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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페이크, 인공지능 시대에서 수필에서의 허구성 문제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철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고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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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필계에서 수필문학에 있어서 허구성 문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어떠한 명확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감성적인 교류는 물론 시, 수필, 심지어 소설까지 쓰는 시대에 이르렀다. 북한의 김여정이 "줄게, 다 줄게"를 처음 본 사람은 의아해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딥페이크로 만들어졌지만 실제와 구별하기는 어렵다. 이런 인공지능 시대 수필의 허구성을 다시 논의하는 것은 시기적절한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에 관한 논쟁의 시발은 지난 1983년에 있었던 수필가 정진권 씨와 역시 수필가인 김시헌 씨의 수필에서의 허구론 논쟁이었다. 즉, 김시헌이 『수필공원』 1983년 통권 2호를 통해 정진권의 석사학위 논문으로 1980년에 쓴 「수필문학의 이론 모형(理論模型) 연구」라는 논문에서 "수필은 허구일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씀으로써 이 논쟁은 시작되었는데, 이때 김시헌은 「수필과 허구 정진권 씨의 구성론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씨(정진권 씨)는 특히 구성의 문제에 언급하여 수필의 창조성을 위해서 허구가 가능하다는 말을 하였다. 한 편의 수필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체험의 사실을 동원해서 단일하고 독립된 하나의 주제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수필 창작의 경험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하지만 소설과 같이 수필 속에 사건을 설정할 때, 체험의 사실이 아닌 허구로서의 사건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의문이 생긴다.

씨는 앞의 논문에서 수필의 구성을 허구 아니면 사실의 묘사라는 두 가지 구분을 하고 있다. 허구 아니면 사실의 묘사라는 두 가지로만 본다면 수필은 허구에만 창작성이 있고, 다른 것에는 창작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의 묘사란 신문기사와 같아서 작자의 의도나 주관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씨는 체험 그대로를 수필 속에 옮기는 것은 사실의 묘사라고 하였지만, 수필을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의 사실을 신문기사처럼 묘사하지는 않는다. 작자가 나타내려는 주제도 생각해야 되고, 체험의 속에 담겨 있는 철학적인 의미도 정리해야 되고, 표현도 주제가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나타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과정을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허구는 전혀 없었던 사건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주변의 기초 체험을 토대로 해서 있을 수 있는 사건을 상상으로써 작품 속에 만들어 넣는 일이다. 소설의 허구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가 간다. 소설 속에 있는 일인칭의 표현은 작가가 아니고 작품 속의 주인공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수필 속에 표현되는 '나'라는 일인칭은 바로 작가 자신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체험하지도 않은 새 사건을 허구로 엮어서 수필의 내용을 채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씨는 지난날 「귀를 후비며」라는 제목의 수필을 발표한 일이 있다. 이 수필은 상당한 수작으로 독자뿐 아니라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다. 씨는 이 논문에서 「귀를 후비며」의 거의 전문을 게재하고 다음과 같은 창작 과정을 공개하고 있다.

“拙作의 독자들은 이 글 역시 실제적인 체험의 기록인지, 그것들을 수정 보충하여 새로이 조직한 것인지, 이 글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안타까워한 일이 실제로 있다. 성냥개비로 귀를 후비다가 부러뜨린 일도 실제로 있다. 그리고 귀후비개로 귀를 후비며 시원해한 것도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한 일도 없고, 부러진 성냥개비를 욕한 일도 없으며,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한 일도 없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세로 새끼손가락을 어루만지거나,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에 넣은 일은 더구나 없다. 즉 이것들은 허구인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귀를 후비며」라는 수필은 단편적인 평소의 체험을 엮어 모아서 한 줄거리의 이야기를 창작했다는 뜻이 된다.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본 일, 성냥개비로 후비다가 부러져 본 일, 귀후비개로 귀를 후벼 본 일 등 세 가지의 단편적인 체험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각각 제멋대로 따로따로 겪은 체험들이다.
이러한 체험을 한 끈에 엮고, 거기에 다른 부분을 보충하여 하나의 사건, 곧 ‘귀를 후비는 작업’을 창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허구라고 단정지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이니까 분명히 허구가 된다.
씨는 이 허구야말로 사실의 기록이 아닌 창조행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엮어 짠 이 사실은 작가가 알 뿐, 독자는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곧 독자는 그것을 실제적인 체험으로 볼 것이라는 뜻도 된다.
앞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독자가 수필을 보고 있는 상식이다. 독자는 수필을 읽으면서 그 안에 쓰인 사건들이 작가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으로 알고 있다.
소설은 비록 ‘나’라는 일인칭의 표현으로 씌어졌더라도 그 ‘나’는 작중 인물이라고 인정을 하지만, 수필은 그렇지 않다. 수필 속에 나오는 ‘나’는 바로 곧 작자 자신이라고 독자는 굳게 믿고 있다. 이러한 수필의 특성으로 볼 때 허구가 독자에게 주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귀를 후비며」의 경우는 독자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와 작자가 서로 잘 아는 친근한 사이라고 할 때 작자가 꾸며낸 수필 속의 허구를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수필 속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허구로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공개를 한다면 독자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자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이 수필은 허구냐? 체험의 사실이냐?’고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씨가 말하고 있는 수필에서의 허구는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만약 수필도 소설처럼 허구가 가능하다면 직접 체험이 아닌 어떠한 상상적인 체험도 자기의 직접 체험처럼 수필에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 속의 체험이 모두 수필 속에 등장해서 새로운 사건을 구성할 수 있으니까 창조성은 풍부해지고 읽는 독자도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혼을 해본 직접 경험이 없는 사람이 이혼의 고민을 표현하기 위해서 수필 속에 바로 자신이 이혼을 경험한 이야기로 사건을 구성했다고 하자.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그것이 상상으로서 허구임이 작품 속에 암시되지 않는 한, 독자는 그 작가가 바로 이혼을 한 사람으로 믿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저작한 수필집을 읽고, 그 속에 든 내용을 작가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로 믿고 작가에 대한 화제를 교환하는 때가 많이 있다. 수필은 작가 자신의 직접 경험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의 이 강한 상식을 허구는 무엇으로 대답을 해야 될까?
그래서 수필에서의 허구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아야 하고, 만약 허구로 씌어졌다면 그것이 상상적인 허구임이 작품 속에 어떤 방법으로든 암시되어야 한다. 그 암시가 없는 한, 허구는 그 사실을 독자가 비록 모른다 해도 작가는 독자를 속인 결과가 된다. ……
현재 제작되어 나오고 있는 수많은 수필이 발표된 결과만으로는 정진권 씨의 말과 같이 허구인지 실제적인 체험인지 구별이 안 된다. 구별이 안 된다고 해서 이대로 수필에서의 허구 문제를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수필 문단에 하나의 과제로서 제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같은 김시헌의 비판에 대한 정진권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즉 그는 『수필공원』 통권 3호(1983년)에서 「허구와 수필 — 김시헌 선생께 답함」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김시헌의 주장과 비판에 대해 반격했던 것이다.

이 「허구와 수필」이란 글의 일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말한 것은 두 가지 의도에서였다. 첫째는, 수필을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믿는 통념을 부정하자는 것이요, 둘째는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대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필자의 의도가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필자의 견해를 적어 보겠다.

허구의 뜻
우선 이 토론의 기본 개념인 허구의 뜻에 있어서, 김선생과 필자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필자는 위에 든 논문의 각주를 통하여 허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체험을 수정하거나 보충하여 새로이 꾸며내는 일, 또는 그 결과를 허구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의 기록과 대립되는 창조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새로이 꾸며내는 일’은 반드시 소설에서와 같은 사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와 같은 시를 보라. 이 시의 서정적 주체는 한 사내 어린이로 되어 있다. 이 어린이는 성인으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변형(수정)된 시인(김소월의 분신), 곧 허구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일체, 즉 체험의 수정이나 보충, 또는 산실의 변형 일체를 필자는 허구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것은 문학의 각 장르에 보편적인 것으로서 문학의 한 특질을 이룬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런데 김선생의 견해는 어떤가? 선생의 글에서 허구의 뜻과 관련된 부분을 초록해 보겠다.

① 허구는 전혀 없었던 사건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② 주체험이 있고, 그 주체험을 뼈대로 해서 (중략)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충과 수정을 가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의 꾸민 이야기, 즉 허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지엽적인 수정과 보충은 진실을 위한 보강 역할로 볼 수 있다.
③ 한 편의 수필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체험의 사실을 동원해서 단일하고 독립된 하나의 주제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수필 창작의 경험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우선 ①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은 허구를 사건으로 제한한 정의이기 때문에 필자의 정의와는 다르다. 필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체험이나 수정이나 보충(사실의 변형) 일체를 허구의 개념 속에 포함시켰다. 위에 말한 논문의 각주를 참고해 주셨으면 한다.
②의 경우, '주체험을 뼈대로 해서 (중략)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충과 수정을 가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보강 역할로 볼 수 있다'란 말 속에 나타난 허구의 개념은 필자의 정의 속에 당연히 포함된다. 다만, 김 선생께서는 여기서 '주체험을 뼈대로 해서' 또는 '지엽적'이라는 말로 허구의 개념을 제한하셨는데, 필자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수정이나 보충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사실의 기록 모사(모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는 통념을 부정하려는 필자의 의도에 김 선생께서도 동의해 주신 것으로 믿고 싶다.
③의 경우는 여러 체험의 사실을 사실 그대로 나열한다는 뜻인지 새로이 조직한다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라면 당연히 필자가 환영할 바이다. ……
요컨대 김 선생께서는 '독자가 수필의 내용을 사실로 믿으므로 수필에는 허구가 개입될 수 없다(지엽적인 것은 가능하지만)'는 것이고, 필자는 '독자의 그러한 통념을 변화시키고, 허구를 도입함으로써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대해 보자'는 것이 된다. 물론 필자도 수필의 내용을 사실로 믿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잘 알고 있다. 만일 김 선생께서 '나는 이혼을 했다'는 글을 쓰신다면, 김 선생을 아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념이 하루아침에 변화되리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수필문학의 좁은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통념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확실히 변화는 일고 있다. 김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 "주체험을 뼈대로 해서 (중략)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충과 수정을 가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든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지엽적인 수정과 보충은 진실을 위한 보강 역할"이라든지 하는 것은 그러한 변화의 반가운 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허구론’에 대한 찬반 견해
정진권의 석사 학위 논문인 「수필문학의 이론모형 연구」에 나타난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 즉 '수필은 허구일 수 있다'는 주장과 그에 대한 김시헌의 비판인 「수필과 허구 - 정진권 씨의 구성론을 중심으로」(『수필공원』 1983년 통권 2호) 그리고 이에 대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진권의 「허구와 수필 - 김시헌 선생께 답함」(『수필공원』 1983년 통권 3호)과 이에 대해 다시 반격의 포문을 연 김시헌의 「다시 수필과 허구에 관하여 - 정진권 씨의 구성론을 재론함」(『수필공원』 1983년 통권 4호)으로 인해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에 관한 논쟁은 한층 뜨거워졌다.
또한 수필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들의 열띤 논쟁을 지켜보면서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졌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진권 씨와 김시헌 씨의 주장과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옳고 타당한지를 나름대로 판단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각각 밝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술집과 다방 등에서 이 문제를 놓고 자신들의 견해와 주장을 밝히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못했다. 다만 자신들의 견해와 주장을 밝히면서 상대방의 견해와 주장에 대한 비판과 반박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에서 나타난 반응이나 자신의 의견 발표를 보면, 대체적으로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는 반대한다는 입장이 한결 우세한 편이었다. 특히 '수필은 사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해서 쓰는 글'이라고 믿는 많은 사람은 '수필에서의 허구'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역시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 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쪽의 견해가 반드시 옳다고도 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였다.
따라서 이 문제는 뚜렷한 승부(?)도 가리지 못한 채 그야말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다가 1989년경에 이르러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여 '허구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다. 그리고 수필가들의 세미나에서도 이 문제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 8월 25일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월간문학』 출신 수필 작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 동인회 제3회 세미나의 주제는 ‘수필의 벽’이었으나, 발표와 질의 및 토의 과정에서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가 또다시 제기됨으로써 한동안 잠잠하던 이 문제의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 세미나에서 문학평론가이자 당시 배화여전문대 교수인 이유식은 「수필의 벽과 그 극복의 길 - 창작 과정을 중심으로」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수필가라면 때론 허구의 도입이 허용되는지 안 되는지 꽤 고민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평론에 있어서도 이미 이런 점은 공개적으로 쟁점화된 바 있고 또 쟁점화 되어 있는 실정이다. 구성화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이어야 한다는 논리와 필요시 허구의 도입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서 있다. 허구를 일체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자들의 논리는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요, ‘사실의 문학’인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수필을 소설과 대비해서 본다면 우선 그 논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허구의 문학’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듯이,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해서 허구가 조금만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의 문학’이란 개념적 정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수필작법관이라 하겠다.
나는 날로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을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을 창출, 진실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인 허구는 인정해야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고 있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
수필은 비록 ‘사실’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100% 사실 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로뽀르따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만큼 ‘사실의 문학’이라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듯이 ‘선의의 허구’는 용인될 수 있다 하겠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도 아니요 단순한 작문가가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수필 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점화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시헌은 이보다 앞서 『수필문학』 1990년 7월호에서 「허구와 체험의 사이」라는 글을 통해 여전히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수필도 시, 소설, 희곡과 같이 상상에 의해서 창작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체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약속인지 알 수 없지만 작자와 독자 사이에 이어오는 옛부터의 습관으로 되어 있다. 같은 산문인 소설과 희곡은 각자의 체험을 사실 그대로 작품에 옮겨 놓았다 해도 독자는 상상에 의한 새로운 구조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수필은 비록 허구에 의해서 꾸며진 내용이라 하더라도 독자는 허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작자가 직접 체험한 사실로 믿어 버린다.
허구가 아닌 체험 그대로를 수필화할 때도 창작적 상상은 일어난다. 오히려 더 치밀한 의도가 작용해야 될지 모른다.
그것은 체험의 사실에서 주제를 발견해야 하고, 주제가 발견되면 체험의 일부를 주제에 맞게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험의 수정이 전혀 필요 없을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주제와 관련이 없는 체험은 대담하게 생략하기도 하고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부를 첨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첨삭은 수필을 문학으로 만들기 위한 부득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체험의 주된 부분을 생략 또는 수정 대체하는 것은 생각할 문제가 있다. 주체험에 지나친 수정이 가해지면 허구와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문학 일반이 가지는 허구성은 용인된다 해도 직접 체험이 아닌 허구까지도 수용하는 것은 독자와의 약속을 어기는 결과가 된다.
역사소설을 생각해 보라. 몇백 년 전에 있었던 史實의 구체적인 부분을 현대의 사람이 다 알 수는 없다.
당시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직접 체험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소상한 동작과 대화를 기억할 수 있으랴? 그래서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은 史實을 근간으로 해서 나머지 부분은 상상으로 동작과 대화와 작은 부분의 사건을 보충해 넣는다. 그 부분에서 오히려 창작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도 이와 같은 제약을 받는다. 맹장염에 걸려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맹장염으로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상상으로 썼다고 하자.
그 수필을 읽어본 친구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나 “자네 맹장염을 앓았더군. 입원 중에 문병도 못 가고…” 하고 인사말을 건네 왔을 때 필자는 무엇으로 대답할까. “그것은 수필이 아닌가?”로 통할 수 있을까. 수필이 허구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독자의 상식과 믿음을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
그래서 오히려 수필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주제를 위해서 체험을 생략 또는 수정하는 과정이 허구 이상으로 창작적 상상을 요한다는 것을 써 본 사람이면 실감을 한다.

그러나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논쟁은 1990년 11월 3일에서 4일에 걸쳐 충남 온양에서 열린 제8회 수필문학 세미나에서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수필에서의 체험과 허구」라는 주제로 1980년대 들어 수필의 확산과 함께 큰 과제로 부각되어 온 허구의 수용 여부 문제가 집중 토론되었는데, 그 주제가 「수필 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였던 만큼 찬반양론의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온 정진권은 「수필과 허구에 대하여」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수필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 또는 의미로서 한 편의 작품을 창조한다는 뜻이요, 허구는 그 창조를 위한 미더운 수법”이라며 수필이 허구일 수 있다는 종전의 견해를 다시금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허구의 개념을 “체험(사실)의 수정·조립 등 작품의 제작 수법”이라며 문학의 한 특질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수필도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문학작품인 만큼 허구도 용납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 확대를 위해 허구의 과감한 도입까지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 같은 정진권의 허구 옹호론에 대해 수필가인 윤모촌은 토론을 통해 “수필 문장은 진실을 재현하는 것뿐이고, 그런 까닭에 그것은 인격의 표출로 귀결된다”며 수필에서는 결코 허구가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필문학은 “작가 체험의 고백적 자기 현시(顯示)로 사실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쓰이는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만을 강조하여 허구를 도입하는 것은 수필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며, 수필을 말장난으로 빠뜨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 세미나에서 이정림은 「수필에 있어서의 사실과 진실」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허구’와 ‘허구성’을 구분함으로써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 시비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마치 남자가 여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교수가 운전기사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허구’이고, 허구가 아닌 사실 체험에서 그것을 좀 더 진실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 구성상 수정과 보완을 하는 것은 ‘허구성’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수필은 사실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사실의 기록은 아니다”며 수필도 문학인 이상 감동의 전달을 위해 ‘허구성’까지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수필문학에 있어서의 허구성 문제’는 오랜 시일 동안 많은 논쟁이 있어 왔고 아직까지도 논쟁이 계속되며 찬반 견해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발달한 현시대, 딥페이크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수필의 허구성 문제는 재조명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앞서 언급하였던 딥페이크로 만들어진 김여정이 걸그룹 가수처럼 “줄게 다 줄게”를 외치며 몸을 흔들어대는 것은 가짜라는 인식 하에 즐거운 한때를 선사하지만, 때로 딥페이크의 가상 인물이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또 인공지능 등으로 만들어진 아나운서나 연예인으로 인기를 누리며 당당히 아성을 이루어가고 있는 이 즈음 필자로서 허구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수필이 우리 삶의 묘본(苗本)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철저하게 허구나 허구성이 배제되어 수필은 사실을 재구성한 진실한 이야기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만 독자들이 어쩌면 안심하고 삶을 탐구하고 받아들이며 또 성찰하는 도구로서 마음껏 수필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공개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다른 문학과는 구별되는 독특성으로 수필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기도 한 것이다.
특별히 SNS의 발달로 보여주기식 화려함에 치중되어 있고, AI의 발달로 딥페이크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이러한 특성은 더욱 강조되고 보호되어야 할 가치로 부상해야 할 것이다.
기능적인 허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한계나 존재적 한계성으로 무의식적 허구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 굳이 의식적인 허구를 창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은 오염되지 않는 순수의 결정체로서 존재할 때에만 이제 그 존재 의의가 있는 시대가 진정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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