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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산고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기성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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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산고(産苦) 중이다. 지난가을 구절초가 만개하던 개울가 언덕배기에는 녹지 않은 싸락눈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킬 뿐, 모든 게 황량하고 삭막하다. 공허만이 대지를 움켜쥐고 주위를 서성인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얇은 살얼음으로 뒤덮인 틈새를 비집고 튕겨 나온 은빛 물살의 조잘거림과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단숨에 넘지 못해 헉헉대며 용케도 빠져나온 삭풍의 소리뿐이다.

저 멀리 희뿌옇게 보이는 흰뺨검둥오리 가족은 갈대를 병풍 삼아 모래톱에 을씨년스럽게 몸을 웅크렸고, 개울가 야트막한 바위돌 옆에서 왜가리 한 쌍이 한쪽 다리를 든 채 결가부좌하며 속세의 연을 끊은 양 삼매경에 빠졌다. 오로지 정법을 믿고 수행하는 수도자의 고행과 정진만이 오롯이 이 곳을 지배할 뿐이다. 봄의 산고가 멀고도 길어 보인다.

살을 에는 듯한 숨죽인 개울가 야트막한 모래사장 끝자락에는 물달개비며, 질경이, 물옥잠, 꽃창포가 진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고개를 마냥 숙인 채 꿀잠에 빠졌다. 자연의 지엄한 질서와 섭리는 모든 생명체를 일순간 ‘공(空)’으로 몰아넣었다. 간간이 울어대는 청둥오리의 울음소리가 ‘산 자여 들으라’는 자명종시계 역할을 톡톡히 해낼 뿐이다. 정적과 침묵이 모든 걸 송두리째 에워쌌다. 봄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긴 채 여전히 산고 중이다.

가파르게 비탈진 응달기슭에 길게 눌어붙은 담쟁이넝쿨이 눈에 밟힌다. 지난가을 자주색 줄기마다 옹골차게 엉겨 붙었던 진녹색 잎새는 온데간데없고, 오그라든 황갈색 잎사귀 몇 개만이 바위틈에 힘겹게 매달렸다. 만년(晩年)의 매무새가 측은하고 안쓰럽다. 이 모든 걸 계절이 주는 자연의 이치로만 읽기에는 애잔하고 처량하다.

눈앞 천지만물이 무(無)요, 열반 상태다. 무(無)일지언정 존재하지 않거나 텅 비어 있는 것만은 아닐 게다. 무수한 인과(因果)들이 서로 연결되어 맞닿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무와 유가 남이 아니듯, 생과 사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으리라. 이게 있기에 저게 있고, 저게 없으면 이것 또한 없으리니.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는 해탈이 멀지 않아 보인다. 깨달음과 맞닿아있다는 것 같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를 생각하니, 지금 여기 무(無) 속에 있으면서도 산고를 통해 봄은 기어이 오고 말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한 줄기 들풀과 무엇이 다르랴. 들풀이나 우리 중생도 어쨌든 똑같은 DNA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던가. 그러니 영원한 소멸도 영원한 생명도 없어 보인다. 이런 이치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지엄한 운명이며 거룩한 숙명으로도 보인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는 순리 말이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며 받아들이는 수도원 수행자의 순명이 이런 것이 아닐까. 만물에 우연은 어디에도 없다. 산고 없는 출산이 없듯, 산고 없는 봄이 어디 있으랴. 참을 수 없는 골반통증을 겪고 나서야 새 생명이 탄생하듯 고통 없는 개화(開花)가 어디 있으랴.

비정하리만큼 냉혹한 혹한 속에서도 양지 바른 개울녘 언덕에는 벌써 삼월이 서성인다. 이월은 삼월과 맞닿아 있어 터울이 옅은 형제지간과 진배없으나, 형제라는 혈육만으로 이월과 삼월을 한 우리 속에 가둬두기에는 너무 낯설고 물설다. 한쪽이 냉기(冷氣) 편이라면, 다른 한쪽은 온기(溫氣) 편이니 말이다. 형제지간은 맞지만, 성이 다른 이복형제다. 출생의 비밀을 그들만은 알고 있을 게다. 그러니 이월의 겨울과 삼월의 봄은 개와 원숭이마냥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어쭙잖은 견원지간이 아닐까.

저 멀리 봄의 전령사가 손에 잡힐 듯 말듯, 보일 듯 말듯 아른거린다. 봄의 산고를 용케도 겪어낸 동백나무다. 봉긋 솟은 짙은 붉은 색 몽우리가 제법 튼실하다. 설한의 한파를 견디기 위해 동백은 꽃망울 주변에 거북등 철갑으로 단단히 에워쌌다. 지난겨울 싸락눈을 먹고 자란 초록 잎사귀가 유난히 튼실하고 당차다. 대한(大寒)에는 보이지 않던 망울이 입춘이 오기도 전에 붉은 기운이 어슴푸레 감돌기 시작했다.

구태여 엄동설한에 이 동백은 살을 헤는 힘든 산고를 왜 결심했을까. 동백은 골반을 찢는 산고의 고통을 구태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저 삭이며 감내할 뿐이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동백의 끈기와 참을성은 어디서 왔을까. 오직 하나, 이걸 염원하며 견뎌낼 뿐이다. ‘움틈’이다.

동백은 동안거(冬安居)로 칩거에 들어간 스님들과 무엇이 다르랴. 둘은 개화와 득도를 얻기 위해 긴 인고의 시간을 스스로 자청한 수행자들이 아닌가. 그들의 화두는 세속의 모든 연을 끊고, ‘내’가 누구인지를 향해 끝없이 구도하고 정진하는 묵언수행과 다름 아니다. 동백은 동안거의 산고 없이는 득도도 개화도 해탈도 오지 않음을 진작 알고 있었으리라. 봄은 어쨌든 형용하기 힘든 산모의 ‘산고’를 치르고 나서야 우리 곁에 아롱대며 기어이 찾아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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