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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석(思惟石)

한국문인협회 로고 임병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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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은 사람을 끌어안은 매력이 있다. 그런 만큼 한번 빠져들면 멀리하기 어렵다. 이는 막연히 남에게 들은 말이 아니라 내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일이다. 그만큼 한번 빠져들면 멀리하기 어렵다.

애석생활은 취미생활이다. 하지만 일종의 도(道)에 가깝다. 그런 만큼 해찰 부리듯 대할 것은 아니고 진중한 가운데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한데, 애석생활을 하면서 가끔 떠올리는 것이 있다. 그것을 감상하는 태도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단정히 바라보면 바로 산하를 보는 기분이라 비와 이슬은 그 봉우리 아래 있으니 어찌 초목이 번성하는데 부족함이 있겠는가. 머리 들어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자 하니 지극히 높고 가파르며 반드시 그 밑에는 신선한 물이 있음을 알겠다.”

이 말은 송나라 때 사람 미원장이 한 말이다. 그는 수석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수석의 조건을 제시했다. 소위 투·준·수·수(透·준·瘦·秀)라고 하여 수석은 모름지기 구멍이 뚫리고 주름이 잡혀야 하며 파리하고 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중에 구멍이 뚫려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원칙이다.

그는 수석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한 말을 곱씹어 보면 얼마나 수석을 애완하며 깊이 감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사유하는 생각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상상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렇다면 미원장은 그 사색의 씨앗들을 발아시켜서 얼마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일까.

사람의 마음 안에는 기(氣)가 깃들어 있어 그것이 입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데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이 파동을 일으켜 전달이 된다고 한다.

일종의 기(에너지)의 발현 현상인데, 애석(愛石)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다. 눈앞에 놓인 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면서 어디론가 이끌려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현상 때문일까. 나는 일찍이 1970년대 중기부터 그런 수석의 이끌림에 빠져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렴풋이 짐작하기로 돌 자체 부질(賦質)에 이끌려 들었지 않나 생각한다.

사실로 말해 돌은 무언의 철학 성을 내포하고 있다. 의미 없이 바라보면 그냥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그 연륜이랄까, 존재 의미를 짚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리가 대하는 돌멩이는 놀랍게도 그 탄생이 지구 역사와 함께해 왔다. 지구 나이가 45억 년이니 돌도 그만큼 나이를 잡수신 것이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엄청난 수억 겁의 세월을 지내온 존재인가.

우리가 쓰고 사는 석유가 오래 전에 살았던 공룡들의 유기체가 썩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세월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돌의 역사에 비하면 그것은 지극히 최근에 지나지 않는다. 불과 43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돌은 그보다 수십억 년이 앞선다. 그걸 생각하면 수석 앞에서 마음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연륜만으로도 충분히 압도를 당하게 된다. 그러한 까닭에 돌의 형상을 보면 엄숙해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엄숙함은 그 형태가 바위 형이거나 입석일 때 더욱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된다. 나는 컴퓨터가 놓인 서상 옆에 입석 한 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 외에도 거실에 대여섯 점, 안방에 한 점, 침실에도 하나를 두고 있고, 그밖에도 베란다에 상당수의 수석을 두고 있다.

이것을 나는 주기적으로 교체하여 감상한다. 그런 가운데 이즘 나는 서재에 놓인 수석에 눈길을 많이 빼앗긴다. 남한강 수마석인데 가로 24cm, 높이 33cm의 규격석이다. 이 돌은 좋은 돌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밑자리가 좋고 살이 찌지 않아 파리하며, 그러면서도 듬직해 보인다. 그 산정에는 아름다운 경도 품고 있다. 무엇보다 빼어난 미점은 골과 파임이 많아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주름은 마치 노인의 뱃가죽처럼 접혀 있다. 이 돌은 1970년대 초, 수석가게 주인으로부터 입수했다. 내가 사는 고장에 수석가게가 다투어 문을 열었는데, 그때 잠시 잠깐 선보인 돌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자 대번에 시선이 꽂혀 빠져들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수석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애석인들이 수석이라면 일단 남한강돌, 그것도 피면이 번들거리거나 물형석을 선호하던 때인데 나는 그 돌에 꽂혀버렸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아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다. 이 돌을 나는 매우 아낀다. 볼수록 기품이 당당 애장하고 있다. 뼈다귀만 남은 골석이 웅장한 입석경을 이루니 눈길이 자주 간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기가 발산하여 머릿속의 뉴런이 움직인다. 나는 때때로 이 돌을 보면서 생각한다.

‘왜 이런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눈앞에 우뚝 선 형상이 신비하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주름과 파임. 그리고 무한한 변화들. 그것을 감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연을 생각해 본다.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돌중에서 어찌하여 내게 안기게 되었을까. 멀리 충청도 남한강 어느 강가에서 남녘까지 흘러온 동안, 얼마나 닳고 닳았을까. 홍수에 떠밀리고 짓눌리면서 흙속에 파묻히고 드러나기를 반복하며 혹서와 혹한도 수없이 견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자칫 무미해질 생활에 정신적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몰두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 돌인 만큼 아끼고 사랑한다. 내게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사색을 선물해주니 애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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