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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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추위를 느꼈다. 지금도 춥다. 남들이 가진 것의 대부분을 갖고 있지만, 마음에 평화가 없다.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화해하고자 노력해도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보면 오금이 저린다. 아니, 시인하지 않더라도 부정하지 않아도 말을 꺼낼 수 있으련만, 상대는 전혀 기억조차 없다는 표정이다. 어머니의 자존심이 바위보다 무겁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자는 응접실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실내에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새로 집을 장만해서 이사를 오자 친척들이 축하한다고 사 들고 온 화분이 응접실 한쪽에서 미자에게 손을 내민다. 때로 귀찮아서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기지만, 미자는 많은 시간을 화분의 식물과 이야기한다. 식물은 대답하지 않지만 언제나 응답을 한다. 하루하루 싱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돌본 만큼 싱싱하다. 아니, 마음을 준 만큼 반드시 보답한다. 외사랑이 없는 것이 식물과의 관계이다.
마음속에 원망을 담고 사는 세월은 언제나 추울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작은 기억 한 조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여러 가지 일들은 자라오면서 미자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몸부림은 처절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마음이야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미련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행동, 지금 생각하면 지독히 어설픈 안간힘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최근의 드라마를 보고 느낀 감정이다. 드라마 주인공의 처절한 인생을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어불성설이다. 남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절대로 너그러워지지 못한다.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은 피해자가 자신이 아닐 경우에 생기는 마음이다.
인간의 에고이즘은 자신에 대한 물리적인 학대에는 언제나 날을 세운다. 엄마.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말이다. 엄마와 엄니의 차이는 대단하다. 전자는 상호 간의 정이 넘칠 때 하는 말이고, 후자는 엮어진 고리 때문에 필요에 의해 생긴 형식적인 호칭일 뿐이다.
미자는 엄마란 말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머니와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그 이상의 접근은 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리광을 부려본 적도 없다. 언제나 갈증 상태,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마음의 저항.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미련한 갈증.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가실 줄 모르는 지독한 목마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는 공포 그 자체다.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만 들으면 어딘가로 숨기 위해 안절부절못한다. 인민군을 향한 유엔군의 비행기는 선량한 민간인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수천 미터 공중에서 인민군과 민간인이 구별될 리가 없다. 어쩌면 그들에겐 구별할 필요가 없는 동물일 뿐인지 모른다. 애초에 미군은 한국전에 투입될 때 그렇게 세뇌됐는지 모른다. 무자비한 학살, 자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소 민족의 집안싸움에 투입되면서 인간적인 고뇌 따윈 안중에 없었을지도. 그들에게는 아군도 적군도 없는 싸움이다. 그냥 경멸해온 동양인. 더구나 수천 미터 상공에서 보면 움직이는 동물일 뿐.
비행기 폭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아수라장이다. 영암댁도 예외일 수 없다. 멀리 행상을 하는 남편에게 부탁하여 친정에 가는 길이다. 38선 부근에선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곳 후방은 불안하지만 작은 평화가 계속이다. 친정오빠가 경찰인 생가도 궁금하고, 모처럼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고 싶어 남편을 졸라 얻은 나들이다. 여름이라서 후덥지근하다.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큰애는 성가시지 않다. 전쟁은 어린이에게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소음 같은 것이다. 외갓집을 가는 즐거운 나들이일 뿐. 가끔 뒤돌아보며 웃는 모습이 오히려 정답다. 등에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미자가 오줌을 눈 모양이다. 아까부터 칭얼댄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비가 슬며시 오니 낮이 바쁘게 어두워진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 큰애라도 없으면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땅거미가 개울에서 산으로 올라왔다. 아직도 한참을 가야 마을이 보일 것이다. 처녀 시절에는 엄마 몰래 나들이도 많이 한 곳이지만, 어두워지면 언제나 무섭다. 등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미자에 대한 미움이 노여움으로 변했다. 아무리 어린애지만, 도대체 자기가 무엇을 잘했다고 울어대는지.
결혼하고 3년이나 아기가 없다가 태어난 큰애는 여자이건만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다시 3년 후에 태어난 미자는 나면서부터 천덕꾸러기다. 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데, 시어머니 되는 사람은 어디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영암댁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장사한다고 외지로 도는 남편에 대해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이 말을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다. 더구나 시어머니는 미자의 우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셨다. "집안 말아먹을 년. 여자아이가 빽빽거리고 울면 상스럽지 못한 일이 생긴다"고 호통이시다. 그래서 영암댁은 아이를 울리지 않으려고 언제나 업고 일했다. 이런 영암댁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미자는 영암댁의 등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미자에 대한 영암댁의 마음은 이렇게 미움이 앞섰다. 미자를 낳고 국을 먹으려는데 눈물이 나왔다. 어디서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었다던 작은 어머니의 말이 실감이 났다. 연거푸 딸을 낳은 작은어머니가 들려준 말이다. 그때는 무심코 흘린 말이다. 아이는 낳았는데 왜 그렇게 서운하고 허전했는지? 열 달을 배가 불렀고 심한 산고 끝에 나온 아이지만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미워할 수는 없다. 보고 있으면 가엽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쩐지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미자다. 어딘가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자식 없는 집은 아들, 딸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해도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먼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하던 옆집 아주머니(율포댁)에게 주어버릴 것을 하는 마음이 수없이 생긴 영암댁이다. 실지로 결혼하여 십 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율포댁은 미자에 대한 영암댁의 홀대를 안타까워했다.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라며 울먹이는 율포댁에게 미자를 주면 감지덕지할 것이지만,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기에 눈치 보다가 어느덧 이태가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전쟁이 나자 어딘가로 피난가버린 율포댁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등에 업혀 심하게 우는 미자가 너무 밉다. 차가 없어 삼십여 리를 걸어가는 길에 미자가 버겁다. 같은 또래에 비해 몸집이 좋은 것이 원인이다. 영암댁은 미자를 내려놓았다. 지린내가 심하다. 며칠 씻지 않는데다 오줌까지 묻었으니 냄새가 정말 역겹다. 미자를 바위 위에 앉혀 놓고 큰애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갔다. 미자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만 못 들은 체했다. 귀를 막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또 들렸다. 폭격을 맞아 갈기갈기 찢긴 미자의 몸뚱이가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벌을 받을 것이야. 그러나 할 수 없지 하고 혼자 생각했다. 전쟁 중에 가족을 잃는 일은 허다하다고 자위했다. 아니, 어느 정도 자라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는 큰애 하나면 족하다. 어쩌다 미자가 잠을 자지 않고 울면 이불을 미자의 머리까지 씌울 때도 있었다. 한참 지나 놀라 이불을 걷으면 미자는 땀을 뻘뻘 흘린 채 기진맥진해 있었다. 어려서 들은 칠공주 이야기가 생각났다. 왕이 내리 여섯 딸을 낳고 일곱 번째 또 딸을 낳자 그 아이를 버렸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아이가 나중에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고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칠공주 이야기는 고루 퍼졌다.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경고 이야기로 자신들의 면죄부인지 모른다. 영암댁은 어려서 그 이야기를 듣고 불쌍해서 많이 울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엄마, 미자는?”
큰애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야. 영암댁은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러다가 다시 되돌아섰다. 버릴 바엔 차라리 완전히 버리자. 가슴에 싸한 아픔이 지나갔다. 미자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고 큰애의 손을 잡고 뛰었다. 집에 들어서는데 눈물 같은 땀이 흘러내린다. 시원한지 허전한지. 자신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한 마음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큰애를 보았다. 어둠이 마을을 휘감았다. 미자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이다. 헐레벌떡 이웃집 아낙이 대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영암댁은 짐짓 모른 체했다.
“어둠 속에서 아이가 울고 있는데 짐이 많아서 데려오지 못했어요. 등잔불 가지고 같이 가요.”
영암댁은 귀를 막고 싶었다. 살아 있어. 울고 있어?
어둠 속에서 미자가 기진맥진 상태로 앉아 있다. 아무 말 없이 미자를 업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갈 길을 재촉했다. 어둠 속에서 미자의 불안과 원망과 노여움의 눈을 보지 못했다. 아니, 어린아이의 생각을 무시했다.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미자는 세 살이었다. 생각은 있어도 그 뜻을 밖으로 나타낼 능력은 없는 나이다. 축축한 사타구니가 힘들어 울었다. 우는 아이 밥 준다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실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젖을 주지 않는 어머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축축한 사타구니는 견디기 힘들다. 그보다 힘든 것은 어두워지는 주위와 버려진 사실에 대한 공포다.
자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서 따뜻함이 없다는 것을 이미 느꼈다. 할머니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고, 아버지도 언제나 모른 체했다. 스스로 체득한 것이 자신이 천덕꾸러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어른들과 섣불리 싸움하려 했다가는 낭패 보는 일만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말은 못하지만,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안다.
엄마 뱃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어둠이라는 것을 몰랐다. 태어나서도 얼마 동안은 여전히 캄캄한 상태로 보냈다.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웃는 사람의 얼굴이 참 좋았다. 한데 이상하게 그 웃음은 자신을 비껴갔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둠은 말 그대로 공포였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면 무서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아무도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울려고 하면 어머니가 거칠게 업어준다. 그래도 어머니의 등은 따뜻했다. 우는 소리는 거의 내지 않았다.
어머니와 언니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미자는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 사람이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한참 동안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버림받는구나 하는 마음과 죽는구나 하는 마음이 동시에 생겼다. 이럴 줄 알았다는 체념과 어둠에 대한 두려움에 미자는 소리내 울지도 못했다. 한참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어둠이 빠르게 다가왔다. 어디선가 배고픈 짐승이라도 나타난다면 나는 여지없이 먹히고 말 것이다. 만약에 한 번에 죽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니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번쩍거렸다. 누군가 사람이 나타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인민군이래도 반가울 것이다. 아니 코쟁이라도 반가울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신의 신체가 어머니를 닮아간다는 것을 느꼈을 때, 세상이 이렇게 자신을 냉대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에서 어느 날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아주 많은 시간을 정신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악착같이 무엇인가에 달라붙었다. 실로 죽을힘을 다한 전쟁이었다. 그러면서 미자의 몸은 점점 커가기 시작했다.
미자는 어머니 뱃속이니 어머니의 모습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갑갑하지 않고 편안하고 좋은 곳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가지 않고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물주라는 것이 그런 게으른 평화를 주지 않아 미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세상 속에 버려졌다. 누군가가 엉덩이를 너무 아프게 때려 큰소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음을 피부로 느꼈다. 왜 이런 기분일까? 아니, 너무 춥구나. 처음 느낀 세상의 싸늘함에 미자는 너무 추웠다. 어머니라는 사람의 표정을 보니 할머니와 비슷했다. 순간 미자는 아차 했다. 나오지 말 것을. 그곳은 참 따뜻했는데.
영암댁은 가끔 미자를 보았다. 미자는 잡초처럼 자랐다. 영양가 있는 음식은 미자까지 가기 전에 바닥이 났다. 어리광도 부리지 않고, 가끔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미자에게 별다른 호의는 없다. 부지런한 남편 덕에 가세는 늘어났다. 아니, 너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미자에게 심부름의 양이 많아졌다. 어려운 일을 시켜도 묵묵히 하는 미자다. 마을 공동우물에 가서 콩나물을 씻어오라고 했다. 큰애는 방바닥에 누워 무엇인가를 쓰고 놀고 있다. 그리고 심부름을 시켜도 미자에게 다시 시키므로 애당초 큰애는 심부름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콩 껍질이 하나도 없게 씻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번 정도 헹구어 오기를 바랐다. 콩나물에 콩 껍질이 하나도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잿물만 없으면 되는데, 너무 깨끗하게 씻어오는 미자가 융통성이 없어 보였다. 하는 짓마다 너무 완벽해 오히려 역겹다. 이상한 마음이다. 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지겨운 마음. 손이 시리다. 땅에서 솟아 나오는 물은 미지근하지만, 겨울이라 손이 시렸다. 몇 번을 헹구니 재는 흘러내렸지만, 콩껍질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내야 했다. 만약 콩껍질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를 또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미자를 두렵게 했다. 어둠 속에 버려진 기억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으로 길에 버려진 많은 어린이를 보았다. 깡통을 들고 누더기를 걸치고 이집 저집 구걸하는 어린이들이다. 하마터면 나도 저 아이들과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불안이다. 어머니가 다시 돌아온 기억은 없지만, 눈을 떠보니 외갓집이었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물어볼 수도 없다.
손을 호호 불며 콩나물을 씻어 집으로 갔다. 어머니의 흡족해하는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당분간은 여전히 어머니의 딸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다.
“미자는 일을 시키면 뒷손질 필요없이 확실히 하는구나! ”
율포댁 아주머니의 칭찬을 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입 안에서 침 속에 녹아버렸다. 미자는 언제나 긴장했다. 그것을 긴장이라고 한다면 우습다. 항상 눈치 보며 살았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산속의 어둠은 언제나 미자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때는 정말 어려서 두려움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어둠이고 버려진 상태다.
시골 학교는 교실은 적고 학생 수는 많아 저학년은 오전, 오후 2부제 수업을 했다. 오전에 학교 가는 날은 괜찮은데, 오후에 가는 날은 미자를 두렵게 했다. 어머니 혼자 두고 학교에 가면, 돌아오면 어머니가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다. 빈집은 혼자를 뜻한다. 골목에서 낡은 대문을 보고 어머니를 감시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종아리가 퍼렇게 두들겨 맞는다. 매를 때리는 어머니도 옆에 있는 것으로 좋다. 아니, 다시 어둠 속에 버려질까 언제나 두렵다. 언제나 생각 속에 있다. 산길, 어두움, 비행기 소리. 이 세 가지는 언제나 미자를 떠나지 않았다. 제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오기를 바랐건만, 어느 순간도 그 기억은 미자를 떠나지 않았다. 옷에 묻은 껌보다 지독하다.
영암댁은 가끔 생각에 잠긴다. 일을 시키면 언제나 깔끔하게 하는 미자에게 아무래도 많이 시켰다. 큰아이는 덜렁이로 일을 대충하고 언제나 나돌아다녀서 일을 시킬 기회가 없다. 그리고 큰애는 심부름이라도 시키면 언제나 입을 대자나 내밀고 불평한다. 한마디로 껄끄럽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많은 일이 미자의 몫이 된다. 인위적인 학대가 아닌 우연의 반복이다. 어쩌면 쉬운 상대에 대한 편안함인지 모른다. 그렇게 영암댁은 미자에게 혹독하게 차별하는 어머니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편한 대로 산다. 잠자리도 그랬다. 어머니 옆은 언니였다. 어머니와 언니 사이에서 자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언니의 등과 한쪽은 냉랭한 벽. 미자는 언제나 허전하고 무서웠지만, 불평은 언감생심. 벽이 주는 서늘함은 미자를 언제나 흉몽에 시달리게 했다. 흉몽의 대부분은 어딘가에 버려져 혼자 우는 자신의 모습이다. 꿈속의 자신은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세 살 적 모습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실지로 오줌을 싼 적도 있었다.
미자는 언제나 추웠다. 모든 생각을 자신에 불리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아니, 실지로 그랬다. 이웃 아주머니가 언젠가 미자를 데려온 자식 취급한다고 농담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몰래 들었다. 아니라고 웃으면 응답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미자는 스스로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문밖에 버려진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캄캄한 어둠에 버리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불리한 생각은 언제나 꼬리가 길다. 아니, 도마뱀의 꼬리다. 잘라내도 다시 저절로 생기는.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려보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따스할 수가 없다. 미자는 그렇게 냉정한 인간이 되었다. 매사에 언제나 자로 척도하는 버릇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심한 알레르기 현상이 일어난다. 여러 사람과 같이 행동할 때는 언제나 움츠러들어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혼자가 되면 알지 못한 힘이 내부에서 솟아났다. 버려진 곳에서 주어진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아니, 어머니를 믿을 수 없는데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정말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언제나 추운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영암댁은 미자가 다행히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심했다. 아니,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세 살 때의 어떤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상기시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 내가 너를 낳아준 것만도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미자는 상대하기 쉬운 편한 상대였다. 세상은 구태여 사랑 운운하지 않아도 세월을 보내는데 어떤 장애도 없다. 아니, 인간이란 원래 껄끄러운 상대보다는 쉬운 상대에 더 가혹하다. 그리고 살갑게 굴며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아이가 더 귀여운 것이다. 잘못을 매로 다스릴 때 재빨리 도망가 버리는 큰애에 비해 미자는 고집스럽게 앉아서 감내한다. 그런 미자가 때로 얄밉고 지겨웠다. 자신에 대한 도전 같다. 미자의 묵묵한 순종은 때로 영암댁을 질리게 했다.
파블로의 개처럼.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은 미자는 철이 들면서 원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도 큰소리로 웃어본 적이 없게 보낸 세월에 대한 원망이다. 애초에 개는 사람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블로프가 개를 갖고 실험을 하면서 개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증오를 심어준 것이다. 먹이는 주지 않고 종소리만 들려주는 인간에 대해 처음은 가벼운 체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횟수가 많아지자 체증이 증오가 돼 버린 것이다. 먹을 것을 두고 흥정하는 인간의 치사함에 개의 정신이 미치고 만 것이다. 개들은 자기들만의 소리로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전염시킨 것이다. 그런 다음부터 개가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럴싸한 일이다. 미자가 그랬다. 자신에 행해지는 보상 없는 육체적인 행위에 대한 반발은 어머니를 향한 미움과 두려움으로 둔갑했다. 개는 먹이는 주지 않고 종소리만 들려주는 인간을 증오하고 스스로 발광한 개는 인간을 물어뜯어 결국 인간을 죽게 했다. 그러나 미자는 개가 아니었다. 미움보다 강한 것이 두려움이다. 그래도 어느 순간은 어머니가 자신의 편이 되지 않으려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 번번이 실망했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미자는 살 희망조차 없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어머니가 해준다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 때 가장 잘한 것은 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은 세상에 너그러울 수 없다. 사랑을 받으면 모든 세포가 기뻐서 어떤 일에도 활력을 준다. 어머니와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미자는 혼자 서는 법을 터득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워야 하는 어머니와 좁혀지지 않는 거리는 미자를 스스로 강하게 만들었고, 실로 외로운 싸움이다. 마음이 허한 미자는 아주 작은 그릇이라도 전부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했다. 그것은 마음의 허기가 준 결과다. 항아리 물도 가득하여야 한다. 누군가 한 바가지만 퍼내면 미자는 얼른 물을 길어다 항아리를 채워놓았다. 학교는 가지 않아도 항아리 물은 가득 채워야 마음이 놓인다. 알 수 없는 불안, 아니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서글픈 아픔.
화분의 식물이 창 쪽으로 일제히 몸을 비틀었다. 화분을 반 바퀴 돌려놓는 것을 잠깐 잊었다. 하찮은 식물도 이렇게 사랑을 갈구하는데 하면서 미자는 웃었다.
동생과 같이 사는 어머니가 며칠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선뜻 나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미자의 서글픈 몫이다. 자신이 이렇게 느지막이 불편 없이 살게 된 이유도 사실 따지자면 어머니 때문인지 모른다. 일찍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은 어머니의 무관심에 대한 피나는 노력으로 생긴 결과다.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서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쁜 결과에 대해 노발대발하면서 그렇게 된 원인에는 대단히 관대하다. 그러나 미자는 그렇지 못했다. 꼬치꼬치 원인을 캐고 따졌다. 조금이라도 상식 이하의 행동을 보면 참지 못했다. 성격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위험했다. 사람들은 이런 미자에게 공격적이라도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지키려는 미자의 안간힘이다. 그래서 사회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언제나 한걸음 뒤에서 시작하는 경주는 그녀를 남보다 먼저 지치게 했다. 그래서 결과는 언제나 차석이다. 어쩌다 일등이 되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모략으로 일등이 그녀를 비껴갔고, 그 억울한 승패도 항의할 곳이 없어 묵묵히 견디면서 그녀는 세상에 대해 잔인한 인내를 배운 것이다. 차석이 행복하다는 것을 안 것은 그녀의 서글픈 판단이다.
사랑! 얼마나 갖고 싶은 선물이고 받고 싶은 선물인가?
어머니의 건강이 자꾸 나빠진다는 연락이 또 왔다. 누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동생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다가 바람을 따라 날아가 버린다. 화분에 물을 주고 햇빛 쪽으로 뻗는 이파리를 균형을 잡아주고자 방향을 바꾸었다.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언제나 눌렀다. 다른 식구들은 쉽게 부르는 말이 왜 내 혀끝에서는 제대로 발음을 내지 못하는 건지.
삶이 외롭고 서러운 미자는 넘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넘어져도 손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미자를 힘들게 하면서도 강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상황에 눈물을 흘리고 포기하는 대신, 격하게 약진했다. 미자는 매사에 부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상식 이하의 행동은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상식 이하는 자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힘든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정직이라는 신념,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지만 미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너무나 완고했다. 가끔 스스로도 답답하지만.
동생을 위해 손을 호호 불고 빵집에서 갓 만들어진 빵을 사서 가슴에 품고 집으로 가면서 미자는 조금만이라도 맛을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언제나 벅찬 희열을 느꼈지만, 그녀의 몫은 없었다. 먹는 것에는 언제나 유령 취급을 하는 형제들이다. 어머니의 냉대가 다른 형제들에게 말없이 전수된 것이다. 욕하면서 배우는 것이 나쁜 짓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란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끝부분인 것은 기억나는데 확신은 없다. 나이 따라 제일 먼저 퇴색되는 것이 기억이다. 아니, 나이보다 앞서가는 것이 기억의 변질이다.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피난 가는 길인데, 트럭의 뒷부분에 앉아 있었다. 처음엔 졸면서도 아이를 챙기던데, 어느 순간에 아이는 트럭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여인은 그것도 모르고 헛손질하며 아이를 확인하며 졸았다.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극한의 순간에선 어머니도 사람일 뿐인 것을. 세 살인지 네 살인지는 확실한 기억은 없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전쟁 중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처럼 친정 가는데 등에 업힌 아이가 빽빽거리니 그 여인은 화가 났겠지. 더구나 둘째 딸이야. 하늘에선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등에서 우는 아이가 갑자기 싫어진 여인은 살그머니 아이를 길가에 버리고 가버렸다. 아이는 비행기 소리와 어둠에 질려 까무러쳤다. 거기까지가 미자의 기억이다. 그 뒤 이야기는 언니에게 들은 것인데, 자신을 본 적이 있는 동네 사람이 어머니에게 내 상태를 알려주어 어머니가 나를 데려갔단다. 그랬으면 되지 않냐고 스스로에 반문했다. 그러나 그때의 어둠에 대한 공포로 혼자 캄캄한 방에서 지금도 잠을 자지 못하고,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무서움이 생각나 견디기 힘든 사람. 그 상황을 잊지 못하는 기억력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 이것이 자신인데 어쩌란 말인가?
그날 뒤부터 미자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들면 어머니가 또 나를 어딘가에 내다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밤에 일정한 시간에 잠들기는 미자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 대신 낮잠은 그야말로 죽음 같은 잠이 된다.
그 어머니가 90이란 숫자를 부둥켜안고 지금 동생과 살고 있다. 장가 안 간 남동생과 같이. 미자는 어머니가 자기에게 그때 너를 버리려 했던 것은 정말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기꺼이 어머니의 여생을 모실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완전히 공주병이신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을 냉대하신다. 아마 자기가 기억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신 정신건강을 위한 처방이니 그렇게 믿고 사시는지 모르겠다. 모를 일이다. 미자가 어머니 생각 속에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8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베갯머리 송사라는 것이 남녀 간의 애정행각에서만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조차 어머니와 같이 자기를 멀리하심을 느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 아닌 당신의 여자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미자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셨다. 아버진 가끔 슬픈 눈을 미자에게 보여주셨다.
사랑에 목이 말라 사랑을 함부로 했던 사람으로 아버지에게도 좋은 딸이 될 수 없었다. 번번이 남자 문제로 부모 속을 썩였다. 조용히 해결할 문제인데도 부모라는 사람들이 일을 크게 부풀려 미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낭떠러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생각한 것이 그렇게 더 떨어질 곳이 없으니 난 뛰어오릅니다. 두고 보세요. 내가 어떻게 비상하는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당신들이 원격 조정하는 리모컨으로 내 인생이 좌지우지되었지만, 저는 당신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세상 밖으로 과감하게 나왔다. 그렇게 미자는 홀로서기의 달인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미자는 많이 울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속으로 미워하면서 겉으로 효녀인 척하고 산 자기 삶의 즐거움이 없어진다는 슬픔이었다. 마음 놓고 미워할 상대를 잃어버린 억울함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본 적이 있었을까? 만약 젖을 먹였다면 그 순간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었겠지. 그런데 그 기억은 너무 어려서인지 전혀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본 기억도 없다.
문득 옆집 가난한 집 풍경이 생각났다. 그 어머니의 언제나 웃음 가득한 얼굴이 생각났다. 나물을 캐서 바구니를 들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물 바구니를 마당으로 던지면서 호통치던 어머니. 무엇이 그리 못마땅했는지 언제나 화만 내시던 어머니. 그러나 이웃 가난한 어머니는 바가지에 밥을 비벼 아이들과 나눠 먹으면서 웃었다. 수저 하나로 여러 아이에게 나누어주던 모습. 한 숟갈 얻어먹고 시큰거렸던 콧날.
부추를 잘게 잘라서 밀가루에 넣어 부침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이면서 웃었다. 어쩌다 놀러 가면 엉덩이를 두들겨 주면서 반가워하셨다. 아이들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마나 얻고 싶은 어머니의 관심이었던가?
며칠을 혼자 끙끙거렸다. 어머니 아니 엄마라고 가서 불러볼까? 그리고 가슴에 안겨볼까? 어머니의 반응이 궁금하다. 햇빛이 안방 깊숙이 들어온다. 이젠 모든 것을 놓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너무 무겁다. 그런데 놓아지지 않는다. 평생을 짊어진 아픔인데.
나무는 뿌리만 내리면 자기가 뻗고 싶은 데로 마음껏 가지를 뻗는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한다. 하고 싶은 것도 다 하지 못하면서 하기 싫은 것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미자도 그렇다. 편찮으시다는 연락이 젖은 솜처럼 무겁다. 젖은 솜은 해가 계속이면 마르는데. 조금 거슬리면 물불 가리지 않고 퍼붓는 어머니의 독설. 그것은 부모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아니 해서는 안 되는 독설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날뛰는 어머니.
외국 여행을 갈 것이니 돈을 달라던 어머니. 그때 미자는 형편이 어려워 조금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냥 퍼부어대던 어머니였다. 다른 집 아이들의 예를 들어가며 노발대발. 많이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송구한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폭언. 미자는 조금도 드리지 않고 어머니와 인연을 끊어버렸다. 차라리 시원했다. 나도 자식 키우는 어른입니다. 어머니가 함부로 대해도 좋을 허접쓰레기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뿌리는 대로 거둔답니다. 나는 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불평과 생활이 주는 짜증을 받아내기만 하는 생각 없는 짐승이 아닙니다. 동생들이 어머니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미자에게 화해를 요청했으나 미자는 외면해버렸다. 솔직히 보고 싶지 않았다. 인연을 끊어버리니 차라리 마음 편했다.
매우 편찮으시다는 연락이 두어 번 더 왔다. 그냥 자식 된 도리를 하라는 간접 억압이다. 천륜은 선택해서 되는 게 아니다. 아니,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있어도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본능놀이로 생긴 자식, 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다른 수단에 의해 태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세상에 나온 자식의 부모는 선택권 없는 운명이다. 서로 끊을 수 없는 인연이면서도 어느 순간 적이 될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이다.
희생은 스스로 선택해야 바람직한 의무다. 그리고 사랑도 그렇다. 외사랑이나 짝사랑은 고통일 뿐이다. 사랑과 희생의 강요, 더구나 부모의 일방적인 요구, 자기네들은 주지도 않는 사랑, 그에 대해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부모의 몰염치. 미자는 부모에게 충실했다. 그것은 버림받은 자가 느끼는 두려운 복종이다. 가련한 몸부림이다.
어머니는 처참한 모습으로 미자에게 돌아왔다. 언제나 도도하고 또한 얼음보다 차가웠던 어머니.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게 한 어머니. 그렇지만 화해하고 싶어, 아니 용서하고 싶어서 매번 변죽을 울렸지만, 끝내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누구도 의지하지 못한 미자는 홀로서기의 달인이 되어 많은 것을 얻었다. 소위 성공한 사람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미자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이룩한만큼 상대적으로 배가 고팠다. 참 아이러니한 현상, 그렇게 미자는 배고픈 세월을 벗어나지 못했다.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간다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산 높으면 기어가지
명태 줄까? 명태 싫다 가지 줄까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기어 와서 보니
빛깔 좋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길래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정신없이 먹어 보니
우리 엄마 살아생전 내게 주던 젖 맛일세
명태 준다 명태 싫다 가지 준다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울다 울다 잠이 드니
그립던 우리 엄마 꿈속으로 찾아오네
반갑고 놀라운 마음 엄마 치마 끌어안고
엄마엄마 같이 갑시다 타박네야 못 간단다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산이 높으면 기어서 가지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물이 깊으면 헤엄쳐 가지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간다
어려서 엄마 잃은 타박네의 그리움이 담긴 노래가 전파사에서 들렸다. 전래동요를 각색해서 유명 가수가 부른 노래다. 미자로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애잔한 그리움이다. 항상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어머니를 어찌 그리워 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있지만 엄마 없는 미자. 날씨 이변으로 연일 찜통더위가 계속되지만, 미자는 여전히 오들오들 허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