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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아

책 제목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6월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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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맞은 가지마다 끝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몸은 기지개를 켜고, 가느다란 끝에서 꽃봉오리가 한쪽 눈을 슬쩍 뜬다. 따뜻한 햇살과 촉촉한 빗물이 멈춰 보였던 나무에 새 숨을 불어넣은 것일까. 나도 작은 순간을 놓칠세라 온몸으로 봄을 맞고자 한다. 지금 여기서 세밀한 느낌을 놓치지 않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 마치 멈추지 않고 가지를 흔들며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향나무처럼.
꽃나무의 떨림을 묵묵히 바라보는 향나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들떠 있냐고 꾸짖는 듯하다. 향나무는 가지마다 묻어나는 향이 있다. 오래된 의연함이 배어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향긋하다. 구태여 꽃을 피우지 않아도 자주 가깝게 다가서고 싶다. 꽃나무가 몇 번의 봄을 피워 냈는지, 향나무는 굳이 헤아리지 않는다. 변화의 파동 한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사철을 견디면서 제 계절을 살아간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의젓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화려한 쪽으로 쏠린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어지고, 찬탄의 탄성이 꽃망울처럼 퍼진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꽃나무는 닫혀 있던 꽃봉오리를 더 힘차게 피워 올린다. 빛을 받은 꽃잎이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도 함께 흔들린다. 그 곁의 향나무에는 눈길조차 머물지 않으면서.
향나무는 자기만의 향으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뿐. 누구나 한 번쯤은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어 할 텐데. 향나무는 휩쓸리지 않는다. 그것은 화려한 날을 위해 평범한 날을 견뎌온 것이 아니다. 평범한 날 자체가 자신의 전부임을 알고 있기에.
향나무는 봄만 아는 나무가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낙엽이 흩날리는 쓸쓸한 날에도, 눈이 쌓여 가지가 휘어진 날에도 온몸으로 향내를 품고서 자기만의 자리를 지켰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날들이 쌓여 저토록 사철 푸르름으로 섰는가. 탄성도, 카메라도 없었던 그 긴 나날들. 가장 단단하게 자아 성찰로 다져온 내공을 켜켜이 쌓는 과정이리라.
꽃나무와 향나무를 바라보던 그날, 내 안에서도 두 계절이 겹쳐 있음을 느꼈다. 눈부신 순간을 좇는 마음과, 아무 말 없이 하루를 채워가는 또 다른 마음. 서로 부딪치며 반대를 향했지만, 그 마음은 내 속에서 오래전부터 한 몸처럼 공존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평범한 주말, 친정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의 굳은 얼굴과 짧은 한숨이 맞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대답 대신 화만 내셨다. 안방엔 눈가에 멍이 든 엄마가 누워 있었다. 이마에는 주먹만 한 혹이 솟았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넘어졌다고 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아간 엄마는 긴급으로 수술했다. 쇄골뼈가 부러졌으니까. 그날부터 일상은 조용히 어긋났다. 한 번도 밥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챙기는 딸들의 분주함.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고, 집 안은 적막이 돌았다. 매일 같던 평범한 날에 금이 생겼다.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 없다. 하지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버지는 딸들의 손을 빌려야 했다. 반찬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리고, 혼자 남은 집을 청소했다. 매일 방문할 수 없어 아버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드렸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는 방금 들은 것도 이미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것을 매일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이른 아침밥을 짓고, 보이지 않는 곳을 청소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모든 자리에 작은 손길로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김이 식기 전에 내어놓던 밥상처럼. 엄마의 하루가 얼마나 많은 일들로 채워졌는지. 그동안 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모든 평범함이 집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손끝의 반복이 우리를 살게 했으므로.
돌아보면, 나도 역시 늘 꽃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화려한 날들을 꿈꿨다.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 향나무처럼 묵묵히 남아 있는 것이 싫다.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길 바랐다. 날마다 특별한 일로 가득 채워지길 원했다. 밋밋한 일상은 기억에서 흐려지는 한 조각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를 버티게 해준 건 화려한 날들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차려 내던 밥상.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다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혼자만이 감당했던 일들. 그 하루들이 향나무처럼 내 삶의 자세로 쌓여 있었다. 화려한 날을 위해 견딘 순간이 아니라, 그저 나답게 버티면서 살아냈음이 나를 만들고 있었던가.
지금도 향나무는 그 자리에 있다. 꽃나무 옆에서 변함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겠지만, 오늘도 나는 향나무 앞에 멈춰 선다. 오늘따라 유독 깊게 보이는 푸르름, 그 아래 화려한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 사이로 봄빛이 스민다. 그 빛 아래서 나도 혼자서 새롭게 숨을 고른다.
결국, 특별한 날은 오지 않았다. 다만 평범한 하루의 끝이 남았을 뿐. 온몸으로 향기를 품은 향나무를 다시 올려본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 곁에서 누가 나를 살포시 감싼다. 조용한 하루가 향나무에 걸린 봄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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