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12월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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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가면 뭔가를 뒤지는 일이 잦다. 딸은 도둑년이라는 옛말은 녹슬지 않는다. 내가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자꾸 옛것이 사라지고 잊히는 것 같아, 추억될 만한 것이라든가, 혹여 돈 될 만한 골동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유품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검은색 궤짝 안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책과 문서들이 많았다. 한 시가 적혀 있거나, 관혼상제의 의례가 적혀 있기도 했고, 누런 종이에 교지로 보이는 문서에는 큰 도장이 꾹 찍힌 예사롭지 않은 물건도 있었다. 진작에 좀 일찍 고문서에 눈을 떴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하곤 한다.
엿장수의 수레에 실려 떠난 오래된 책들과 교지 같은 문서는, 버려진 종이가 아니라 사실은 한 집안의 영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뿌리처럼 버텨 남겨진 건 족보와 목판 인쇄본, 곽재우 장군의 전기가 가문의 자랑처럼 보존되어 있다. 잃어버린 서책 중에는 한문이라 어릴 때는 제대로 읽어 낼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시를 필사한 것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 생활사의 교본이라 일컬어지는 『미암일기』나 『묵재일기』도 이런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것을 지키지 못한 무지가 안타깝다.
뒤늦게 옛것이 소중하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나의 뿌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할머니께도 묻고 고모께도 물었다. 아버지가 소학교를 다닐 때, 할아버지는 보릿고개가 힘들어 일가 모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본에서 무슨 건축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한학이나 하던 조용한 성격의 아버지가 건축이 맞았겠는가. 일본에서는 근대화 붐이 일어 그 당시 건축이 가장 유망했던 모양이다. 시인 이상이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한 것만 봐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된다. 이상은 『오감도』라도 지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지게 하나도 혼자 만드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참 이이러니한 일이었다.
해방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곧 터진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중공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포로의 가장 큰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타지를 두려워하던 아버지는 시골 마을 이장을 도맡았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는 계몽이었으므로 시골 마을에도 계몽 정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실현된 것이 서울 학교와 농촌 마을의 자매결연이었다. 서울의 ‘정화여자중고등학교’란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 학교는 지금 실업계 특성화 고등학교로 변모해 있었다. 이장댁인 우리 집 사랑방에 ‘마을문고’가 그 학교 이름으로 설치되었고, 장식장처럼 생긴 신식 책장이 놓이고 책들이 들어왔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절반은 한문과 혼용된 책들이었고, 세로쓰기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여학교에서 보내온 책들이니 거의 문학지나 시집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내가 국문학을 공부해 보니, 그 잡지책이나 시집이 잘 보존되었다면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자료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아직도 시골집 앨범에는 머리를 땋은 서울의 여고생들과 동네 사람들이 찍은 기념사진이 있다. 예쁘기만 한 서울 여고생도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늙어 갈 것이라 생각하니, 세월이 덧없다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흔적은 남은 사진 몇 장뿐이다. 지나온 시간의 골짜기를 가만가만 더듬어 본다. 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고생시켰다는 기억밖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 추수를 하거나 담배 수매를 해서 돈을 좀 만질 때면, 버스 정류소 뒤를 따라 죽 늘어선 서울옥이나 부산옥으로 아버지를 찾아 기웃거려야 했다. 그리고 어느 해는 말리던 황초 굴에 불을 질러 농사 지은 엽연초 담배를 다 태우기도 했다.
그런 나도 아버지가 가신 한참 뒤에야 아버지의 흔적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곤 앨범을 뒤적이다가 뜻밖의 사진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포로 생활 때여서 당연히 북한에서 찍은 것으로 짐작했다. 그 사진 뒷면에는 ‘용초도에서’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용초도’라는 지명을 찾아보니, 뜻밖에도 남해 한산도 앞의 섬이었다. 이리저리 검색한 끝에 용초도가 거제도 이외의 또다른 포로수용소였음을 알아냈다. 원래는 북한군 장교 포로를 수용하던 섬이었다. 정전 후 그들을 돌려보내고, 교환된 국군 포로를 다시 6개월간 억류시키며 사상교육을 했다. 이러한 용초도는 아버지의 젊음과 귀향을 가둔 또다른 철창이었다.
이 낡고 빛바랜 사진 몇 장에서 아버지를 환히 이해하게 되었다. 성장기에 너무 많았던 시대적 시련이, 술의 힘을 빌린 아버지를 그리 거칠게 만들었으리라. 전쟁이란 소용돌이 속에서 한 치 앞의 삶도 보장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아버지를 맨정신으로 살지 못하게 했으리라.
사람도 시간도 비워질수록 더 충만해지는 걸까. 70년 지난 사진이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아버지를 미어터지도록 만나게 해주었다. 빈자리는 공허하지만, 그 공허가 빛을 받아들이는 창이 되어준 것이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는 늘 그리운 존재들이 흙 속에 감춰진 진주처럼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다. 사랑방 바닥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담뱃불 자국들은 불씨 흔적이 아니라, 화석처럼 박혀 있는 아버지의 고뇌였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지나고 나면 소중하게 느껴지고 뒤돌아보게 된다. 매캐한 냄새와 누렇게 빛바랜 시간 속을 걸어가 본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남겨진 옛 물건은 추억과 역사라는 이름 아래 박제되어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마음 한구석에 그리움이 불어오는 날엔, 그때 그 시절의 고향 하늘을 따스하게 되감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