왔다. 집은 밭에서 불과 몇십 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일하다가도 두어 번씩 다녀오곤 하던 터였다. 은호와 둘만 남은 사과밭에서 아버지는 평소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버지의 콧노래가 여운처럼 길게 뒤를 따라왔다.
한낮이 정점에 이르자 햇빛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피부에 와 닿았다. 발갛게 익은 얼굴을 식히려고 선풍기 바람의 강도를 최대로 높였다. 언니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놓고 챙이 더 넓은 모자로 바꿔 왔다. 나는 주전부리를 오물거리며 툇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사이 어머니는 은호의 간식과 얼음물을 싸고 아버지의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도 챙겼다. 얼추 채비가 끝난 것 같았다.
“억!”
굵고 짧은 외마디 소리가 숨을 멎게 한 건 바로 그때였다. 툇마루에서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분명 우리 사과밭에서 난 소리였다. 간식 보따리를 내팽개친 어머니가 사과밭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뒤따라 달음박질쳤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심장이 마구 두방 망이질을 해댔다. 짧은 거리가 우주만큼 멀게만 느껴졌다. 발을 멈춘 곳에서 우리는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사다리와 뒤엉켜 쓰러져 있는 아버지가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침이 흘러나오는 입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의 몸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언니와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정신없이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의식 없이 경련만 보일 뿐 아버지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은호를 보고 우리는 경악했다. 넘어진 사다리 끝에 몸이 짓눌린 채 깔려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할 때 항상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는 전지가 위의 뾰족한 끝이 은호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은호가 누워 있는 자리에는 벌건 핏물이 배어들었다. 하얗게 질린 어머니가 손을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은호를 천천히 받쳐 안았다. 피를 멈춰야 했다. 그러나 살을 찌르고 있는 가위 때문에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소맷자락이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고 손가락 사이로는 선홍색 어린 피가 뚝뚝 떨어졌다. 들릴 듯 말 듯한 신음과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숨소리가 애를 끊어놓았다. 어머니가 은호 얼굴에 뺨을 대고 오열했다.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검게 얼룩졌다. 우리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와 은호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제초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재가 비명을 듣고 뛰어오더니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차가 다급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와서 읍내 병원으로 우리를 싣고 갔다. 응급실 입구에 서 있던 흰 가운의 남자들이 아버지와 은호를 눕힌 간이침대를 재빠르게 병실 안으로 밀고 갔다. 곧바로 구호 조치를 받은 아버지는 꼬박 하루 밤낮을 산소호흡기를 낀 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의식이 돌아오는 듯 겨우 눈을 떴다. 아버지가 마른 입술을 떼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은호는? 은호는… 어디 있노? 별일… 없제? 어?”
은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게다가 넘어지는 사다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어린 은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을 받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급기야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였다.
재차 은호의 안부를 묻는 아버지 앞에서 나와 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파리한 얼굴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머리는 온통 헝클어진 채 병상 끄트머리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농약 중독이었으나 조치했으니 곧 회복될 거라는 말끝에 은호는 며칠 더 지켜봐야겠다 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말을 끝내자마자 의사는 돌아서려 했다. 어머니가 입술을 깨물며 의사의 옷자락을 잡았다. 은호의 예후에 대해 더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장담할 수 없다”며 시선을 떨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의사를 보고 은호를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가, 이럴 수는 없다며 살려 내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다가 아버지는 눈이 풀린 채 뒤로 털썩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고개를 떨군 의사는 문을 나갔다.
아버지는 일주일을 병원에서 더 머무른 뒤 퇴원했다. 의사는 이삼일 더 입원하기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쩍 수척해진 얼굴에 두 볼은 움푹 패어 있었다. 병원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새 더 작아져 한없이 처져 있는 어깨와 힘없이 내딛는 발걸음이 위태롭게만 보였다. 불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검불과 다르지 않았다.
집에 온 후로 아버지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갔다. 겨울나무처럼 물기 없이 말라 갔으며 애초부터 청력을 상실했던 사람처럼 불러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 은호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은호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알아듣기 힘든 말을 웅얼거리다가 넋을 놓고 먼 산을 응시하기도 여러 날이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온 마을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는 데, 어스름녘이 되어서야 사과밭 뒷산 산모롱이에 털퍼덕 주저앉아 있는 것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을 비비며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내가 죽어야… 은호를… 살릴 수 있어.”
아버지의 나직한 중얼거림 속,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 그 한마디가 총알처럼 귀에 와 박혀 나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재는 아버지 볼 낯이 없다며 여러 번 우리 집을 찾았다. 그날 아침에 농약만 안 쳤어도 이런 사달은 나지 않았을 거라며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숨막히는 하루가 또 다음 하루로 이어지기를 몇 차례, 조각달이 서둘러 초저녁 하늘에 걸렸던 그날은 저녁상을 가운데 두고 방 안 가득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나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치만 살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버지는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며 벽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사고가 있던 날의 자초지종을 물어오는 어머니를 거절하지 못해 아버지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낮은 한숨이 새 나왔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가 느릿느릿 입을 떼기 시작했다. 왜 농약 중독을 의심하지 못했는지, 어지러움을 가볍게 여겼는지, 아버지는 자책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다리가 하필이면 은호를 덮친 것도 자신의 불운이라 탓했다. 아버지는 울먹였다.
“내가, 은호를, 살려 놓을끼다. 반드시….”
목소리에서 까슬까슬한 쇳소리가 났다. 검게 탄 아버지의 투박한 손등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웅크린 어깨는 오랫동안 가늘게 떨렸다. 어머니는 충혈된 눈으로 아버지의 흔들리는 등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거푸 가슴만 쳤다. 나는 문지방 너머 멀찍이 앉아서 오른손 검지로 애꿎은 방바닥에 동그라미만 그려댔다. 그러다가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만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나는 밤길을 달렸다. 지난날의 평범했던 그 일상 속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며칠이 지났다. 보름을 앞둔 이지러진 달이 어둑한 밤이었다. 종일 거북하던 속이 결국 밤중에 화장실을 불렀다. 한밤에 이불 밖으로 나가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화장실은 마당 건너편에 있어서 밤엔 좀 무섭기도 했다. 버텨보다가 할 수 없이 아랫배를 움켜잡고 방을 나왔다. 노란 달이 불그스레한 달무리 속에 잠겨 있었다. 짧은 순간, 흡사 우물 속에 퐁당 빠진 바위 같은 우리 마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데다가 둥글게 실개천이 굽이쳐 흐르는 마을의 생김새가 꼭 달무리 속에 잠긴 달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눈을 뜨고 마당을 뛰어가다가 무심히 사과밭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뜻 우리 밭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는 검은 형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가 떴다. 틀림없었다. 분명 뭔가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연이어 들려오는 정체 모를 울음소리는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화장실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튿날, 여명이 비치기도 전에 깨질 듯 양철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재의 갈라진 목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깨뜨렸다.
“은실 엄마요. 빠, 빨리 좀 나와 보이소. 크, 큰일났심데이. 아, 은실아 부지가, 나무에….”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어머니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아재가 말을 더듬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아버지는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랑채에 늘 신고 다니는 아버지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직감했는지 어머니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파자마 바람으로 신발을 끌며 아재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사과밭 뒤에 있는 야산을 향해 질주하듯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왠지 모를 불길함에 가슴이 쿵쾅거려 왔다. 사과밭에서 사고가 났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대문을 들어서는 아재의 등에 축 늘어진 아버지가 업혀 있었다. 어머니가 터덜터덜 그 뒤를 따랐다. 무표정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한 걸음씩 내딛는 어머니의 발걸음이 모래주머니 수십 개를 매단 듯 무겁게만 보였다. 언제 벗겨졌는지 모르 게 맨발인 어머니의 품에는 아버지의 낡은 운동화가 꼭 안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고 누군가 아버지를 하얀 천으로 덮었다. 차갑게 식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어머니는 오열했다. 미동도 없는 아버지를 흔들어 깨우기를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결국 어머니는 실신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마을을 울렸다. 경광등을 밝힌 경찰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경찰관은 아재와 잠시 수군대더니 하얀 천 안의 몸체를 살펴보다가 다시 천을 덮었다. 이어 머리를 가로내젓고는 터벅터벅 마당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뒤돌아선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에 불을 댕겼다. 하얀 담배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십여 일이 지나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째깍대며 분침을 돌리고 있는 손목시계와 가지런히 꽂혀 있는 손때 묻은 책들, 여전히 방 안 가득 아버지의 온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내가 벽에 걸린 옷가지와 선반 위의 소지품들을 내려 상자에 담고 있을 때, 책상을 치우던 어머니가 열린 서랍을 마주한 채 그대로 얼어 있었다. 손에는 접힌 자국이 나 있는 쪽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 쪽지로 눈을 돌렸다.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아 은호에게로 이어지기를 바라오. 먼저 떠나는 나를 용서하기 바라오.’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활자들이 내 눈에서 흔들거리다가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어머니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쪽지가 갈지자를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툇마루에 놓여 있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정적을 깨는 일순간의 외침이었다. 나는 눈을 훔치고 얼른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다급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은호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어요. 놀라운 일입니다.”
의사는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희망적인 신호라 했다. 이틀 전만 해도 차도가 전혀 없으니 면담을 한 번 하자는 병원에서의 연락이 있었기에, 그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울음 끝에 일어난 어머니는 과수원으로 달려가서 아버지와 함께하던 나무를 붙잡고 또 울었다.
하루가 지나고 은호는 눈을 떴다. 아직은 희미한 빛이지만 뭔가를 의식하고 있는 눈빛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의식을 회복해 갔다. 아버지가 떠나고 한 달이 넘어서였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기적적인 일입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아이를 살린 것 같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의사는 말했다. 어머니는 눈물만 흘릴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을 맞추고 참새 입 같은 입술을 달싹이는가 하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은호를 끌어안고, 어머니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은호 아부지요! 은호 아부지요….”
어머니는 같은 말만 되뇌며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아버지가 죽어서 은호를 살렸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랬을 것 같았다. 산 너머 외딴 마을 어디에선가 그 시원은 알 수 없지만, 태곳적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 속 이야기를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악운이라 하더라도 한 집에서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는다는 그 전설 속의 이야기를 아버지는 신앙처럼 믿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오면서 숨소리 하나까지 마음에 다독이며,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알고 있었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울음은 울음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해 쏟아내는 애절한 마음인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여명을 은호가 이어가리라 굳게 믿었던 것 같았다.
제법 선선해진 밤공기를 덮고 나는 모처럼 일찍 단잠에 들었다. 한잠을 잤는지 밤중에 설핏 잠이 깼다. 옆에서 어머니와 언니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는 척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언니는 여기를 떠나자고 했다.
“떠나고 싶으면, 니는 언제든 떠나도 된다. 엄만… 안 떠날란다.”
어머니 목소리는 나직했으며 단호했다. 어머니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목을 가다듬고 수분 이야기며 못난이 나무에 대해 차례로 말을 이어갔다.
수분 이야기는 나도 잘 아는 일이었다. 지난해였다. 봄에 사과꽃이 피면 벌이나 나비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꽃가루를 묻혀 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비가 너무 자주 와서 그런 과정이 수월하지 못했다. 그러자 조바심이 난 아버지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일일이 붓으로 꽃가루를 묻혀 주었다. 아버지가 한 마리 벌이 되어 수고로움을 자처한 까닭에 사과밭은 풍성한 가을을 맺을 수 있었다.
못난이 나무 세 그루에 얽힌 사연은 처음 들었다. 가지도 잘려 나가고 줄기도 제멋대로 구부러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못난이 나무라고 불렀다. 늘 봐 오면서도 사과만 따 먹었지, 왜 그렇게 됐는지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머니는 회상했다. 처음 사과나무를 심었을 때, 다른 묘목들은 뿌리를 잘 내렸는데 그 나무들은 시들시들하니 말라 갔다고. 그러자 아버지는 한 그루도 놓칠 수 없다며 이웃에 자문도 구하고 과수에 대해 공부도 했단다. 그래서 여러 날 잠도 설쳐 가면서 기어이 살려 놓은 것이 그 세 나무라 했다. 비록 여러 개의 가지가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겪으면서 못난이가 되었지만, 녀석들도 아버지의 정성을 아는지 해마다 유독 달콤한 열매를 안겨 주고 있었다.
사과밭에 갈 때마다 “내 새끼들, 이쁘고 고맙데이” 하면서 나무줄기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주곤 하던 아버지였다. 가지마다 옹이가 박힌 그 못난이 세 나무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저 나무들은 바로 너거 아부지야. 난 사과밭을 보면 니 아부지를 보는 거 같어. 사과나무는 아부지의 피땀이야. 눈물이고.”
어머니는 말을 이어가던 도중 두어 번 콧물을 훌쩍이거나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병석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가 허약한 할머니와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물려받은 땅은 손바닥만 했지만 타고난 성실함을 밑천으로 차츰 땅을 불려 나갔고, 십여 년 전에는 그 땅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나보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던 아버지가 터를 잡고 지금의 사과밭을 일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으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딸을 내리 셋이나 낳고 할머니에게 모진 소리도 참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 마음을 다독인 사람은 아버지였다고.
하긴 서너 살 때까지 내가 서운이로 불렸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삼대독자였다. 그 이유로 오매불망 손자만 기원하던 할머니의 감정이 온전히 내 이름에 투영되었던 게다. 다행히 아버지가 ‘은실’로 출생신고를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난 진짜 서운한 아이로 기록될 뻔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지성기도도 무색하게 내 밑으로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할머니는 손자 한 번 안아 보지 못하고 동생이 태어난 그해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상념에 잠기듯 어머니의 조용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할매 때문에 속상할 때도 많았제. 그때마다 니 아부지가 내를 살짝 뒤뜰로 부르는 기라. 그라곤 뒤춤에서 들꽃 한 다발 내밀면서 씩 웃어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속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들꽃 한 다발이라는 그 부분에서는 목소리에 촉촉한 물기마저 감돌았다. 그런 아버지를 이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촉촉한 목소리가 오히려 구슬프게 들렸다. 나는 자는 척 옆으로 돌아누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때 그 밤 사과밭으로 들어가던 검은 그림자와 연이어 들리던 울음소리, 이튿날 뒷산에서 싸늘하게 발견된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밤새도록 눈물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던 언니가 나를 보더니, 자는 밤에 뭘 그렇게 많이 먹어댔냐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언니를 향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수돗가로 가서 은색 대야를 끌어 당겨와 물을 퍼 담고는 찬물로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물이 대야 밖으로 마구 튀겼다. 물속에 어려 있던 차가운 기운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뻑뻑하던 눈두덩이가 시원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닦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아랫배가 빵빵해지도록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선선한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산바람으로 부푼 내 몸이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과꽃은 이미 져버렸지만, 바람에서 하얀 사과꽃 향기가 묻어났다.
태풍이 물러가자 피폐해진 사과밭만 남았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밭을 보고 어머니는 몸져눕고 말았다. 이러다가 어머니마저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무척 걱정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과수원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재가 사과나무 다 썩어버리겠다고 총총걸음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를 보고는 길게 한숨만 내쉬더니 이내 발길을 돌렸다. 아재는 우리 밭으로 가서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이 잘 빠지도록 고랑을 타 주고 부러진 가지를 주워 한쪽으로 쌓아 놓았다. 내가 보아도 우리 사과나무는 꺾이고 휘어져서 엉망이었으니, 아재가 조바심을 낼 만도 했다.
그러기를 사나흘, 자리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끙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필사의 몸부림 같았다. 부엌으로 간 어머니는 가스불에 국을 데우고 찬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끈을 질끈 묶었다.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고무장화도 꺼내 신었다. 노란 장화가 무릎까지 올라왔다.
사과밭으로 간 어머니는 낙과를 밖으로 던져버리고, 처진 가지는 줄기에 기대 묶어 주고, 휘어진 줄기는 지렛대를 대서 바로 세워 주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어머니의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그런 어머니가 애잔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도도 되었다.
태풍에 맞서 살아남은 사과들은 바람과 햇살을 받아먹으며 잘 익어 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우리가 마음의 열병을 앓는 동안에도 사과는 스스로 제 몸을 붉게 달구고 있었던 게다. 사과처럼 어머니의 낯빛도 서서히 생기를 되찾아가는 듯했다.
잔인했던 여름도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과도 깊고 붉은 향기를 더해 갔다. 어머니는 바구니에 물 한 병을 담아 집을 나섰다. 나도 뒤따라 발걸음을 맞췄다. 밭 입구 쪽에서부터 이파리를 따는 어머니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햇빛을 가리는 이파리를 사과로부터 따줘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새 한층 탐스러워진 사과가 늦은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나무 가까이 갖다댔다. 왠지 나무에서 사과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익숙한 그 향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냄새였다. 가을 사과는 첫서리를 맞아야 제 맛이 나는 법이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순간, 사무치도록 아버지가 그리웠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어머니에게 내 슬픔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작정 사과밭 안쪽으로 달렸다. 얼마 후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춰 선 곳은 못난이 나무 아래였다. 목이 메어왔다.
‘아! 아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때이르게도 제법 붉어진 사과 몇 알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팔을 힘껏 뻗은 다음 사과 하나를 따서 바지춤에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한입 가득 베물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혈액을 타고 한순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사과 한 알 한 알에 담긴 지나온 계절들의 노고와 가슴속 아린 상처가 꿈틀거렸다. 투박한 손등 위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눈물과 가늘게 떨리던 그 어깨가 생각나서 나는 사과와 함께 울음을 씹어 삼켰다. 마치 장난치듯 세 딸의 이름을 빌려 못난이 세 나무를 부르곤 하던 아버지가 장난처럼 내 옆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무를 꼭 끌어안았다. 따스했던 아버지의 온기가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졌다.
사과 하나를 더 따서 옷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볼록해졌다. 아버지의 손을 잡듯 주머니 속에 든 사과를 꼭 쥐고 어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여전히 사과 꼭지 주변으로 나 있는 이파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사과를 꺼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고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잠시 쭈뼛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이거 말이야? 아빠 선물이야.”
일손을 멈추고 어머니가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찡긋하며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다며 피식 웃어 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건넨 아버지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쥐고는 한동안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과에서 눈을 뗀 어머니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늦은 오후의 완만한 햇살을 머금어 볼그레해진 어머니의 두 뺨이 발갛게 익어 가는 사과 빛깔과 오롯이 닮아 있었다.
이어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다. 태양의 붉은 기운이 나뭇가지 끝에 내려앉았다. 산란된 빛무리가 사과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과알 속으로 투과되었던 빛은 다시 향기로 피어났다. 은은한 사과꽃 향기가 발끝을 간질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거기 아버지가 한 그루 사과나무로 서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