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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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담당 관청에 찾아가 통발을 돌려달라고 하면 오히려 불법 조업으로 몰려 벌금을 부과받을 것이다. 통발을 쉽게 찾으려고 놓은 부표가 단속반원들에게 표적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거금 칠십만 원을 들여 산 통발을 모두 빼앗기자 삶의 의욕까지 잃었다. 물고기를 잡을 수 없어 운영하는 매운탕집까지 타격을 입었고, 낚시꾼들에게 사정해서 물고기를 얻어다 매운탕을 조리할 정도였다. 나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 단속반원들에게 걸리지 않게 어업에 종사하는 방법을 착안했다. 통발을 놓고 부표를 설치하지 않으면 단속반원들이 통발의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통발을 빼앗길 일이 없었다.
나는 문득 갈고리를 생각했다. 통발을 강물 속에 던지고 갈고리를 이용해서 통발을 건지면 단속반이 아무리 강을 오르내려도 통발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굵은 철근으로 갈고리를 만들어 마당에 로프를 길게 펴놓고 통발을 건지는 연습을 해보았다. 로프가 멀리 있어도 의외로 갈고리가 로프를 잘 끌어당겨서 나는 만연의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물속에서도 로프가 갈고리에 쉽게 걸리고 통발이 잘 올라올 듯했다.
군산의 선구점에 연락해서 통발 열 개를 택배로 보내라고 하고 돈을 송금해 줬다. 처음에는 통발의 규격과 사용 방법을 몰라 군산까지 내려가서 선구점 사장과 거래하고 왔는데, 이제는 돈만 보내주면 알아서 통발을 보내주었다.
갈고리와 통발 앞에 묶을 추를 만들고 나는 다시 통통배를 몰고 강으로 나갔다. 강은 강폭이 넓고 길어 비가 올 때 말고는 언제나 천천히 흐른다. 고즈넉한 강가에는 내가 탄 통통배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단속반원은 쾌속정을 몰고 어쩌다 나타난다. 나는 통발을 놓을 때나 걷을 때, 한 번도 단속반원과 마주치지 않았다. 재수 없게 통발에 부표를 달아서 한번 통발을 빼앗긴 것 말고는 단속반원과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20미터에 통발 한 개씩, 총 다섯 개의 통발을 두 곳에 설치하자, 피로가 엄습해 온다. 물에서 혼자 하는 작업이라 그만큼 힘에 부친다. 통통배를 조작하며 통발을 고정해주는 닻을 강물에 던지고 로프가 팽팽하게 힘을 주며 통발을 설치하고 나면 거절로 힘이 빠져 어깨가 축 늘어진다. 두 곳에 통발을 설치하고 나는 통통배를 돌려 조정 연습하는 선착장 옆에 통통배를 대고 강에서 나온다. 이제 삼 일 후에 통발을 건지러 가면 된다. 강가로 나와 풀밭을 보자 어머니는 아직도 바닥에 앉아 있다. 물고기가 담긴 플라스틱 통과 어구를 1톤 트럭에 싣고 어머니께 집에 가자고 했지만, 손사래를 친다. 어머니는 강가에 앉아 있다 아무 때나 집에 오므로 나는 그냥 1톤 차를 끌고 집으로 온다.
형을 잃은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으며 지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삼 년도 안 된 해였다. 아버지는 안방의 아랫목에서 밤낮없이 누워 지냈다. 대소변도 못 보고 밥도 못 먹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미음을 쑤어 입에 떠넣었다. 폐암 말기라고 했다. 담뱃가루를 신문지에 말아 피운 게 원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큰 병원에 입원했다가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사흘 만에 퇴원해서 안방에 누워 지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주 혀끝을 세웠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발 달린 짐승처럼 집 안에 돌아다녔다. 형과 나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이라 일도 안 하고 방에 누워 있는 거라고 여겼다. 아버지는 외양간에 있는 암소가 새끼를 낳아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형과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풀을 베어다 소에게 주고 모깃불도 놔주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두꺼운 담요를 바닥에 깔고 얇은 이불을 덮고 아버지는 송장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얼핏 보니 입에서 침이 흐르고 얼굴은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형도 아버지를 보더니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편하게 방에서 누워 있는데도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눈이 움푹 패어 있었다. 게다가 팔과 다리는 새 다리처럼 가늘게 늘어져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는 방에 눕기 전에는 언제나 지게에 소 꼴을 한 짐씩 지고 왔고, 앞 논의 무성한 피도 모조리 뽑아낸 사람이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지 않았고, 눈도 들어가지 않았고 팔뚝과 다리가 굵직한 사내였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 병원에 다녀온 지 다섯 달만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도 많이 산 거라고 했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때야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때가 형이 초등학교 삼학년, 내가 일학년 때였다. 삼 년 동안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지 않다가 형이 죽자 다시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방에 누워 있을 때보다 더 많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초등학교 삼학년이고 형이 초등학교 육학년 여름이었다. 내년 봄에는 형이 중학교에 간다며 어머니는 한여름에도 남의 집 밭일하러 다녔다. 외양간에 큰 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는 나와 형의 몫이었다. 강가에 나가 억새를 베어 손수레로 실어다 소에게 주었다. 형은 가끔 지게를 지고 뒷산에 가서 칡넝쿨을 한 짐 져다 소에게 주기도 했다.
“이젠 소를 치워야겠다.”
형이 급류에 떠내려가자 어머니는 소를 처분했다. 소는 우리 집의 희망이고 미래 재산인데, 어머니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소부터 치워버렸다. 거간꾼이 어머니께 값을 흥정하고 소를 가져갔다. 외양간이 텅 비자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형이 없어도 혼자 소꼴을 베어 주었는데 이제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는 소를 팔고도 힘이 없어 보였다. 죽은 아버지처럼 밤낮없이 안방에 누워 지냈다. 나는 이러다가 어머니마저 산송장이 되는 게 아닌가 조바심이 났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소를 팔고 자리에 누운 지 닷새 만에 자리를 훌훌 떨고 일어났다. 형을 잃은 슬픔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어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어머니는 그래도 형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죽었든, 어딘가에 살아 있든 그게 형의 운명이고 팔자라고 했다. 나도 슬슬 형이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다 팔잔 겨.”
어머니는 형이 강물에 떠내려간 것이 팔자라고 했다. 형과 함께 떠내려간 아이는 강물이 빠진 둔치의 버드나무 밑에서 발견되었지만, 형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떠내려간 지점부터 강 양쪽으로 4km를 수색했지만 끝내 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과 소방대원들은 형의 시신이 필시 바다로 갔을 거라고 했다. 먼바다로 떠내려갔다면 형의 시신을 찾을 확률은 제로라며 수색 작업을 종료했다.
“이대로 수색을 끝내면 안 돼. 바다까지 가서라도 찾아봐야 해.”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수색을 종료했어도 어머니는 한사코 바다까지 수색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나는 바다까지 수색해도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열흘이 지났고, 그 시간이면 시신이 부패하여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통발을 다 건지고 다시 강물 속에 던져넣자 노을이 강물에 비췄다. 붉은 노을이 강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꼭 물속에도 해가 있는 듯하다. 나는 강물 속에 비치는 해를 바라보며 문득 웅진강을 떠올렸다. 이 강은 유역 면적이 9,885㎢, 길이가 401㎞로 남한에서 낙동강, 한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본류는 장수읍의 수분리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갈라져 진안고원과 덕유산 자락에서 흘러오는 구리향천(九里香川, 34㎞) 정자천(程子川, 30㎞) 등 여러 지류가 북쪽으로 흐른다. 전북의 북동부 경계 지역에 이르러 남대천(南大川, 44㎞)·봉황천(鳳凰川, 30㎞)과 합류하고 옥천·영동 사이의 충북 남서부에서 송천(松川, 70㎞), 보청천(報靑川, 65㎞)과 합류한 뒤 북서쪽으로 물길을 바꾼다. 다시 갑천(甲川, 57㎞) 등 여러 지류가 합쳐 충남의 부강에 이르러 남서 방향으로 물길을 바꾸면서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하고,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古都)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서는 충남과 전북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당서(唐書)』에서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강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赤登津江), 차탄강(車灘江), 화인진강(化仁津江), 말흘탄강(末訖灘江), 형각진강(荊角津江) 등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통통배를 돌려 선착장 쪽으로 달린다. 내가 타고 온 1톤 트럭이 보이고 물 위에 카누가 줄지어 서 있다. 두 번째 통발도 첫 번째 통발처럼 수확이 괜찮았다. 첫 번째 통발처럼 솥뚜껑 같은 자라가 들어가 있었고, 누치와 잉어, 메기, 붕어, 뱀장어까지 잡았다.
통통배를 선착장 옆에 대고 로프로 고정했다. 잡은 물고기가 많아 트럭에 옮겨 싣는데 서너 번 옮겼다. 누치와 잉어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메기와 뱀장어, 붕어와 동자개는 수족관에 넣을 생각이다. 누치와 잉어는 판로가 없고 매운탕도 적합하지 않았다. 누치는 잔가시가 많고 고기가 퍽퍽하고, 잉어는 기름기가 많아 매운탕 맛이 나지 않았다.
“마침 잘됐네. 서울 사는 며느리가 다음 달이 산달인데, 잉어가 그렇게 좋다는구먼.”
집에 도착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얻으러 왔다. 통발을 건지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1톤 트럭에 달려들어 물고기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내렸다. 나는 매운탕감으로 적합하지 않은 물고기를 전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플라스틱 그릇에 물고기를 담아 종종걸음치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인데 물고기를 유독 좋아한다. 메기와 동자개, 뱀장어와 자라만 남기고 나는 물고기를 전부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커다란 누치를 비료부대에 담아가는 사람, 서울 사는 며느리에게 준다며 양동이에 잉어를 담아가는 사람, 뚝배기에 장을 끓여 먹는다며 작은 물고기만 가져가는 사람, 가게 앞에는 어물전을 연상케 했다.
“물고기 때문에 오늘 저녁은 포식하겠어.”
“맨날 얻어만 먹어서 어쩐댜.”
“통발 건질 때 나도 좀 데리고 가.”
“어째 나만 작은놈밖에 없어.”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저마다 한 마디씩하고 자리를 떴다. 공짜로 물고기를 가져가면서도 작은 것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 금방 잡은 건데도 죽었다고 원망하는 사람, 공짜로 물고기를 가져가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자주 물고기를 줘서 그런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기와 겨울에는 통발을 걷어서 집에 보관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때야 물고기가 귀한 것임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는 1톤 트럭을 마당의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수족관에 잡아 온 물고기를 넣는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나눠주자 정작 수족관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그만해도 충분한 양이다. 전에 있던 물고기까지 합치면 메기가 스무 마리, 동자개 서른 마리, 붕어 열두 마리, 뱀장어 한 마리, 자라 두 마리다. 그 외에도 매운탕거리는 냉동실에도 있었다. 일주일 동안 손님 받는 횟수가 스무 번 정도고, 그 사이에 두 번이나 통발을 건지러 가니 오히려 물고기는 풍족한 셈이다. 게다가 우기와 한겨울을 대비해 냉동실에도 충분히 물고기를 저장해 놓았다.
식당에는 낚시꾼들이 가고 아내 혼자 남아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다. 강에 나갔다가 와서 그런지 피로가 엄습해 왔다. 매번 나가는 강가지만 물먹은 통발을 혼자 끌어 올리면 언제나 힘에 부쳤다. 게다가 통발을 건질 때마다 형의 시신이 올라오는 듯해 등골이 오싹했다.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어머니는 강가에 나가 우두커니 앉았다 돌아왔다. 갈수기에는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비가 오면 조용히 흐르던 강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보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강에 나가봐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머니는 강물 속에서 형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물론 환청이었지만 어머니는 강가에 앉아 있으면 형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형이 강물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봤다고 했다.
“이젠 그만하세요.”
“아니다. 분명히 네 형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발요.”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다녀와서도 나는 어머니가 있는 집을 떠나지 못했다. 환청과 환각이 있는 어머니를 두고 객지로 갈 수 없어 나는 집 근처의 공장에서 일하며 어머니를 보살폈다. 안티몬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안티몬은 반도체 재료 등에 쓰이는데 작업공정이 단순하면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주야 2교대 근무인데, 야간을 하면 아침부터 피곤하고, 안티몬이 중독성이 있는 물질이라 이직을 하려던 참인데, 마침 중국산이 저가로 밀려와 공장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이참에 다른 일을 하려고 미련 없이 사표를 썼다. 아내도 그곳에서 만났는데, 내가 사표를 내자 따라 나왔다.
낚시꾼들이 떠난 후로 더는 손님이 없었다. 아무래도 동네 한복판에 있는 식당이고, 4차선 도로에 막혀 동네가 보이지 않으니까 일부러 이곳을 찾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곳이다. 인근 농공단지에 있는 회사나 강에서 조정 경기 연습하는 학생들로부터 단체 예약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식당은 지극히 평범하고 한가로웠다. 나는 수족관에 있는 자라를 플라스틱 통에 담아 1톤 트럭에 실었다. 강가에 놓아줄 생각이다. 전에는 공주 시내에서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즘은 통 연락이 없다.
“자라는 영물(靈物)이라 잡으면 못써.”
“낚시꾼이 비싸게 사가요.”
“그려도 잡지 마. 네 형의 원혼일지도 모르는데.”
자라를 잡아 오면 어머니가 제일 못마땅해했다. 통발에 자라가 들어가서 꺼낸 것뿐이고, 어느 때는 배가 선착장에 닿자마자 낚시꾼이 달려들어 흥정하는 바람에 즉석에서 팔리기도 했고, 연락처를 알려주자 종종 전화가 와서 여러 번 자라를 팔았었다.
“네 형, 천도재라도 올려줘야 하지 않겠냐.”
“그게 언제적 일인데 그러셔요.”
“차가운 물 속에서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 잊으세요.”
어머니는 내게 무당을 데려다 강가에서 형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께 그만 잊으라고 말했다. 이미 40년이 지난 일을 어머니는 아직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강가에 나가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다 오기도 했고, 꿈에 형이 강물 속에서 울고 있다고 했다. 어느 때는 강물을 보며 저기 네 형이 떠내려간다고 헛소리하기도 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강둑에서 뚫어지라 강물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트럭을 강가에 세우고 자라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통을 내려 물가로 가서 기울이자 안에 있던 자라 두 마리가 물속으로 쏜살같이 헤엄쳐 들어갔다. 대접보다 더 큰 자라는 강물이 애타게 그리웠는지 삽시간에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자라가 도망친 물속을 들여다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트럭으로 갔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강가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