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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지역특집 - 전라북도지회 - 회원 작품(빙하의 침묵 - 스위스 융프라우를 오르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저녁연기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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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동경이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국적을 달리한 나그네가 되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 융프라우는 그렇게 나를 빙하 속으로 이끌었다.

기차와 케이블카를 번갈아 갈아타며 빙하로 올라가는 길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길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대면에서 매우 실망했다. 내가 상상했던 빙하가 아니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끝없이 펼쳐져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면적이어야 했다. 그런데 내 눈동자 안에도 다 들어차지 않는 빈약한 공간이었다. 이상 기후로 점점 녹아가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반가웠던 것은 비록 덩치는 작았지만 그 색깔은 정말 해맑은 옥빛이었다. 그 아름다운 색깔을 어떻게 표현해야 적절할까. 섣불리 어쭙잖은 수식어를 붙였다가는 되돌릴 수 없는 오류를 범할 듯싶다. 고지대라서 눈발이 간간이 흩날리는 탓에 그 색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고결한 빙하 앞에서 감히 색을 논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잡스런 빛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 저런 아련한 빛을 내 안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온전히 내 빛깔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내 안의 얼룩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저 맑은 색깔은 내 안의 얼룩들로 빛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왜 나는 좀 더 맑은 마음으로 살지 못했을까. 온갖 고뇌와 욕심과 병으로 상처 나고 멍들어 버렸을까. 이제 인생을 정리할 즈음인데도 아직 나는 헛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멍한 시간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어떤 것이 이 방황의 터널 속에서 빠져 나오게 해줄는지.

내려오는 도중에 얼음 동굴 체험을 했다. 빙하 속을 거닐어 본 것이다. 정말 빙하일까 하는 마음으로 만져 보니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몇천만 년 전, 이 세상이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모든 생물이 사라졌다고 했던가. 그런데도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나 긴 세월 동안 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다. 어쩌면 차가운 빙하였기에 생명의 씨앗이 보존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그 긴 세월 동안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거대한 빙하의 침묵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내 작은 가슴으로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 인간은 그저 저 거대한 자연 한 자락 어느 모서리에 찍혀 있는 존재일까. 그저 바람결에 흩날리는 먼지 한 점에 불과하리라. 그러면서도 욕심은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구름뭉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을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에게도 빙하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꺾일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한순간만이라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빙하 속에서는 모든 생명이 멈추어 있듯 인간의 욕망도 멈출 수 있겠다 싶다. 그 동안만이라도 지구가 좀 맑아지면 좋겠다 고 상상해 본다.

인간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면서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해맑은 마음으로 살아 보고 싶다. 빙하 같은 옥빛 한 줄기 품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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