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6월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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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한파가 오기를 부리던 겨울, 나는 비겁한 도망자였다. 삶의 무능을 더는 견딜 자신이 없어 떠난 걸음이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가 신청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함께 간 친구들은 더없이 설렜지만, 나는 타다 만 장작처럼 거무죽죽한 몰골로 따라나선 봉사 활동이었다. 캄보디아는 아득히 멀었으나 내 짐은 전에 없이 단출했다. 배낭 하나면 충분하다 싶었다. 자책과 무기력에 짓눌린 무게만으로도 이미 나는, 휘청대는 청춘이었으므로.
캄보디아의 날씨는 한국의 초여름 같았다. 매서운 날씨에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던 한국의 겨울과는 다른 열기에, 가슴속 응어리마저 스르르 녹는 듯했다. 감정의 변화마저 사치라고 여겼던 그늘진 마음에 한줄기의 볕이 드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인 시엠립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지만,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던 청춘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시엠립에 도착해 앙코르와트를 처음 마주하던 순간이었다. 완벽한 좌우대칭이 빚어내는 장엄함, 사원 곳곳에 묻어 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경이로움으로 똘똘 뭉쳐 다가왔다. 한낱 인간 따위가 지닌 번뇌를 비웃기라도 하듯 압도하는 풍경에 들숨과 날숨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아, 내가 이것을 보려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작은 손이 삐죽 나를 반겼다. 아이였다. 여섯 살이나 되어 보였을까. 초콜릿 같은 피부색. 다쳤는지 살짝 절뚝이는 왼쪽 다리. 작고 깡마른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어 댔다. 휘어진 한쪽 다리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해맑던 미소가 꽃같이 아름다웠다. 고마웠다. 한낱 이방인인 나에게 귀한 웃음으로 행복을 선사한 아이가, 그래서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가방을 뒤적이려 고개를 돌린 그 몇 초 사이, 작고 아름답던 나의 행복은 사라지고 없었다. 신기루를 본 듯 아쉬움만 남은 걸음은 곧 군중에 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것은 저녁 급식 봉사 시간에서였다. 동화 속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재연한다면 과연 이런 광경일까. 어디가 끝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줄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분명 준비할 때만 해도 없던 인파가 어디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것인지 궁금할 새도 없이 아이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영양소라고는 탄수화물이 고작일 것 같은 그 볶음밥을, 아이들은 금덩이를 받듯 받들고 자리를 떴다. 아이들은 제각각의 모양과 크기를 가진 비닐을 들고 왔다. 그리곤 그 비닐에 밥을 담아 갔다. 식판을 두고 왜 비닐에 밥을 받는지 물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에게 가져다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아이들은 밥을 받아 제대로 먹지 않았다. 두 숟갈 남짓을 입에 넣은 아이들은 아쉬움을 그렁그렁 매단 채 길을 떠났다. 저 아이들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대부분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는 곳에서 온다고 했다. 목이 멨다. 밥을 많이 퍼 주기 시작했다. 혼이 났다. 저 줄이 보이지 않느냐고, 당신이 당장 눈앞에 베푼 호의가 누군가를 굶게 할 수 있음을 모르냐는 날선 말이 귓가에 날아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삶의 질 따위는 따질 새가 없는, 이 순간의 생존이 급급한 이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조금씩 얼굴을 뒤덮음을 인지한, 그때였다. 그 아이가 나타났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이 느리던 아이는, 그래서인지 한참 뒤 순서로 줄을 선 듯했다. 밥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나 저 아이까지 순서가 돌아가지 않을까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하니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제발 다른 이에게 배식받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하늘의 장난일까. 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고, 내 밥통은 이미 텅 빈 채 아이의 그림자만 덩그러니 비출 뿐이었다.
아이가 울먹였다. 커다란 눈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찰랑였다. 덩달아 내 눈도 달아올랐다. 혼이 났다. 함부로 아이들 앞에서 울지 말라는 불호령에, 황급히 뒤돌아선 발걸음이 정처 없이 나부꼈다. 줄이 끊긴 아이들은 꼬박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저녁 배식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찰랑이던 눈물이 가슴에 차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어둠이 내리고, 몰래 싸둔 내 몫의 밥을 들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 단장님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지만, 도저히 그 아이의 눈을 잊고 잠이 들 수 없었다. 다리가 아파 멀리 가지 못했을 거란 내 예상처럼 아이는 근처의 쓰레기 더미 옆에 새끼 고양이처럼 잔뜩 움츠려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방인에게 이곳의 밤은 위험했다. 다른 아이들이 본다면 이 아이 또한 위험해지리라. 그래서 어둠 속 그림자처럼 잔뜩 웅크린 채 재빨리 비닐에 쌓인 밥을 아이의 품에 내던졌다. 쫓기듯 내달린 걸음으로 숙소에 도착한 나는 아이가 무사히 허기를 달랬길 기도할 뿐이었다.
그 아이를 세 번째로 본 것은 아이들을 씻기는 곳에서였다. 아이는 어젯밤의 그 갑작스러운 손님이 나인 줄 알아보는 듯했다. 수줍은 듯 미소를 피워내던 아이는 나에게 줄을 서 몸을 맡겼다. 이곳에서의 목욕은 방역이었다. 아이들은 소독약으로 씻김을 받았다. 몸 곳곳을 점령한 벌레를 소독약으로 죽이고, 알코올 향이 가득한 샤워젤로 쓱싹 닦이는 것이 샤워의 전부였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공산품처럼 아이들은 차례로 밀려왔다.
그렇게 사흘간의 여정 동안 그 아이는 늘 내 주변을 머물렀다. 간혹 눈이 마주칠 때면 꽃 같은 미소로 언제나 웃어 주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의 손에는 풀잎으로 만든 반지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수줍은 듯 반지를 내밀었다. 감사했다. 불편한 다리로 풀잎을 뜯으러 다녔을 그 마음이, 작고 헤진 손으로 풀잎을 엮었을 그 시간이.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1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생각했다. 돈이니까. 구걸이 흔한 이곳에서, 돈이라는 것을 알아볼 테니.
그런데, 내가 달러를 쥐여 준 순간,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손에 쥐어진 화폐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에는 어떠한 찬사도 읽히지 않았다. 구걸이 일상이었던 캄보디아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소녀는 우연히 가지게 된 이 작은 행운의 흔적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휴대폰 속 카메라를 켰다. 이 순간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요를 가르는 셔터음 소리에 아이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표정과 얼굴을 가리는 듯한 손동작. 앵글 너머로 아이의 강력한 불쾌의 의사를 읽는 순간 나는, 두 볼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관광객의 값어치를 셈하지 않았던 아이를 마주한 우연. 혹은 이방인에 대한 감사를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표현한 아이의 순수함에 대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아이의 진심을, 그 힘겨운 살아냄의 지난함을 한낱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나는 소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사흘간의 여정에서 마주한 하층민의 삶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머나먼 곳으로 도망치더라도 결국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우리, 그리고 타인으로 살고 있는 나였음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이토록 먼 곳까지 왔어야만 했는지를 깨달았다. 이곳이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 속에서. 내가 무엇을 찾아야만 했었는지도.
이방인의 우연한 시선은 결국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라는 것. 그리고 그 하루를 살고 있는 이에겐 그 평범함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인생 그 자체라는 것을. 소녀의 사진을, 나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다시 꺼내 보지 못했다. 행여나 아이의 마음에 내가 생채기가 된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몸서리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떠올린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타인은 결국 껍데기를 달리한 또 다른 ‘나’라는 사실을.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평하지 않는 겸손함. 그 마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아가기 위해, 삶이라는 이 멋진 여정에 우연이란 표지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햇살이 차오르는 싱그러운 아침, 여전히 나는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간다. 지금 여기, 함께 걷는 당신이 오늘 나의 우연이자 또 하나의 필연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