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유혜자 수필문학상 2025년 8월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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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포유류는 땅을 딛고 일어나면서 손을 사용하는 인간이 되었다. 다른 동물에게 없는 ‘두 손’ 덕분에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되어 거친 들판을 일구었다. 운하를 파고 자기를 굽고 악기를 만들었다. 손으로 만든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며 자신과의 관계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극적인 인간의 손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볼 수 있다. 창조주의 손가락과 거의 맞닿은 인간 아담의 손가락은 생명을 부여받는 환희의 순간을 표현하지만 두 손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틈이 있다. 완전한 교감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그 후 예술가들은 인간의 손을 더 자주 보고 이야기했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에서 생을 남겨 두고 떠나는 자의 돌아보는 손을 조각했다. 노동하는 손을 승화시킨 뒤러의 기도하는 손, 기사의 손에 우아한 감정을 담은 엘 그레코가 그린 ‘이야기하는 손’ 등은 예술가들이 입이 아니라 손과 손가락이 흉중을 전하는 가장 세심한 매체임을 절감한 증거들이다.
모든 인간은 손으로 생존한다. 자신의 힘으로 숟가락을 쥘 수 있어야 밥그릇을 챙기고, 양로원의 노인들은 제 손으로 숟가락을 쥐는 한 목숨줄을 부지한다. 손으로 밥 먹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다시 만난다.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놓치고 다시 잡기를 되풀이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손의 전생(全生)이 사람의 일생(一生)일 정도로 손은 실존의 물음과 해답을 책임진다. 인간 개개인의 여정이 비슷하게 보이지만 돋보기를 들이대면 손의 지문만큼이나 독특하고 개성적이다. 뼛속까지 외로운 섬, 그 쓸쓸함을 견디며 몸부림쳐 온 평생을 손의 지문이 증언한다.
손에 새겨진 지문, 그것은 전생과 현생과 후생의 문양이다. 젊은 날의 열정과 회한이 손가락 마디마다 옹이로 박히면서 아름다운 것은 늘 멀리 있다는 인식도 일깨운다. 손으로 살고 죽는 흔적이 손등 주름으로 얹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달리 손을 아끼고 가꾸게 된다.
작가의 손은 그 외에도 평생 글 노동을 한다. 그는 가슴과 머리에 깃든 생각이 휘발되지 않도록 검지에 힘을 주어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쓰고 물 찬 제비가 날듯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다. 이야기가 책이라는 몸체를 가질 때까지 신체 중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는 것이 손이다. 마침내 ‘도구를 가진 사람’이 ‘글 쓰는 사람’인 호모 스크립투스가 된다. 오랜 타자로 손가락 끝에 통증이 오더라도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손이다. 손의 운명이 그럴진대 작가가 어찌 편안하기를 기대할 건가.
작가의 손은 세상이라는 늪지대에서 살아간다. 왜 사느냐에 대한 목마른 질문을 해갈할 샘물을 긷기 위해 밑바닥을 긁는다. 단애의 토굴에 묻힌 도자기의 역사를 거두기 위해 팔이 위로 뻗는다. 기암절벽의 석청을 따고 검은 석탄층을 캐기 위해 어깨가 괭이질한다. 몸을 지켜 주고 지친 몸을 일으켜 주는 것도 손목이 한다. 그동안에 손바닥과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고 뾰족한 날에 찍히기도 한다. 그것이 손의 숙명이지만, 개인의 상처와 시대의 아픔을 작가의 손바닥이 보듬어야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그 책무와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여가의 쉼표를 찍고, 기약 없는 말줄임표를 넣고, 포기하는 마침표도 찍는다. 그 귀한 손을, 그 손가락의 열정을 그냥 쉬게 할 건가. 작가이므로 ‘위드 작가의 손’의 신분을 지켜야 한다.
문학은 손이다. 뜨거운 불 속이든, 깊은 물속이든, 따지지 않고 뛰어들어 구원해 주는 생명의 밧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손을 독서라는 보험에 들어 줘야 한다. 책 읽기라는 보험은 인간의 정신이 파산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가 독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독자는 작가를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므로 책을 더 진지하게 쓰고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종종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Die stillste Stunde)’은 종이 위에서 연필이 진군할 때라고 믿는다. 옛날 문사가 그랬듯이 글판 위에 팔을 얹고 무릎을 꿇어 수행을 하며 침묵이 말보다 강함을 배울 수 있다. 손은 눈보다 귀보다 더 본능적으로 갖가지 아픔을 꿰어 내고 감싸 안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며 적막으로 두껍게 감싸인 존재를 되살려내야 한다.
손과 글이 살려낼 물상은 어떤 것일까. 하루 일을 마친 농부가 노을을 지그시 응시하는 눈길, 밤을 새워 타르를 길에 까는 일용직 노동자의 발,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받고 흘리는 연인의 눈물, 결승점을 앞둔 선수의 부풀어 오른 장딴지, 홀로 병마와 싸우는 환자의 목덜미, 고독의 무게를 버티느라 벽에 기댄 여인의 어깨, 묵주를 쥔 할머니의 주름진 손 등. 그리고 관 속에 넣어지는 시신… 이들은 작가의 자애로운 손에서 위로를 얻고 싶어 하는 침묵의 존재들이다.
펜을 손에 들고 시문(詩文)을 다투는 세계를 문단(文壇)이라 부른다. 문단은 문단 권력이 아니라 정갈한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문사들의 결사(結社)이어야 한다. 문단을 무림에 비유하는 까닭도 검 하나와 펜 하나로 협객 정신과 선비 정신을 상호 나누기 때문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학자와 문사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다. 이 격언을 가슴으로 읊조리면 촌철살인과 필봉이라는 글재주를 경계할 수 있다. 그 유혹의 계곡을 벗어나면 비로소 작가는 세상을 눈물 젖은 두 손으로 받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용히 손을 자판기에 올려 물상에게 국궁의 예를 올리는 시간을 가지면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작가의 손에 감흥의 기운이 충만하게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