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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정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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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 조한필(회장)|한빈(첫째딸)|한주(둘째딸)|한솔(셋째딸)|비서실장|친구

장면1
건장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깊은 조한필 회장이 세 딸을 불러 앉히고 무대 중앙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재벌회사를 일구어낸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탓인지 다소 부자연스런 권위의식을 드러낸다. 조한필은 낮고 힘이 있는 어조로 딸들에게 중대한 발표를 하려는 듯 비서실장을 시켜서 프로젝트 화면을 준비시킨다. 화면에는 재벌의 부동산과 사업별 구성도를 그린 다이어그램과 사진이 투사되고 있다. 조한필은 시가를 입에 물고 뿌연 연기를 내품으며 말하기 시작한다.

조한필: 비서실장, 한신의 후계자와 유산상속을 발표할 준비가 다 되었는가?
비서실장: 지시하신 대로 준비는 했습니다. 한신의 자산 구성도를 전면에 볼 수 있도록 설치를 했습니다.
조한필: 수고했네. 그럼 바로 내가 직접 발표를 하겠네. 자, 내 딸들아. 잘 듣거라. 너희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니 경청하기 바란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애비도 나이를 못 속이는 모양이구나. 팔순 잔치를 한 지 벌써 2년이나 흘렀어. 이제는 알았던 것도 돌아서면 금방 잊고 만다니까. 마음이야 아직도 청춘이지만 여든세 살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지난번 정 회장, 이 회장, 구 회장과 함께 골프를 치다가 허리가 삐끗했다 싶었는데 밤새도록 통증으로 잠을 못 이뤘단 말씀이야. 평생 일을 하느라고 한가롭게 산책 한번 할 수 없었던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이 정도면 일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사업은 너희들에게 다 물려주고 좀 쉬어야겠구나. 첫째딸 한빈아, 넌 애비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니?

한빈: 아버님께서는 우리 가문과 기업을 이토록 훌륭하게 키우셨잖아요. 어느 대기업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굴지의 재벌회사로 성장시킨 것은 순전히 아버님의 역량이셨어요. 그런 아빠가 제안하신 거라면 충분한 근거가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항상 아버님 편이잖아요.

조한필: 역시 한빈이는 첫째딸답게 애비의 마음을 정확하게 집어내는구나. 그러면 둘째딸 한주는 아빠의 제안이 어떠냐? 너무 갑작스러운 느낌이 들겠지만 너희들이야 일찍부터 유학을 보내고 회사에서 경영훈련을 시켰으니 감당할 수 없다고 나자빠지지는 않겠지? 한주가 한번 말해봐라.

한주: 저도 언니의 생각과 똑같아요. 아버님의 피를 물려받은 딸들이 어찌 생각이 다르겠어요? 저는 항상 아버님의 불같은 카리스마를 존경해 왔어요. 앞으로 경영자로 나선다면 아버님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서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보스가 될 거예요. 아버님의 계획은 저에게 예상보다 빨리 경영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잖아요. 아버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감히 토를 달겠어요. 무조건 동의합니다.

조한필: 역시 한신의 태양 조한필의 딸답구나.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듯 거대한 도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을 세운 조한필을 닮았단 말이다. 좋아, 그럼 막내딸 한솔아,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솔: 글쎄요, 전 아직 아빠가 회장직에서 물러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몸도 어느 청년 못지않게 건강하신데 왜 갑자기 일선에서 물러나시겠다는 건가요. 요새는 팔십대도 장년이라고 하잖아요. 전 언제나 아빠의 큼지막한 사랑의 그늘 밑에서 안식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조한필: 한솔이 너는 항상 애비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차게 말하곤 했지. 하지만 이번만은 애비의 생각대로 따라주기 바란다. 사람은 남의 그늘에서만 살 수 없는 거란다. 새가 알을 까고 나와서 날갯짓을 하면 둥지를 떠나야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란 말이다. 조만간 너도 애비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게다. 자, 나의 믿음직한 딸들아. 애비가 너희들에게 평생 일구어온 쩐의 제국을 물려주고 한가롭게 쉬려고 한다. 그대신 너희들은 보답으로 가슴이 뭉클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애비 조한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주기 바란다. 얼마나 절절하게 느껴지는가에 따라서 너희들에게 물려줄 유산의 질과 양도 정해질 것이다. 사랑이란 보이지 않는 보석이라 할 수 있으니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느니라. 사랑도 멋진 언어로 드러날 때 비로소 느껴질 수 있는 법. 나의 자랑스러운 딸들아, 제왕처럼 쩐의 제국을 다스려 온 애비의 말을 알아들었겠지?

한빈·한주: 물론 알아듣죠. 우리는 아버님을 빼다박은 한신재벌의 공주들이잖아요.

조한필: 그럼, 나의 첫째딸 조한빈, 너는 동생들보다 세상에 먼저 나왔으니 말도 먼저 배웠지 않았느냐. 너의 야들야들한 혀로 사랑을 노래하듯이 말해 보거라. 너의 사랑의 아리아가 애비에 대한 동생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게 잘 인도해줄 거야. 너의 말은 그저 지나가면 없어지는 바람이 아니라 너의 곳간을 채워줄 금은보화가 될 수도 있어. 또한 너의 통장에 기록되는 금액, 주식의 숫자, 또는 하늘을 향해 치솟을 빌딩의 숫자가 될 수 있지. 아빠에 대한 사랑을 심사숙고하여 꾀꼬리처럼 노래해봐라.

한빈: 어릴 때부터 아버님께서 저희들의 머릿속에 주입하셨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아버님은 항상 저희들의 재롱에 대한 보답으로 풍성한 선물로 채워주셨지요. 아버님을 즐겁게 해주는 재롱이 없다면 선물도 없다는 쩐의 이론을 어릴 적부터 철저히 배운 딸들이거든요. 아버님은 사랑이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어요. 또한 아버님께서는 우리들의 재롱으로 수를 놓은 사랑이 나타날 때 비로소 최고의 선물을 가슴에 안겨주시곤 했거든요. 아버님의 사랑교육으로 빈틈없이 단련된 우리 자매들입니다. 저희들에게 사랑을 사탕처럼 달콤한 말로 전하라는 아버님의 주문은 그동안 끊임없이 닦은 평소 실력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조한필: 역시 한빈이는 장녀 자격이 충분하구나. 나의 말을 토씨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에둘러 이야기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봐라.

한빈: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바벨탑을 쌓으신 아버님이야말로 저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아버님이 없는 세상은 등대가 없는 항구요, 앙꼬가 없는 찐빵이에요.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에서 아버님께서는 스스로 등대가 되어주셔서 저희들이 성공이라는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지요. 저는 아버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바칠 작정입니다. 앞으로 아버님께서 세우신 바벨탑을 저에게 물려주신다면 그걸 키우기 위해 죽도록 노예처럼 일하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아버님께 문안을 드리고 그림자를 따라갈지언정 결코 아버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할 거예요. 그리고 성경 말씀처럼 주인의 재산을 수십 배로 늘려서 바치는 하인처럼 능력을 발휘하여 한신을 한국에서 최고의 재벌로 키워나가겠습니다.

조한필: 아, 달콤하기 짝이 없는 사랑의 표현이구나. 걸귀처럼 먹어대는 욕망의 입의 소유자라서 성은 다 차지 않지만 보스로서 겸양을 지켜야겠지. 혓바닥에서 녹아내리는 사탕처럼 달콤한 너의 사랑 표현에 만족하겠다. 너에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빌딩과 내가 사는 저택 그리고 회사 지분의 삼분의 일을 줄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경영권 지배에 나설 권한을 보장하겠다. 장녀로서 한신의 회장으로 키우겠다는 애비의 뜻이야. 단 애비가 네게 물려줄 저택에서 일정 기간 함께 머물 것이다. 내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친구들을 가끔 초대할 경우 호스트로서 애비를 보좌해주기 바란다. 다음 우리 귀여운 둘째딸 한주, 너는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너의 잘 빠진 몸매처럼 간드러지게 말해봐라.

한주: 아버님께 한없는 사랑을 고백할 순간을 지금까지 고대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래 간직한 사랑이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가슴이 뭉클해져 입술이 떨리네요. 아버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 언니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아요. 아버님에 대한 저의 사랑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말하면 너무 상투적이라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묵주를 들고 신께 기도하는 신자처럼 저는 아버님의 초상을 늘 목걸이에 걸고 다닐 겁니다. 그건 제가 아버님과 일체가 되어 회사일이든 가문의 일이든 생각과 느낌을 늘 함께 하겠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조한필: 애비를 묵주처럼 항상 가까이 간직하겠다니 고맙구나. 하지만 설마 네가 남편보다 애비를 더 마음에 간직하겠니? 내 마음을 사려고 하늘에서 별을 따오겠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알겠니?

한주: (과장해서 아양을 떨며) 아버님, 부풀리다니요? 남편에 대한 사랑은 아버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제 마음을 너무 몰라주시니 서운합니다. 남편이야 아버님이 정해주셔서 정한 남자일 뿐이잖아요. 저는 남편보다 아버님의 뜻을 더 마음에 간직하며 미래 사업을 펼쳐나갈 작정이에요. 그래서 아버님께서 여전히 회사를 진두지휘하시는 양 그 입김이 온 회사에 퍼져나가도록 유지를 받들어나갈 거라고요. 아버님은 저의 생명을 주신 주인이요, 이 거친 쩐의 초장에서 길러주신 보호자이시잖아요. 제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사랑을 아버님께 기꺼이 바칠께요. 저의 사랑이 느껴지시나요, 아버님? (한필의 품에 안긴다)

조한필: (한주를 품에 안은 채) 허허, 너의 달콤한 사랑이 나를 얼얼하게 만드는구나. 그 사랑의 물결이 쓰나미가 되어 마음의 강둑을 철철 넘쳐 흘러내리는구나. (스크린 쪽으로 다가가 빌딩 이미지를 가리키며) 너의 사랑의 보답으로 한신이 세운 두 번째로 큰 빌딩을 너에게 주마. 또한 회사 지분의 삼분의 일을 너에게 주겠다. 나로 인해 너의 사랑에 굶주릴 네 남편은 상무로 발탁하여 회사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마. 너에게는 한빈이에게 준 저택 못지않은 북한강 강변에 세워진 거대한 별장을 주겠노라. 단 한빈의 경우처럼 애비의 두 번째 거주지로 해마다 일정 기간 애비의 숙소와 파티 장소로 사용해야 할 거야. (한솔에게 몸을 돌리며)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하는 막내딸 한솔이는 이 애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어서 말해라.

한솔: (무대 정면을 응시하며) 저를 막내로 낳아주시고 귀여워 해주신 아빠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이 객관적인 태도로) 하지만 아빠에 대한 사랑은 부녀지간으로서 당연한 인지상정인데 그 천륜의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딸로서 아버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조한필: (약간 당혹해 하며) 아니 진정 더 할 말이 없느냐. (한솔을 어린애처럼 부드럽게 얼러대며) 내게 줄 사랑의 말이 없으면 줄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넌 막내라서 어릴 적부터 내 무릎을 떠나지 않고 귀염을 독차지했건만 어찌 애비를 사랑한다는 말에 이토록 인색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한솔: (더욱 이성적인 태도로) 아빠가 저를 사랑해주신 만큼 저는 아빠를 즐겁게 해드리지 않았던가요. 인간의 말이란 마음을 담기에는 너무 부족한 도구예요. 아무리 아빠에 대한 사랑을 말로 담아내려도 해도 혀에서 떠나는 순간 사라져버리거든요. 어릴 적부터 아빠를 어느 누구보다 사랑해왔지만 마음을 담지 못하는 말을 저주해왔어요. 아빠, 저는 아빠를 사랑한다고 겉치레 말로 할 수 없어요. 용서하세요.

조한필: (벌컥 화를 내며) 뭐라고,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이럴 수가 있나.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한솔: (한필의 분노에도 흔들리지 않고) 방금 말씀을 드린 대로 제가 막내딸로서 아빠에게 받은 만큼 인륜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약속은 드리겠습니다. 특히 아빠가 평생 일구신 재벌 회사를 아직 정정하신 지금 거저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저는 아빠가 주신 능력을 발휘해서 저의 손으로 부와 권력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갈 거라고요. 지금까지 키워주신 것만으로 감사드리고 언니들처럼 권력과 유산을 얻기 위해 마음에 없는 아첨을 겉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지 않겠어요.

조한필: (벌떡 일어나 외치며) 아니, 네가 감히 애비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거야! 자식이라면 애비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효도하는 것이다. 대가리가 좀 커졌다고 이런저런 논리를 내세워 애비를 능멸하다니 어찌 내게 이런 불효를 저지른단 말이냐! 이러고도 네가 그토록 귀여워했던 막내딸이라고 할 수 있냐고! (낮고 냉정하게) 그래, 네가 공언한 대로 아비의 도움 없이 혼자 생존의 현장에 나가라. 너에게는 한 푼도 물려줄 수 없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한주와 한빈이는 한솔이 몫까지 반으로 나눠서 더 줄 거야. (한주와 한빈에게 돌아서며) 유산 상속을 마무리하도록 비서실장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 철저히 준비해라. (한주와 한빈가 서로 축하하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솔은 우울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자신의 행위를 굽히지 않으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비서실장: (한필 쪽으로 가서 나직하게 달래며) 회장님, 화가 나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시죠. (한솔이에게 다가가) 한솔 아가씨, 회장님께 용서를 구하고 유산을 동등하게 물려받으시죠. 회장님, 한번만 더 설득해보시죠.

조한필: (단호하게) 내 사전에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진행하라고. 허, 애비에게 한솔이 저년이 불효를 저지르다니. 사람 속은 정말 알 수 없구나. 모두 물러가거라.

조명이 서서히 꺼진다.

장면 2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서류철을 들고 들어온다.

비서실장: (회장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회장님, 제가 나서는 게 주제가 넘은 소행인 줄 압니다만 용서하십시오. 전번에 한솔 아가씨에게만 유산 상속을 배제하신 결정은 상속법적으로 문제가 큰 거 같습니다. 최근 변경된 상속법에 의하면 회장님의 유산에 대해 자녀들은 동등하게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에 한솔 아가씨가 이 유산 상속 배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법정은 그걸 타당하지 않다고 판결을 할 것입니다.

조한필: (신경질적으로) 내가 일군 재산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법원이 무슨 권한이 있다고 개입한다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고! 비서실장, 나의 제국인 한신에서는 조한필이 시키는 대로 처리하는 것이 자네의 임무야. 알겠나? 건방지게 감히 내 뜻을 꺾으려 들지 말라고!

비서실장: (차분하게 설득하며) 대기업은 법적으로 사기업이 아니라 법인체입니다. 아무리 회장님께서 세우시고 키우셨다고 하더라도 의사 결정을 회장님 단독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산 상속이나 경영자 결정은 정족수를 충족시킨 이사회를 열어서 다수결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사회 법령에 의거한 의결 과정을 거치지 않으신 모든 결정 사안은 무효가 된다는 것을 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조한필: (얼굴을 찡그리며) 이런 건방진 친구 봤나. 한신이야말로 재벌인 내가 법이야. 모르겠어? 한 번만 더 토를 달면 자네는 바로 해고야. 자네는 비서실장으로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비서실장: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며) 회장님, 저는 해고된다고 하더라도 불법적인 유산 상속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의 반대는 회장님에 대한 불충이 아니라 이후에 발생할 회장님에 대한 법적 분규를 막으려는 충정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조한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네가 이렇게 고집이 센 친구라는 걸 몰랐구먼.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니 해고는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하자고. 한신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명령하면 따라야 하고 그게 법이라는 것이야.

비서실장: (단호하게) 저의 충언을 불충으로 보신다면 이 순간부터 비서실장의 옷을 벗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준비 없이 회장님께서 갑자기 물러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즉흥적인 결정은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주게 됩니다. 물러나시더라도 따님들이 회장님의 뜻대로 회사를 운영하지 못하는 경우 다시 복귀하실 수 있는 안전책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 채) 그런 신중한 결정이야말로 회장님께서 한신인들에게 보여주셔야 할 지혜라고 봅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셋째 따님께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입에 발린 아첨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치는 것은 한신을 위해서 큰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충정을 제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돌보아드리지 못하더라도 회장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문을 닫고 나간다)

조한필: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동안 나를 열심히 보필해주었는데 좀 안됐군. 그놈의 고집이 뭐라고 지 밥그릇을 걷어차는 거지! (체념하며) 하지만 별 수 없지! 내 입에서 한번 뱉은 말은 절대로 다시 주워 담는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 나는 현직에서 떠나서 한가롭게 골프와 파티를 즐기면서 충성스럽고 똑똑한 딸들의 사업에 자문이나 해주면 되는 거야. 이제 조한필의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지! 하하!

장면 3

골프 연습장에서 조한필이 골프채를 두세 번 휘두르고 있다.

조한필: (우울한 표정으로) 친구야, 일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골프나 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하구나!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자꾸만 우울하고 허전해진단 말이야. 친구, 자네는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니까 나를 잘 알지 않나? 내 마음이 왜 그런지 자넨 알 수 있겠나?

친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것도 모르면서 갑자기 유산 분배를 했단 말이야! 스스로 빈털터리가 되려고 야단을 쳤냐고?

조한필: (반문하며) 내가 빈털터리라고? 딸들에게 물려줬지만 그 애들이 내가 원하면 뭐든지 들어줄 건데 예전과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러나? 회사를 내가 가지든 딸애들이 가지든 마찬가지라고. 이게 바로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라는 거지. 나이가 들어 회사 운영과 같은 골치 아픈 일은 그 애들이 하고 난 그저 인생을 즐기면 된단 말씀이야. 자네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친구로서 그저 함께 골프나 치고 술을 마시면 된다고!

친구: (놀리는 기분으로) 자네는 지금도 회장인 줄 착각하고 있구먼. 자식들에게 한번 빠져나간 돈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네. 한번 지나간 바람은 머물지 않거든. 자네는 이제 한신의 주인이 아니라 과거 영광의 그림자에 불과한 거야. 있는 거 같지만 실체는 없는 그림자지. 흐흐!

조한필: 자네,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날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지갑을 꺼내 명함과 카드를 보여주며) 이게 안 보이나? 그래도 난 한신의 명예회장이란 말일세. 나와 함께 예전처럼 흥청망청 즐기고 싶으면 나를 화나게 하지 말게. 난 자존심을 흔드는 어떤 말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난 한신의 그림자가 아니야. 한신의 알맹이요, 핵심 그 자체란 말일세.

친구: (한필의 과민한 반응에 물러서며) 그래, 자네가 그렇게 내 말을 곡해하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내 말을 명심하게. 한신에서 조한필의 자리는 이제 허울 좋은 명예일 뿐이야. 명예가 무슨 의미인가. 실권이 없는 명분만 주는 그림자란 말일세. 그림자란 무엇인가? 있는 듯하지만 해가 지면 사라지고 마는 허상일 뿐이지! (나직하게 초월자의 분위기로) 지금이야 한신을 차지한 딸들이 경영의 명분을 위해 자네에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석양의 빛을 잠시 허락하였지. 조만간 자네의 노을빛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말걸세. 그때 자네는 그림자조차 없는 거렁뱅이가 되는 거야. 자네와 좋은 우정이 금이 갈까 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다만 딸들이 약속한 것들이 잘 지켜지는지 나와 내기를 해보세.

조한필: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나마나 내가 이길 거니까. 만약에 내가 지면 자네에게 멋진 곳에 가서 좋은 술을 한번 사겠네. 만약에 자네가 지면 어떻게 할 텐가.

친구: (소탈하게 웃으며) 난 돈은 별로 없지만 쓴 소주라도 한잔 사겠네. 하지만 요즘 싸가지가 없는 젊은 자식들의 행태를 보면 내가 이기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네. 허수아비는 자신이 허수아비인 줄 모른다네. 참새들이 도망가니까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안단 말이지, 허허!

조한필: (자신의 주장을 우직하게 고집하며) 자네는 내 딸들이 얼마나 애비를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걸 보지 못해서 이런 의심을 하는 걸세. 여하튼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 수 있으니 딸들의 효성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조만간 만들어서 자네와 함께 지켜보세. 자, 그럼 내기도 걸었으니 골프 연습은 이쯤 해두고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고. (조한필이 친구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장면 4

아침 나절에 조한필이 친구와 함께 첫딸 한빈의 응접실에 앉아 있다. 한빈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예상보다 늦어지자 조한필이 화가 나서 안방 쪽을 노려본다. 잠시 후 한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늑장을 부리며 거만하게 나온다.

한빈: (하품을 하며) 아버님, 이른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오셔서 잠도 못 자게 귀찮게 하세요. 노인네가 잠이 없다고 새벽부터 설치면 어떻게 해요?

조한필: (한빈의 거친 말에 놀라며) 아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버르장머리없이 하고 있어? 친구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 친구하고 골프를 치러 가는 길에 할 말이 있어서 들렀다. 지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애비한테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고 불평하는 거냐? 회사가 분할되었지만 회장이 이토록 늦잠을 자면 어떻게 한신을 경영하겠다는 거야?

한빈: (짜증을 내며) 어젯밤 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뒤처리하느라 너무 늦게 자서 그런 거죠. 요새 회사 일이 한참 바쁜데 아버님께선 한가하게 골프를 치시면서 날 나무라시는 거예요! 어쨌든 아버님, 오늘 오신 용건은 뭔가요?

조한필: (한빈의 불손한 태도에 울화가 치밀어오르지만 참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래, 애비가 오래간만에 왔는데도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래, 이번 주말에 내가 너에게 물려준 이 저택에서 파티 좀 하려고 들렀다. 애비 나이가 팔십이 넘어가니 친구들이 보고 싶구나.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열어 서로 정을 나눌 작정이야.

한빈: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아버님, 하필 이렇게 바쁠 때 제 집에서 파티를 하신다는 건가요? 몇 분이나 초대하실 건가요?

조한필: 너도 알지 않니, 내가 이런저런 활동이 많아서 친구가 많거든. 하지만 아무리 줄여도 이백여 명은 되지 않겠느냐. 물론 식사 분위기를 살려줄 악단도 포함해서 말이다.

한빈: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버님, 팔순 잔치는 이미 퇴임하시기 전에 해드렸잖아요. 아무리 아버님께서 제게 물려준 저택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저의 집이 아닌가요. 어떻게 남의 집에서 그런 대규모 파티를 열 생각을 하세요? 요즘 사업이 복잡해서 제가 신경이 날카로워졌어요. 전 아버님이 늘 좋아하시는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딱 질색이거든요. 꼭 하시려면 친구분 숫자를 줄여서 백 명만 초대하세요.

조한필: (드디어 분노를 표출하며) 아니 뭐라고? 초대 손님을 반으로 줄이란 말이냐? 초대장을 이미 보냈는데, 애비 체면이 망가져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아니 네가 내 팔순 잔치를 해줬다고? 내가 돈을 다 대고 너희들은 그저 잔치의 들러리만 한 주제에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이 저택은 다른 재벌보다 더 신경을 써서 내가 지은 집이다. 비록 너에게 물려주었다고 하지만 소유권이 나한테 없다고 할 수 없지.

한빈: (얼굴이 굳어지며) 아버님께서 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백 명도 안 되겠어요. 꼭 파티를 하시려면 오십 명으로 줄이세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저택은 법적으로 저의 소유이고요. 아버님에게는 소유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밝혀 드립니다.

조한필: (벌떡 일어나 한빈을 향해 소리를 친다) 아니, 내게 소유권이 없다고! 애비를 깡그리 무시하려고 하는구나. 딸년에게 이런 불효막심한 모욕을 당하다니 내가 무슨 꼴인가! 내가 예전의 조한필이란 말인가. 아니지 이렇게 무력한 자는 분명히 조한필이 아니야. 이건 내 그림자일 뿐이야. 내 손으로 만든 한신을 딸년에게 주고서도 그림자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하다니! 조한필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게 틀림이 없어! 내가 뱉은 말을 번복하면 손에 장을 지지리라. 앞으로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나에게는 내 말이라면 신처럼 떠받드는 딸이 또 하나 있어.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애비를 배신하다니 천벌을 받을 년 같으니라고!

한빈: (능글능글 비웃으며) 아버님이 한신의 회장이 아니신 걸 이제야 아셨나요? 좀 늦었지만 다행이네요. 저도 아버님이 떠나신다니 앓던 이가 빠진 것같이 시원하네요. 매일 술이나 마시고 떠들어대는 아버님을 모시는 것이 이제 신물이 나거든요. 이 집을 나가는 순간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어서 한주에게 가서 엄청난 파티를 열어달라고 하세요. 떠나시는 분은 절대로 붙들지 않는 것이 저의 신조니까요. 부디 안녕히 가세요! 호호.

친구: 이런 망측한 꼴을 봤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자네에게 일어날 수 있냐고!

조한필과 친구와 함께 저택에서 나가자 한빈은 시원하다는 듯이 끽끽 웃어 제킨다.

장면 5

조한필이 친구와 함께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며 한주 응접실로 들어온다. 한주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조한필을 맞이한다.

한주: (속마음을 감추고 이중적인 태도로) 아버님, 무슨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가요. 왜 이렇게 연락도 없이 흥분하신 채 저를 찾아오셨나요?

조한필: (하소연하며) 한주야, 내가 지금 흥분하지 않게 됐니? 너의 언니, 한빈이 년이 날 배신했는데 내가 멀쩡하게 올 수 있냐 말이다. 돈도 권력도 그 년에게 모두 넘겨준 애비에게 은혜를 저버리고 내 등에 비수를 찌르다니 용서할 수 없구나.

한주: (능글능글한 어조로) 아버님,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하게 말씀하세요. 도대체 무슨 일로 언니에게 화를 내시는 거죠? 저는 항상 아버님 편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이렇게 아버님 초상을 목에 걸고 다니는 효녀잖아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기를 원하세요?

조한필: 내가 물려준 저택의 정원에서 친구들 이백 명을 초대해서 파티를 단출하게 열겠다는데 어떻게 반대를 할 수 있단 말이냐. 유산을 물려줄 때 애비가 당부한 약조를 깨면서 말이다. 초대한 친구들의 숫자를 반의반으로 줄이라고 협박을 하더구나. 천벌을 받을 년!

한주: 아니 아버님, 이백 명이 단출한 파티인가요. 이백 명을 초대한 파티는 엄청난 규모예요. 경비도 경비이지만 얼마나 소란스럽겠어요. 언니는 항상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잖아요. 언니가 반대할 만한 숫자라고요. 게다가 저택은 아버님이 물려주셨지만 지금은 법적으로 언니가 소유하고 있으니 주인의 사정을 고려해야죠. 숫자를 줄여달라고 하면 아버님이 양보해서 줄여주면 될 것을 일을 이렇게 악화시킬 필요가 있나요. 요새 언니의 회사 사정이 좀 복잡해서 그랬을 거예요.

조한필: 아니, 한주 너는 지금 한빈이 년 편을 드는 거냐? 애비가 재산과 권력을 모두 물려주고 나니 마치 볼장 다 봤다는 식의 불효년을 감싸고 도는 거야!

한주: (한필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버님, 언니와 내가 아버님의 회사를 물려받아서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아버지는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를 원하시나요? 언니가 반대하는 아버님의 파티를 제가 덥석 찬성한다면 언니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는 아버님을 사랑하지만 이 일로 자매간의 우애를 깨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언니가 한신의 회장이잖아요. 저는 언니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고요.

조한필: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한주, 네가 애비에게 했던 사랑의 맹세를 잊었느냐. 애비의 말을 네 목에 걸린 묵주처럼 항상 간직하고 살겠다고 하더니 애비를 능멸하려고 하는구나.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한주: (한필의 반발을 묵살하며) 일단 언니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이 먼저 사과를 하세요. 아버님이 정 파티를 하고 싶으시다면 언니가 제안한 대로 반의반, 아니 그 반으로 줄여서 하세요. 그럼 제가 언니의 양해를 받아 저의 정원에서 파티를 열어드리겠습니다.

조한필: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분통을 터뜨리며) 뭐라고! 반의반의 반이라고! 이 년은 한빈이 년보다 더 악독한 년일세. 아, 조한필이는 틀림없이 딸년들에게 능욕을 당한 허수아비로구나. 내가 이런 불효년들의 발에 짓밟혀 헐떡거리는 늙은 애비에 불과하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난 어디에 있는 건가. (분열증 증세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며) 저런 딸년들을 둔 애비가 왕년의 조한필인가 아니면 이 년들에게 짓밟힌 그림자일 뿐인가. 이건 분명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야. 짐승들도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없지. (한주에게 다가가며) 이 년들은 분명 악마의 화신들이야! 아니, 악마보다 더 지독한 년들이야!

친구: (한필을 껴안고 다독이며) 한필이, 자네가 참게나. 화가 너무 지나치면 자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걸세. 자네는 나와 약속한 내기에서 완패한 거야. 자네가 술을 살 일만 남았군. 자, 가세.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아무리 황무지라도 이보다는 나을 걸세. 이런 빌어먹을 세상 다 잊어버리게 술이나 왕창 마시자니까.

조한필: (비틀거리며) 아, 세상이 빙빙 도는구나. 하늘이여, 이 년들을 번갯불로 태워버리소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배신의 악귀로 변한 둘째 딸년을 지옥불 속으로 던져버리소서. (한주에게 삿대질을 하며) 너도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네 년도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라고. 네 년들의 이름을 조 씨 가문의 족보에서 영원히 지우리라.

친구: 한필이 정신을 차리게. 이런 악마의 소굴에서 빨리 나가세.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이놈의 집에서 어서 나가자고.

쓰러지려고 하는 조한필을 친구가 부축해서 밖으로 나간다.

장면 6

파고다 공원에 노인들이 모여 있는데 그들 가운데 초췌한 꼴의 조한필이 친구와 만나고 있다. 약간 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조한필을 친구가 겨우 자제시키고 있다. 노인들은 대화에 끼어들려는 조한필이 분열증을 보이자 그를 밀어내고 만다. 조한필이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노인들 앞으로 나아간다.

조한필: (휘청거리며 말을 더듬으며) 저기 여러분들 저는 그림자 조한필입니다. 이제 사람이 아니죠. 딸년들에게 쫓겨났으니 거지나 다름없군요. 기가 막혀서 여러분들에게 호소하려고 여기 왔어요.

친구: (조용히 달래면서) 한필이, 힘없는 노인들에게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나. 다 잊어버리고 술이나 한잔 마시자니까. 자네가 내기에서 졌으니까 멋진 곳에서 술을 사야 할 거 아닌가.

조한필: 파고다 공원에 계시는 노인 여러분들, 제 말을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저는 얼마 전까지 한신 그룹의 회장으로 떵떵거렸던 조한필이라고 합니다. 온 세상을 안방처럼 주무르듯이 살았으니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참 죄를 지었네요. 한 번도 여러분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으니 인생을 잘못 살았고요. 그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가족들과 부하들에게 갑질을 하며 살아왔던 죄인입니다.

친구가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한솔과 비서실장에게 차례로 조한필의 상황을 설명한다.

친구: (비서실장과의 전화를 끊고 한솔에게 전화를 건다) 한솔인가? 지금 자네 아버님이 파고다 공원에서 분열증을 일으켜 야단났어. 빨리 좀 와주어야겠어. 비서실장에게도 빨리 와달라고 전화했어. 아마도 분열증이 더 악화하면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갈 수도 있을 거야.

조한필: (노인들에게 일방적으로 한탄하며) 사업을 잘 운영하다가 이상한 변덕의 바람이 불어왔죠. 권태로워서 사업도 더 이상 싫었고요. 평생 매달리던 회사 일도 갑자기 시시해지더라고요. 모든 재산과 권력을 딸들에게 다 던져주었죠. 그냥 술이나 마시고 놀면서 살고 싶었어요. (점점 격해지면서)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사랑을 맹세했던 딸년들이 나를 배신했어요. 빌어먹을 년들이죠. 인간이 아니에요. 친구들과 즐길 파티 좀 하겠다고 했더니 애비를 집 밖으로 내몰았어요. 짐승보다 못한 악마들이죠. 자식이 부모를 집에서 내쫓다니 어찌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입니까? 그것들이 짐승이 아니라면 유산을 받아 챙긴 후에 안면을 바꾸고 애비를 개돼지 취급을 할 수 있습니까.

친구: (달래서 무대 한쪽으로 이끌려고 애쓰며) 한필이 자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 정도로 하고 그만두게나. 자네 가문뿐만 아니라 한신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단 말일세.

조한필: (친구를 뿌리치며) 아니, 지금 내가 가문이든 한신이든 이미지를 생각할 때인가. 조한필이는 불효막심한 딸년들의 배신의 화살에 맞아 이미 죽고 없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조한필이 아니고 나의 유령인 게야. 내가 조한필이라면 배신한 두 딸년들을 사랑을 거짓 고백한 죄로 입을 찢어버렸을 거야. 정신이 나간 늙은이지! 그 따위 거짓말에 속아서 뱀의 혀를 가진 두 딸년에게 재산과 권력을 모두 주어버리다니. 그러고도 딸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다니 그게 말이 되나. 이러고도 어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아아, 세상이 팽이처럼 빙빙 도는구나. 빙빙빙 돈단 말이야! (땅바닥에 쓰러진다)

친구: (안쓰러워 눈물을 글썽이며) 그때 내가 뭐라고 하던가. 자식들에게 한번 흘러간 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제 잊어버리게. 곧 자네의 충직한 비서실장과 셋째 딸 한솔이가 올걸세. 정신을 차리라고.

조한필: (울먹이며) 내가 진정한 친구인 자네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어. 이제 돌이켜보니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지. 그러니 난 고통을 받아도 싸네. 좋은 약은 입에 쓰듯이 날 위해 해준 충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했으니 말이야. 나에게 충성했던 비서실장을 해고한 것도 용서받지 못할 실수였던 거야. 한솔이가 은퇴를 말렸었건만 거짓 사랑 맹세를 안 한다고 유산 한 푼 없이 내쫓았지. (울음을 터뜨리며 격하게) 빌어먹을, 한심한 늙은이지.

내가 무슨 염치로 막내딸 한솔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나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네 그려.

비서실장이 오른쪽에서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서 광증 상태의 조한필을 포옹한다.

비서실장: 회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제가 더 참고 회장님을 보살펴드려야 했었군요. 성질대로 바른말만 한다고 회장님을 떠난 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군요.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마음을 강하게 가지십시오. 한신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정신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회장님!

조한필: (반색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아니, 비서실장! 자네가 여기에 웬일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나에게 충성했지만 내 명령을 안 따랐다고 해고한 몹쓸 인간을 왜 찾아왔나. 미쳐가는 나를 그냥 내버려두게. 나는 자네의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작자일세.

비서실장: (적극적으로 격려하며) 회장님, 지금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회장님에게는 막내딸 한솔 아가씨가 있지 않습니까. 따님은 지금 규모는 작지만 벤처 사업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사업을 일구겠다는 공언을 착실하게 실현하고 있다니까요. 친구분께서 연락하셔서 곧 이리로 오실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세요.

친구: 한필이, 비서실장의 말이 맞네. 한솔이가 곧 이리로 오기로 했다니까.

조한필: (손을 내저으며 숨으려는 자세로) 아, 그 애가 온다면 난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어야 할 걸세. 무슨 염치로 그 애를 만난단 말인가. 난 비서실장이나 한솔이를 만나서는 안 돼. 오갈 데 없는 이 노인들처럼 버려진 존재일 뿐이야. 지금까지 내가 두 사람에게 준 상처만큼 아니 몇 배로 고통을 받아야 하네. (주위를 돌아보며 뭔가를 찾는다) 회초리라도 있으면 주게. 난 죽어도 싸다고. 제발 날 내버려두란 말이야! (조한필이 정신 분열을 일으키며 광증을 일으키다 쓰러지고 만다)

비서실장: 회장님, 정신 차리세요!

친구: 한필이! 조금만 기다려, 한솔이가 오고 있다고! 비서실장, 이거 이대로는 안 되겠구먼. 빨리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야겠어.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친구가 조한필을 부축하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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