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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시간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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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학

책 제목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6월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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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헌책방으로 향했다. 도심의 소음이 잦아드는 골목 끝에 서면 발걸음과 생각이 먼저 느려진다. 빛바랜 간판 아래 웅크린 서가 사이에서 낡은 종이의 숨결을 더듬는다. 멈춰 선 시간의 문턱, 먼지를 뒤집어쓴 책 더미 속에서 한 권의 수필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서재여적(書齋餘滴)』 1958년 판이었다. 생각보다 저렴한 값에 그 책을 품은 순간, 지나간 시간까지 내게 왔다. 헌책방에서는 이렇듯 세월이 가격을 낮추고, 기억이 가치를 높인다.
헌책을 고르는 일에는 나름의 요령이 있다. 탐나는 책을 드러내지 않는 태연함, 여러 권을 함께 집어 드는 느슨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한 권만 콕 집어 들면 책방지기는 귀신같이 알아본다. 그 순간부터 책값은 간절함과 비례한다. 주인장과의 보이지 않는 저울질에서 밀리면 흥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나 역시 초보 시절에는 욕심을 숨기지 못해 제값 이상을 치른 적이 적지 않았다. 헌책방의 거래는 결국 기색을 숨기며 팽팽한 심리전을 얼마나 우아하게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헌책방의 진짜 보물은 셈법이 아니라, 기다림 끝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희귀본들은 늘 서가 깊숙이 숨어 있다가, 세상이 문득 궁금해질 즈음 불쑥 얼굴을 내민다. 우연히 다시 마주한 귀물(貴物) 앞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설렘이 인다. 헤어졌던 연인을 낯선 거리에서 다시 만난 듯,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기다림은 헌책방에서 시간을 읽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내게도 그런 인연의 책이 있다. 인사동 ‘통문관’에서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월전 장우성 화백의 『화맥 인맥』이다. 첫 장을 넘기던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당대의 거장 L화백에게 증정한다는 월전의 자필이 단아하게 남아 있었다. 간결한 문장 사이로 두 화백이 나눈 우정의 온기가 은은한 묵향처럼 배어 나왔다. 퀴퀴한 서가 한편에서 과거의 시간이 다가왔다. 책 한 권이 건넨 이 은밀한 마주침은 시공간을 초월한 계시였다.
그러나 그 감동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잔잔한 안타까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귀한 예술의 흔적이 한 세대의 품에도 온전히 안기지 못한 채, 헌책방 서가를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버리는 이가 있으면, 애타게 찾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이 양면성의 묘미 속에서 헌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자리를 옮길 뿐이다.
헌책방에 머물다 보면 현실의 속도를 벗어나 마음의 시계추도 한결 느려진다. 책이 세상에 나와 내 손에 닿기까지 견뎌온 세월만큼, 시선 또한 그 깊이를 닮아 문장을 다시 마주한다. 같은 책을 읽고도 청년기와 장년기에 느끼는 울림이 다른 이유다. 낡은 페이지에는 세월이 곰삭은 향기가 배어 있다. 발품을 팔아 찾아낸 이 안식처가, 앞으로도 이 속도의 시대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헌책방이 도시의 자부심이 된 먼 나라의 풍경이 떠오른다.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데벤테르(Deventer)에서는 매년 여름, 아이젤 강변을 따라 도서 축제가 열린다. 수많은 고서점과 시민, 세계의 애서가들이 책을 매개로 느린 시간을 나눈다. 그 풍경은 부러움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그곳에서 헌책은 과거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도시의 시간이 켜켜이 이어져 온 흔적이다. 책과 시간이 함께 숨 쉬는 그 공동체의 모습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시 우리네 헌책방으로 이어진다. 빠른 흐름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천천히 축적된 시간의 결이다. 헌책방, 그 결이 밀려날 때, 사유 또한 머물 곳을 잃는다.
헌책방은 기억이 소멸되는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기억을 덧입히는 시발역이다. 그곳에서 책은 소유를 넘어 사유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 지금 내 손에 머문 서적들이 금전적 자산은 아닐 터이다. 설령 이 책들이 내 삶 이후에 안개처럼 흩어진다 해도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또 다른 누군가의 서가에 다시 꽂혀, 그의 사유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헌책방에서 나는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읽는 법을 배운다. 과거의 지성과 조용히 교감하며 세월이 켜켜이 쌓인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나의 미학은 어느새 삶 속에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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