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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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흩어진다. 어떤 기억은 강하게 남는다. 기억이 사라지고 남는 건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계속 남고, 어떤 기억은 고이 담아두려 해도 사라진다. 나에겐 소중한 어떤 기억이 있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사라질까 두렵고, 또 너무 소중한 나머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다. 사라지는 것은 곧 잊는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곧 얽매임이다. 그래서 두렵다.
이 글은 어떤 기억을 위해 적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동시에 잊지 않으려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기억 하나.
한창 무더운 지난여름의 어느 날, 이모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왔다. 외할아버지께서 급하게 쓰러지셔서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오시게 되었는데, 당장 내일 오전에 간병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이 일어나 응급실로 달려갔다. 이모가 응급실 앞까지 마중을 나와 계셨다.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눈물을 왈칵 쏟으셨다. 한참을 고맙다고 중얼거리셨다. 나는 그럴 것이 없다고 했다. 이모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나의 외할아버지이신 분이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외할아버지께서 몸을 제대로 가누시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소변도 내가 직접 받아야 한다고도. 아무렴, 그런 것들은 괜찮았다. 병원이 무척 넓어서, 외할아버지의 병상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병상에 도착하니, 온몸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노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 살갗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붉은 반점이었지만, 사실 당신의 몸은 이미 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 반점은 그를 치료하던 과정에서 복용한 약의 부작용이었다. 한눈에도 기력이 많이 쇠하였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고, 팔뚝에 박힌 여러 주삿바늘과 연결된 여러 관은 마치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당신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외할아버지께서 서서히 눈을 뜨셨다. 그러고는 힘겨운 목소리로 빛이 밝으니 눈을 가릴 안대를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나는 허겁지겁 근처 매점으로 달려갔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안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러고는 다시 잠에 드셨고, 비교적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억 하나.
나는 어릴 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에 나는 몸이 무척 왜소하였는데, 외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데리고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곤 하셨다. 때로는 내 손을 잡고, 때로는 당신의 등에 나를 업고 방방곡곡을 누비셨다. 집 바로 앞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일을 보실 때면 나를 가장 푹신한 손님 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주곤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하루는 외할아버지와 오토바이를 타고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다녀왔다. 위험하다며 극구 만류하시던 외할아버지는 내가 울며 조르자 옷가지로 당신과 나를 꽁꽁 묶으시고는 내가 뒷자리에 타는 것을 허락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시동을 걸고 가능한 한 가장 느린 속도로 운전하셨다. 나는 무척 무서워하면서도 얼굴을 힘껏 때리는 바람을 만끽했다. 외할아버지 등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저녁놀이 아직도 선명하다. 외할아버지의 등은 무척 넓어서, 저무는 태양을 거의 가리고도 남았다.
기억 하나.
나는 혼자 시외버스를 탈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일 년에 두세 번은 꼭 외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외할아버지는 늘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식당으로 늘 나를 데려가 늘 삼겹살을 주문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늘 젓가락을 거의 들지 않으셨고,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며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늘 말씀하셨다. 내가 밥을 먹고 있을 때면 식당 사장님에게 늘 내 자랑을 하셨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늘 집 앞 시장에 들러 나더러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으셨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하면 내가 입맛이 없는 줄 아시고 서운해하셔서, 늘 무어라도 사서 집에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집에 돌아가려 일어나면 늘 아쉬운 표정을 지으셨다. 늘 나를 밖까지 바래다주셨고, 늘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를 주름진 손으로 내게 쥐여주시며 집 가는 차비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다음 번에도 고기를 먹고 싶거든 언제든 외할아버지를 찾아오라고 늘 말씀하셨다. 나는 늘 외할아버지를 꼭 안으며 다음에도 또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왜일까, 안을 때마다 외할아버지의 힘이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지금.
얼마 전, 사촌형의 결혼식이 있어 다녀왔는데, 모처럼 외할아버지를 뵈었다. 반듯한 양복에 다소 어색한 나비넥타이를 하고 계셨다. 여름에 당신을 뒤덮었던 붉은 반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도 더 기력이 쇠하신 듯했다. 듣기로는 아예 약물 치료를 중단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더랬다.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온전히 누리시길 원하는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일정이 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친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외할아버지를 꼭 안았다. 그동안 안았던 그 어떤 당신의 모습보다도 작고 약했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나섰다.
나는 당신과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다. 결코 당신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못하고 얽매이기만 한다면, 나는 당신과의 작별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이 글은 내 사랑하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위해 적혔다. 결코 잊지 않으려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동시에 잊으려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