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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面놀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경자(마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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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전신을 고루고루 씻어주며 자긋자긋 누르듯이 안마를 하는 것 같았다.

“아이 시원해….”

윤희(允嬉)는 머리를 풀고 샤워기에 디밀다가 갑자기 발작이라도 된 것처럼 샤워꼭지를 돌려 어느 한 지점을 향해 갈겼다.

그곳에는 비닐로 포장되어 붙어 있는 허연 종이가 비명을 지르듯이 바르르 떤다.

<말자 시리즈 1號>

1. 바른말 하되 모나지 말자.  
2. 옳은말 하되 자랑하지 말자.  
3. 겸손하되 간사하지 말자.  
4. 절제하되 인색하지 말자.  
5. 조심하되 겁내지 말자.  
6. 용서하되 타이르지 말자.  
7. 기뻐하되 들뜨지 말자.  
8. 열중하되 탈선하지 말자.  
9. 부지런하되 서두르지 말자.  
10. 억울하되 화내지 말자.

“흠….”

윤희는 코웃음치며 연속으로 물벼락을 그곳에다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저한 위선자니까 뭐 그렇게 새로운 것도 없지만, 하필이면 저걸 여기다 붙여 놓을 건 뭐람! 싫어도 목욕을 할 때나 엉덩이를 까고 앉자마자 눈에 띄니,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저것을 읽고 있으면 금세 변기 밑에서 이무기가 기어 나올 것 같은 진저리가 쳐지고 싫었다. 그러나 윤희는 감히 그것을 떼어 내거나 항변을 하지 못한다.

윤희는 이중인격자인가? 아버지 앞에서 더할 수 없는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아버지 말처럼 ‘천사 같은 내 딸’이 되기 위해 문제아인 오빠와는 질적으로 틀리는 완전품 행세를 해 왔다. 그러나 윤희는 가슴 밑바닥에 있는 오빠보다 더한 반란의 피가 늘 흘러가고 있음을 안다.

졸업시험도 끝났고, 더 공부를 계속하든가 유학을 가든가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했으면서도, 윤희는 능청을 떨면서 짐짓 어두운 품을 잡고 판토마임의 삐에로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가면놀이로 부모님들을 한껏 놀려주고 있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수시로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한낮 한시같이 언제나 말썽을 부리는 아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목마르게 기원하고, 또 아무개 장관의 며느릿감으로 물망에 오른 딸에게는 그 장관 며느리가 되어서 두 내외가 유학길에 오르게 해 달라는 지극히 에고이스트적인 기도를 올릴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성부와 성자의 성신…”의 기도 소리는 집 안을 떠돌며 장식용 액장에 담겨 벽에 걸린 사랑의 기도문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공기에 섞여 구석구석에 귀신처럼 지켜서 있지만, 윤희의 남매는 누구도 성부와 성자를 외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더구나 나가지 않는다.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하다 못해 철철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자식들이 회개하고 신앙심을 갖게 해 달라고 끝없는 기도를 해도 남매는 묵비권으로 그 끈질긴 압력을 물리치고 있었다.

신앙심이 다 우리 집안에 있고나 하면서, 혼자만의 완전 범죄를 은폐한 범인 같은 야릇한 미소를 늘 띄우는 오빠 준호(俊浩)에 동감을 해온 윤희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윤희는 다 좋은데 어째서 신앙심이 없을까?” 하고 고개를 기웃하지만, 윤희는 한마디도 대꾸할 의무를 배제한다.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라구? 온갖 비리를 자행하고 열일곱 가정부를 임신시켜 죽게 했던 악몽 같은 젊은 날은 어디다 단단히 붙들어 매고 시침을 딱 뗀 저 엄청난 사람이 어떻게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태연히 기도를 할 수 있었는지, 윤희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돼 버린 준호는 골라서 그런 식의 죄를 범하면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한다.

“밥은 열두 군데 먹더라도 잠은 한 군데 자랬는데, 너 오빠는 참으로 너무하구나.”

어머니는 윤희에게만 그렇게 푸념했다.

“핏줄은 못 속여요….”

이런 말을 윤희는 늘 누르면서 밖으로 한 번도 못했다.

어머니는 서울 장안의 명문인 K여고 S대 약대 출신이다. 약대 출신이면 하늘의 별같은 존재였던 시절에, 어머니는 그 별이 되어 십여 명의 약사를 고용하고 있는 종로약국의 사장이다. 종로약국의 피부병 전문치료약이 서울서는 첫째로 손꼽혀 밀려드는 손님은 늘상 대기실에 꽉 차게 붐비고 날마다 성시를 이뤘다.

병원 가기가 어려웠던 시절, 약국은 갈구리로 끌어 놓다시피 돈을 벌고, 엄마의 재산은 기하급수로 팽창해 갔다. 그러나 의료보험이란 것이 나오고 병원 문턱이 낮아지고, 타 약방은 점차 세월이 시들해져 가도 종로약국만은 자체적으로 처방조제된 피부치료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불황을 모르고 날로 번창했다. 약국터가 빌딩이 세워지고 백여 평이 약국으로 쓰여졌다. 이층은 한의원으로 개업하여 할아버지가 원장이 되셨다.

어머니는 팔방미인이시고 머리가 비상하여 불굴을 모르고 승승장구하게 성공해서, 고향의 가난한 한의사 아들이셨던 아버지가, 신문지 활자깨나 읽는 사람이면 ‘아! 그 사람’하고 알 만한 유명인사가 되게 밀어올리신 분이 바로 어머니시다. 윤희는 어머니가 어째서 아버지를 저처럼 맹목적으로 사랑하시는지 두고두고 풀려 해도 풀지 못하는 난해한 방정식 같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모종의 사건에 개입되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도, 어머니는 기색 한번 변하지 않고 그 신문기사를 다룬 기자를 불렀다. 불려온 기자는 하루종일 어머니의 끈질긴 추궁에 머리를 흔들고 도망치듯 나갔다.

“증거를 대라. 무슨 까닭에 멀쩡한 사람을 생매장시키느냐? 당신들이 기자면 바로 짚어보는 눈을 가져라. 터무니없는 간계에 놀아나는 당신은 기자 자격이 없다. 앞으로 일주일 여유를 줄테니 증거를 찾고 정확한 사건 경위를 밝혀내지 못하면, 당신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겠다.”

아마 이런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 사건은 그 기자가 아무리 애써도 물적 증거를 잡지 못했고, 따라서 그 기자는 어머니의 예언처럼 고발을 당하진 않았어도 대문짝만하게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하고 신문사를 물러났다.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펴든 어머니의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푸른 기가 돌고 섬광이 번뜩였다. 윤희는 한 번도 본 일 없는 어머니의 표정에 정신이 꽁꽁 얼어붙은 냉각이 왔다.

그 무렵, 윤희 어머니의 일가붙이인 순이(順伊)가 윤희 집에 온 것은 그가 보통 고등학교를 가야 할 땐데 홀어머니가 공부를 시켜 주질 않자 물어서 어머니를 찾아왔고, 어머니는 야간여상에 입학시키고 낮에는 집안일을 돕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공부를 시킬 수 있는데 왜 야간을 보냈나 하면, 그것은 순이가 정당하게 일한 대가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밤 열 시에 귀가하고 늦도록 공부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했다.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장래희망 사항이 확고한 순이를 맨 먼저 반기는 사람은 준호였다. 준호가 대학 2학년 때니까, 그때만 해도 준호는 모범생답게 Y대 영문학과 A학점의 유망생이었기 때문에, 순이는 오빠 오빠 하며 무척도 따랐고, 준호도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 주고 순이를 아꼈다. 그런 순이가 서울 온 지 일 년도 안 돼 온데간데 없어지고, 두어 달이 되어도 소식 한 장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는 “못된 계집애, 그렇게 안 봤더니 나쁜 애로군!” 하면서 이내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없는 큰 사고가 생겼다.

어느 날 밤 자정 무렵, 불길하게 울려대는 전화기를 집어든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수화기를 떨어뜨려버렸다. 순이가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경비정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기고 보니 임신 3개월인 태아가 충격으로 유산되고 하혈이 심해서 손을 쓸 새 없이 사망했다는 거였다. 신원을 몰라 애쓰다가 속에 입고 있는 티셔츠에 약방 이름이 인쇄되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연락해 봤다는 거였다.

어머니는 약사들을 내 사람이라며 무척 아꼈고, 하다못해 허드렛일을 도우러 오는 아줌마들이나 매일 오는 파출부들에게도 모두 자기 사람들로 중요한 몫을 해낸다며 거느린 사람들이 자주 바뀌는 곳은 업체이든 가정이든 반드시 내부에 원인이 있는 법이고, 그렇게 자주 바뀌는 데서 오는 헛갈리는 혼돈과 안정감 없는 상태는 어느 모로나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마음을 곱게 써야 함을 강요하기를 잘 했다.

마음을 곱게 쓰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를 어머니는 큰 생활 신조인 양 부르짖어 마지않았다. 자그마치 20여 명의 내 사람들을 여름 휴가철이면 약방 이름이 인쇄된 T를 입혀 명승고적을 돌고 유흥 자리를 만들기를 잘 했다. 이른바 사기를 돋우고 계속 자기 사람이 되어줄 것을 바라는 처사였다.

시골서 갓 올라온 청주댁은 어찌나 어리벙했던지, 아버지가 식탁에 늘 후춧가루를 상비해라 이르면 고춧가루를 얌전히 대령하고, 고춧가루를 찾으면 얼른 후춧가루통을 흔들어댔다. 고추와 후추가 비슷한 매운기를 동반함을 가려내지 못할 리가 없는데도 늘 그는 요령 없이 행동해도, 어머니는 “처음 남의 집에 나와 오죽 당황했겠니. 순진하기도 하고.” 하면서 오히려 두둔하셨다.

어쨌든 내 사람 우대 작전은 놀랍고, 곱게 쓰는 마음을 본받아 마땅한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윤희는 그것도 가면놀이 같은 아슬아슬한 낭패감을 느끼니, 자식이 부모를 이렇게 불신하는 법도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윤희 남매는 너무 편한 삶이 부모의 고마움이나 인격을 모르고 빗나간 성격으로 사는 애들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순이는 그 티셔츠 때문에 신원이 밝혀진 것이다.

어머니가 징징 짜며 병원으로 달려가자, 그제사 잠이 깬 듯이 아버지는 느릿느릿 거실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준호는 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간 담배를 끼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아들의 시선을 피해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랑의 기도문이 그들을 그윽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이는 유서한 장 남기지 않고 열일곱의 나이로 만신창이가 되도록 찢겨진 몸으로 세상을 떠나갔다. 아무도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윤희와 준호는 알 것 같았다. 순이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사실이 무엇 때문이었나를…. 어머니만 아무것도 몰랐을 뿐이다. 아니, 어머니도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는 알아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아버지를 철옹성처럼 지킬 여자이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신… 그 소리가 집 안에 울리기 시작한 것은 순이가 죽고 준호가 이상해지고 나서부터다. 성당에 나간 지 오래된 이모가 집안에 흙바람이 부는 것 같다며 어머니에게 권했고, 이어 아버지와 나란히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회를 하고 고해성사를 했는지는 몰라도, 준호는 여전히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미친 사람처럼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아버지의 지위와 권세도, 어머니의 넉넉한 돈도 그를 바로잡지 못했다.

준호가 어디에 있다는 막연한 소식마저 끊긴 지가 보름이 넘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성부와 성자를 찾으며 침묵의 기도를 올렸고, 윤희는 준호 오빠를 날마다 기다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너무나 평화로운 상태로 흘러가는 세월에 반기를 들고 실컷 행패를 부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오빠처럼 행동하질 못했고, 그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가면놀이의 탈을 벗어 던지지 못했다.

만장같이 넓은 종로약국 윗쪽에는 어머니가 흰가운을 입고 백조 같은 자태로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심부름하는 용식이가 물뿌리개를 가지고 약국 앞을 흠씬 적셔 네모난 블록이 말갛게 비치도록 씻어내고, 준호가 기르던 발발이 해피가 아버지에 의해 씻겨지고 있었다. 일요일 조용한 아침의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하는 분위기가 어찌 쨍그랑 깨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던 그날도, 아무런 일 없이 무사히 어둠이 내리자 털투성이의 고릴라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준호가 들었다.

마침 윤희의 큰이모가 와 있었다. 그녀는 윤희와 그 아무개 장관 아들과의 혼사를 다리 놓은 장본인인데, 결정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와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은 때, 준호의 흉한 몰골은 찬물을 끼얹듯 단박에 집안에다 시커먼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윤희가 뛰어가 오빠 팔에 매달렸다.

“오빠, 어디 갔다 이제 와. 날마다 오빠만 기다렸는데. 오빠!”

그런 윤희를 한번 등을 토닥여 주고는, 오빠는 아버지를 처참하리만치 비통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얘, 왜 그러고 있니? 집에 왔으면 그 꼴로 그냥 있을 거니? 어서 목욕하고 뭘 좀 먹어야지.”

어머니는 그것이 준호에게 해야 할 최대의 말인 양,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마치 무법자 앞에 선 정의의 사도를 보호하는 식으로 아버지의 등을 밀어 안방으로 들여보냈다.

“얘!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변해도 그렇게 변하니. 부모님은 고사하고 이모에게 인사를 할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그렇게 험한 꼴로 대하는 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냐!”

이모가 보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해괴한 짓을 한다구요? 해괴한지는 몰라도, 나는 파렴치한은 아니에요. 더러운 피가 흐르는 유씨 집안의 자손이고, 더러운 만큼은 더럽게 살지는 않아요.”

“세상에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뭐 더러운 피?”

어머니는 백지장같이 질린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그래요, 더러운 피가 내 몸에 구석구석 흐르고 있어요. 설사 문둥이를 품고 살아도 그 문둥이가 나보다 더 순결할 것 같은, 늘 그런 죄의식으로 나는 나를 포기한 지 오래 됐어요. 그러나 아들이 금지옥엽 사랑하는 나이 어린 애를 그런 식으로 죽게 하는 아버지보단 훌륭해요. 아버지의 가면은 벗길수록 속이 드러나지 않는 양파 껍질 같아 정체를 알 수 없어요. 도대체 얼마나 철저한 가면놀이를 계속 할 건가요? 또 어머니의 돈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어머니도 공범자예요….”

준호는 절규했다.

어느 틈에 방에서 나온 아버지의 손에 한 길이나 길고 굵은 가죽 채찍이 들려 있었다.

“이 자식이 두고 보자니까, 순 백정놈 아냐? 어디다 대고 하는 짓이야. 뭐 네가 좋아하는 애를 내가 죽게 했다구?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나에겐 너 같은 자식은 진작에 없었으니까….”

찌이익 철썩, 탁한 음이 기분 나쁘리만치 길게 나고, 준호의 팔뚝은 순식간에 피가 흘렀다. 그러나 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정이라고요? 그래요. 맞았어요. 사람 잡는 사람 백정 아들이에요. 그래서 더욱 영광이에요….”

입귀가 찢어지도록 조소를 날리는 오빠는 정말로 괴물 같았다.

“여보, 당신 이게 무슨 큰일날 짓이에요? 어서 그것 치우세요. 어서요. 그보다 더한 남들로부터의 악구매리를 말 한마디 없이 물리친 당신이 흥분하시면 안 돼요 여보!”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 뒤에서 껴안았다. 그런 어머니를 밀치며 아버지는 이를 부드득 갈아 부쳤다.

“네놈이 나를 십분의 일도 모른다. 내 유년 시절에는 배불리 실컷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소원이 없었던 시대에 살면서, 내가 어떻게 공부를 했고 어떻게 성장했나를 너는 모른다. 그 당시 내가 깨달은 것은 모나지 않고 변명하지 말고 살면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신념을 얻었고, 그래서 온갖 중상모략을 받아도 묵묵히 나는 사실이 꼭 밝혀질 것을 믿고 살았고, 또 그렇게 사실은 밝혀지곤 했다. 그러나 쉬임없는 악은 계속 나를 괴롭히고 내 자리를 탐냈다. 죄를 다 뒤집어쓰고도 바른 사실을 밝히지 않은 모종의 사건도 결국은 밝혀졌다. 이런 터에 가장 가까운 너희들이 아비를 그렇게밖에 알지 못한다니 기가 막힌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이의 죽음은 나와는 무관하다. 그때 나도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뒷조사를 아무도 몰래 해본 결과, 순이는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오다가 동네 불량배에게 당했고, 충격으로 가출하여 떠돌다가 임신임을 알고 투신한 거다. 내 말을 못 믿겠거든 B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해봐라. 그때의 불량배가 딴 데서 붙잡혀 와서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니까. 네 눈에는 내가 악명 높은 원흉같이 보였는지 모르지만, 내 자리를 탐하여 끊임없이 질투하고 시기하는 혼란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왔나를 네 엄마는 다 안다. 어리석은 건 너다. 모든 것이 넉넉한 분위기에서 얼마든지 편하게 공부하고 성공해야 할 때에, 가당치 않은 편견으로 부모에게 그렇게 없는 죄를 씌우다니! 도대체 하나를 알면서 둘은 모르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놈!”

아버지는 어디에서 그런 격정이 나왔을까. 저승사자도 그보다는 더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준호는 짚단이 쓰러지듯 그 큰 거구의 몸집이 쓰러졌다. 그리고 죽은 듯이 엎디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모두 가면을 벗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윤희도, 가면을 벗은 식구들은 흡사 갓 알에서 깨어난 비둘기보다도 더 해말간 순백의 극치 바로 그것이었다.

엎디어 있던 준호는 비로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흑.”

아무도 말리지 않는 처절한 울음은 끝없이 신선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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