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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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다. 밀려 들어온 바람이 창가에 둔 책을 거칠게 들추며 빗줄기가 안으로 들이쳤다. 창문을 닫다 보니 아파트 광장 한쪽 분리수거장에 검은 피아노가 비를 맞는다. 아파트 상가 내 피아노 학원 간판이 부서진 옆에 돌아보는 이 없는 피아노가 비를 맞다니. 오랜 세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던 서툰 손길들을 피아노는 아직도 기억할지 모르는데 오늘은 혼자 비에 젖는다.
아직 소리가 날까? 음도 고르지 않을 거야. 에이 고치면 되지. 조율도 다시 하고. 그동안 힘껏 노래하고 이제 그 기능을 다 해 폐기물이 된 피아노를 보는 내 속이 시끄러워졌다. 갑자기 거실을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피아노 들여놓을 공간을 찾았다. 더는 갈 곳 없는 피아노를 내 집에 들이기라도 할 듯이. 아니다. 다 짐이다. 내가 이제 무슨 피아노를 친다고. 게다가 저 피아노는 고칠 수도 없다. 나도 가벼워져야 하는 시간, 버려야 할 때다. 더는 일 벌이지 말자.
쏟아지는 비도 그 비를 피해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도 무심한데 나는 비를 맞는 피아노에 마음이 묶여 움직이질 못한다. 하지만 이미 그 피아노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릴 때 내가 피아노를 포기했던 그때처럼.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가 강원도 산골 학교에 새 피아노가 처음 들어왔다. 학교엔 낡은 오르간 세 대가 다였는데. 그나마 한 대는 고장 나서 두 대를 가지고 음악 시간이면 서로 제 교실로 가져가려고 신경전을 벌이던 때였다. 피아노는 빛이 났고 뒤이어 오신 젊고 잘생긴 ‘피아니스트’ 선생님은 더욱 빛났다. ‘피아니스트’라는 낯선 말은 내겐 눈부셨고 너무나 거대했다. 그 바람에 선생님 이름은 기억에도 없다. 조용한 시골 학교에 피아노 연주가 실제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낡은 풍금 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그날부터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자주 피아노실로 갔다. 어느 날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서 몰래 들여다보는 나를 피아니스트 선생님이 불렀다. 그리곤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수줍어 고개만 끄덕였다. 나를 한참 바라보던 선생님은 피아노를 가르쳐줄 테니 엄마 허락받고 오라고 하셨다.
엄마를 며칠 졸랐다. 엄마는 그때마다 말없이 자리를 피했고 나는 쫓아다니며 졸랐다. 하루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너한테는 동생들이 많은데 어떻게 너만 피아노를 가르치냐고. 선생님 수고비도 드려야 하는데 우리 형편으론 그게 어렵다고. 어린 내 가슴에 무엇인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엄마의 슬픈 목소리 때문에 다시는 더 조를 수도 없었다.
그 후로 나는 피아노실에 가지 않았다. 선생님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피아노를 배우러 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냥 창밖에서 몰래 연주 소리만 들었다. 가을이 올 무렵 시골 학교에 잠시 머물던 선생님은 도시로 떠나셨다. 그리곤 피아노실은 문이 잠겨 아주 이따금 누군가 서툴게 건반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게 다였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이 그 시골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동안 ‘피아니스트’가 떠난 자리엔 소문만 무성하게 떠돌았다. 잠시 몸이 아파 요양차 이 시골에 머물렀다고도 하고 원래 유명한 사람이라 도시에서 다시 불러 갔다고도 했다. 그 소문도 차츰 잦아들었고 그렇게 피아노는 내게서 멀어졌다.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때야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그날 잠든 식구들 사이에서 나는 설레어 잠들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어린 날 들었던 그 선생님의 피아노 소리가 꿈처럼 지나갔다.
나는 피아노를 못 친다. 게다가 음악적 재능도 없다. 그런데도 피아노 소리는 좋다. 그 소리에는 이루지 못했던 내 꿈들이 깃들어 나도 모르게 마음을 머물게 하는 아릿함이 배어있다. 잊히지 않고 남아있던 꿈도 이제 돌아보면 그저 혼자 웃고 마는 옛사랑 같다. 잊고 살던 사람 같은 꿈 한 조각이 지워진 줄 알았더니 지금 비를 맞으며 선명해진다. 정지된 어린 날 꿈이 저기 앉아서.
피아노는 난생처음으로 비를 만나겠지. 빗물에 온몸이 젖으며 희미한 옛 꿈을 더듬을 거야. 어느 날 학원의 작은 방음 방을 나와 멋진 공연장에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만나는 꿈이었을지도 몰라. 유연한 손가락 춤에 맞춰 잊을 수 없는 음으로 마음껏 소리를 내 보고 싶었을 거야. 그 음률로 사람들 가슴마다 출렁이게 하는 꿈이었으리라.
넉넉한 형편이 아니면 배울 수도 가질 수도 없던 아련한 꿈의 피아노가 이젠 폐기될 일을 앞에 두고 비를 맞는다. 버려진다는 것, 더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텅 빈 시간이 빗줄기처럼 다가왔다. 폐쇄된 길 끝에서 지워진 꿈속을 헤매는 여름 오후, 소나기가 가슴의 갈피를 헤집고 내린다. 피아노도 나도 아직 기억하는 꿈이 아픈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처럼 빗물이 흐른다.
금방 그칠 것 같던 비는 장대처럼 땅에 꽂히며 쉽게 멎질 않는다. 피아노는 빗물에 젖으며 눈을 감고 말이 없다. 피아노 뚜껑은 닫혀있는데 그 빗물이 자꾸 내게도 스며들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자꾸 늘어가는 늦은 오후, 버려진 피아노를 나도 눈으로 이별한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어디선가 피아니스트 선생님의 그 연주가 들린다.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버려진 피아노의 건반 위에서 춤추는 듯이. 빗줄기는 피아노 위로 떨어져 흐르는데 꿈인 듯 내 하루는 어느새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