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봉윤

책 제목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12월 176호

조회수607

좋아요1

햇살이 제법 따가운 초가을 오후, 화방사 고갯마루 게재에 있는 분청자 가마터 근처에서 사금파리를 찾느라 이밭저밭 두렁길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화방골에 살고 있는 상현이 형님이 뭔가를 들고 “동생, 이거 한 번 봐보게. 이게 뭔고?”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움에 눈이 환해졌다. 도지미였다.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그릇 밑에 받치는 점토로 만든 둥글납작한 도구로, 도침(陶枕)이라고도 한다. 이게 나오면 가마터가 확실하다는 증거다.
도지미가 발견된 땅두릅을 심어 놓은 밭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돌담 위에서 분청자 파편과 또 다른 도지미를 찾고 행복해하는 나를 보고 마을 주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재는 바람이 세게 분다. 참게만 넘나드는 게 아니라 삼봉산과 망운산 사이로 강진만과 광양만을 통과하는 바람길이라, 바람이 출퇴근할 때는 제법 바쁘게 분다. 샛바람에 대숲이 서걱거리면, 고갯마루에서 중장비 조종사 일을 하는 김 사장의 컨테이너로 가서 믹스커피를 마신다.
이번 기회에 믹스커피를 가장 맛있게 마시는 나만의 비결을 알려드리겠다. 잔에 커피를 쏟아 붓고 끓인 물을 부어 천천히 마시면 된다. 뭐가 다르냐고? 나는 커피를 저어 마시지 않는다. 이미 믹스가 되어 있는데, 뭐 하러 저어서 마시나. 그냥 마시면 아주 다양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처음엔 좀 밍밍하지만, 갈수록 달콤해지면서 점차 믹스커피를 발명한 사람을 찬양하게 되고, 종국에는 이걸 대량 생산해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고 만다. 절대로 잊지 마라. 저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커피를 한잔 하고, 지난여름 내렸던 큰비에 갈라진 콩밭 언덕을 살피다가 회청색 분청자와 새하얀 백자가 딱 달라붙어 있는 파편과 마주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일까? 출신 성분이 다른데, 두 파편은 헤어지길 거부하고 그 뜨거운 가마에서 한 몸이 되어버렸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바람 부는 콩밭을 거닐다가, 이다지도 황홀한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말선초가 되면서 청자의 질이 떨어지고, 거친 흙에 자유분방한 디자인으로 간단한 장식을 한 회청색의 도자기가 나오는데, 이를 분청사기라고 부른다. 거친 회청색 태토에 백토로 분을 발라 구웠다고 해서 분장회청사기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품질이 떨어진 못생긴 청자가 백자 화장을 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분청자라고 부른다.
이 분청자를 굽던 가마에서 백자를 만들어 함께 구웠다. 위쪽에 붙어 있는 백자의 때깔이 상당히 좋았다. 분청자에서 백자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물증을 확보한 셈이다. 이날 사기장은 희망과 절망을 양쪽 눈으로 동시에 보았을 것이다. 백자 제작에 성공했다는 기쁨과, 달라붙어 망쳐버린 아픔을 진흙 반죽에 짓이겨 기어이 뽀얀 우윳빛 백자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사기장님 파이팅!’을 속으로 외치며 화방골에서 게재를 넘어 현촌으로 가는데, 한 어르신이 손짓으로 불렀다. 현촌 가마터 근처에서 밭을 일구며 사는 분이었다. 빵도 사들고 몇 차례 오가면서 안면을 터놓은 사이였다. 제법 큰 사발 조각을 건네주었다. 분청자 사발 파편이었다. 내가 몇 시간을 애타게 찾은 손바닥 반만 한 크기에 굽이 겨우 달린 찻잔 조각인데, 어르신이 준 것은 거의 3분의 2가 살아 있는, 애들 얼굴만 한 사발 편이었다. 오백 년이나 지난 쪼가리지만, 내게는 명품 신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것은 거의 100% 깨진 파편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금파리는 대부분 도자기를 굽는 가마 근처의 파기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공방에서는 가마에서 그릇이 나올 때 일일이 검수해 불량품은 반드시 파기했다. 규모가 큰 곳에서는 선별 파기를 담당하는 전문 일꾼을 따로 두었다. 그러니 성한 게 나올 리가 만무하다. 파기 일꾼의 실수를 기대하곤 하지만 헛수고다. 정말 재수가 좋으면 깨진 조각을 서로 맞대어 이빨을 맞출 수는 있을 것이나, 그런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손바닥보다 크면 대박인 것이다.
큰 파편을 준 어르신께 거듭 감사드리니 “허, 깨진 건데 그리 좋은 가?” 하고 물었다. 함박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깨진 파편이라서 이리저리 담고 있는 정보가 많다. 유약과 태토의 품질과 상태를 확인할 수도 있다. 때로는 또렷한 사기장의 손자국과, 눌어붙어 망쳐버린 그릇을 놓고 실망한 사기장의 한숨을 발견하기도 한다.
며칠 뒤, 서당골 청자요지 아래의 대밭에서 제법 커다란 청자 파편을 발견했는데, 부위에 따라 녹갈색과 녹청색으로 색깔이 확연히 달랐다. 같은 흙으로 같은 유약을 발라, 같은 가마에서 한날한시에 똑같이 구운 하나의 그릇이 어째서 부위별로 색깔이 다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불이 잘못됐을까, 흙이 문제였을까?
가마 속에서 켜켜이 붙어버린 청자 사발 파편을 들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해에 사는 친구였다. “내다, 뭐 하노?” 하고 묻기에 내가 “사금파리 줍고 있다”고 답했다. “사금파리? 그게 뭔데?” 또 물었다. “도자기 팍 깨진 쪼가리”라고 하니까, 그게 돈 되냐고 물었고,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뭐 하러 줍느냐고 물었고, 나는 재밌어서 줍는다고 말했다. 내가 “많이 주워 놨는데 한 쪼가리 줄까?” 하고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돈 안 되는 일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청자 쪼가리를 보면서, 이 돈 안 되는 일의 가치를 얼마로 매겨야 할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도자기 파편을 줍다 보면 사기장의 욕망과 좌절의 조각도 함께 줍는다. 손톱자국이 선명한 죽절굽의 청자 파편과, 유약이 서로 달라붙어버린 대접, 설익어 주저앉아버린 주발, 공기가 들어가 부풀어버린 찻잔, 무너져 내린 가마똥이 가득 담긴 사발, 유약 한 번 발라보지도 못하고 초벌구이에서 망쳐버린 뻘건 파편을 비롯해 어느 한 쪼가리도 사연 없는 쪼가리는 없다. 가마를 열고 이런 광경을 마주한 사기장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금파리는 사기장의 땀과 눈물이 스민 노동의 흔적과 실패의 상처를 오롯이 품고 있다. 그릇이 터질까 봐 굽 안쪽 밑바닥을 꾹꾹 눌린 사기장의 손톱자국 위에 내 손톱을 맞대고 지그시 눌러본다. 손끝으로 천 년 묵은 애잔함이 타고 오른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