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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심는 일

한국문인협회 로고 강향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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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하루 전, 마음이 들떴는지 잠이 쉬 오지 않는다.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비몽사몽 일어나 시간 맞춰 공항으로 나간다. 대한불교 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장 태효 스님을 비롯해 회원들 60명과 떠나는 3박 4일의 평화 순례길로 백두산 및 북중 접경지역을 도는 일이다.

선 그은 복잡한 세상과 다르게 하늘길은 맑고 환하게 열려 있다. 하얼빈 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동북열사기념관으로 향한다. ‘육신에는 나이가 있지만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고 했던가. 젊은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운 열사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린다. 비록 육신은 적군에 의해 처참하게 쓰러져 갔다지만 아직도 그들 영혼은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서리서리 품어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하얼빈경찰청으로 쓰였던 이 자리에 항일열사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모셔진 100분 중 허영식, 박진우, 양림 등 조선인 항일열사의 영정도 있다.

호텔 회의실에서 이창희 동국대 북한학과 외래교수의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와 분단, 그리고 평화통일의 미래’ 주제의 특강도 들었다. 새삼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튿날,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탐방길을 나선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가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듯싶다. 의사의 흉상 앞에 헌화하고 묵념한다.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만큼 그분의 표정은 담담해 보인다. 아니 쓸쓸하고 외로움에 지쳐 무디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국땅 머나먼 땅에서 본 그분의 흉상이 가슴에 새겨진 듯 내내 잊힐 것 같지 않다. 문득 남산 자락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갔던 기억을 더듬는다. 조국의 영웅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분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얼빈역에서 고속철을 타고 장백산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옥수수밭 풍광에 취한 시간만큼은 일상의 잡다한 일들과 작별을 고한다. 공리가 나온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이 간간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대지를 지키는 파수병들처럼 옥수수는 저희끼리 부대끼며 바람을 맞는 듯 이리저리 휩쓸리는 듯 보여도 결국엔 모두가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다.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백두대간의 시발점인 백두산으로 향한다. 장엄한 천지와 한반도 자연을 조망할 예정이라니 가슴이 뛴다. 3박 4일 빠듯한 일정에도 피곤함은 잊은 채 오히려 머리가 더 맑아지는 것 느낌이다. 조국을 향한 열사들의 정신이 스며든 것이런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지는 것도 잘못 살아온 탓이려니, 남길 것 없는 나 자신을 향해 쓴소리를 해댄다.

아침 일찍 서둘렀음에도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일정 내내 동행한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날 백두산을 찾은 관광객이 무려 1만 5,000여 명이라고 한다. 1년 중 파랗고 맑은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고작 20일뿐인데, 우리가 온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라고 하니 선물이라도 받은 듯 얼굴 가득 기쁨이 차오른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오른다. 두근두근 겁이 나기도 하면서 기대가 꿈처럼 솟는다. 해발 2,750미터를 자랑하는 백두산의 위엄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철없이 심장이 널뛰기한다.

사진으로만 보던 백두산을 실제 직접 내 눈으로 보다니…. 감동에 겨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자꾸 목에서만 맴돌 뿐 선뜻 나오지 않는다. 백두산 정상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데도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청명한 햇빛이 그대로 투영된 천지가 마치 신비로운 그림처럼 보인다. ‘와’하는 짧은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다. 모든 생각이 멈춰버린 표정으로 천지를 바라본다. 무언가를 더하거나 덜어내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행복감에 겨워 정신의 빈곤함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자연의 웅장함에 고개를 숙이듯 나는 내가 꿈꾸는 어떤 소망이 천지에 닿기를 기도한다. 특히 동파를 넘어다본 우리는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평화통일에 대한 바람이 천지를 넘어 한반도 전역에 퍼지길 간절한 마음으로 합장한다. 본부장이신 태효 스님은 “오랜 기간 소통과 교류의 단절로 남북 분단의 벽이 더욱 두꺼워지고 있다”며 “이번 순례가 남북 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씨앗이 되어 평화통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원한다”는 말씀으로 이번 여행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기도가 시원스레 퍼져가는 느낌이랄까, 장백폭포 천지의 물줄기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엄한 광경에 마음이 활짝 열린다. 끝없이 흐르는 물줄기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경계마저 씻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순례단의 작은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평화의 꽃을 활짝 피웠으면 하는 바람이 이어질수록 사상으로 금 긋고 담친 대지도 하늘길처럼 열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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