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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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자 목련나무의 하얀 봉오리가 옹골차고 탐스럽게 피어난다.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봄기운에 마음은 한량없이 가볍다. 하지만 ‘올해는 덜 춥네’ 하는 순간 매서운 추위가 뒤통수를 친다. 3월에 부는 차가운 바람은 이미 봄이 왔다고 설레발치는 나에게 어디 감히 알랑거리냐고 따지듯 냉기를 거침없이 퍼붓는다. 잊고 있던 겨울의 매서움이 꽃샘추위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온몸을 얼어붙게 한다.
꽃샘추위는 말 그대로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라고 한다. 이때 부는 고약한 바람은 놀부 심보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포악해진 추위에 소스라치게 떤다. 유독 3월 꽃샘추위에 나는 예민하다. 그건 19년 전 그날이 뼈에 사무쳤고 삶이 진저리나게 춥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빠 부부는 서울에 살았다. 명절이 되면 10시간이 걸리는 귀경전쟁을 치르면서 부산에 왔다. 갓 결혼한 26살 올케언니는 투병 중인 엄마 대신 맏며느리 역할을 했다. 언니는 부산에 도착해 떠날 때까지 부엌과 한 몸이 되었다. 명절 음식을 비롯해 방문하는 친지들 식사 챙기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며 부엌을 떠나지 않았다. 주변 친척들은 그런 올케가 요즘 젊은이들과 다르다며 착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철없는 나는 칭찬받는 언니가 부러워 괜스레 질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시부모와 함께 살면서 올케언니가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언니에게 학업은 탈출구였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전공을 영문학에서 여성학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뜬금이 없어 의아했다. 하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병든 엄마는 서울 오빠네로 갔다. 언니는 엄마 돌보는 일을 비롯해 가사일, 육아, 시댁의 대소사 등을 챙겼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딸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숨가쁜 일상의 시간을 쪼개 학업에 매진했다. 마침내 언니가 박사학위를 받던 날, 언니가 꿈을 마음껏 펼치면서 살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그 꿈을 누가 시샘했는지 그만 냉혹한 칼바람에 꺾이고 말았다.
어느 날 언니가 위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거짓말 같았다.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결과가 좋아 잠시 희망을 되찾았다. 하지만 재발했다. 입원한 올케언니를 보러 병원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져 도토리처럼 생긴 모자를 덮어쓴 언니가 낯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 나에게 “아가씨, 갑갑한데 밖에 나가자”라면서 오후 햇살이 스며드는 병실을 앞장서 나섰다. 딱딱한 사각형의 병실에서 나와 탁 트인 야외 정원에 갔다. 이미 꽃샘추위를 극복한 봄은 5월 신록으로 싱그러웠고 하늘은 더할 수 없이 맑았다. “아가씨, 하늘이 참 맑고 푸르네. 내년에도 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신록 같아야 할 올케언니가 야위어 누렇게 시들시들해진 모습에 목울대만 꿈틀거렸다. 생과 사의 팽팽했던 무게 추가 확연히 죽음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올케언니는 감지했다. ‘당연하죠’라는 말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하게 목구멍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다음 해 3월, 꽃샘추위가 유달리 극성을 부리던 날이었다. 당시 차로 이동이 잦은 일을 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낸 뒤라 차 안에서 잠시 여유를 가졌다. 따스한 오후 햇살에 몸은 나른해졌고 눈은 스르르 감겼다. 가물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귀를 간질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비명처럼 울렸다.
“여보세요?”
싸한 기운이 차 안으로 성큼 들어온 듯했다.
“형수 방금 떠났어.”
남동생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피골이 상접해 하얀 뼈가 그대로 드러나서 마치 해골 같아 보였던 언니의 마지막 얼굴 모습이 떠올랐다. 어지러운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백목련과 붉은 동백꽃이 경쟁하듯 봄을 향해 몸부림쳤다. 죽음은 늘 하필이면 이런 날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4살, 13살 조카들 생각에 울음이 터졌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올케언니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처음 알았다. 39살의 나이가 죽기엔 얼마나 젊은 나이인지를. 비록 혈육은 아니었지만 30대 초반에 부모님을 떠나보낸 뒤 헛헛하고 메말랐던 내 삶에 언니는 단단한 지렛대였다.
장례 과정에서 언니가 ‘시신 기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시신 기증’이 뭔지 정확히 몰랐던 나는 기존 생각이 산산조각이 날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짧은 생의 마지막을 홀로 정리하면서 가졌을 언니의 깊은 고뇌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시신 없는 빈관을 보면서, 묵직한 선택의 무게만을 실감했다. 장례 기간 내내 가족과 조문객 모두에게 언니의 마지막 선택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휙 하고 지나갔다. 조만간 또 한 바퀴 돌게 된다. 한때는 언니가 매서운 꽃샘추위에 운이 없어 당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냉혹하고 거침없는 추위였다 하더라도 언니의 고운 영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언니의 당당한 팔자걸음, 다정하면서도 똑부러지게 말하던 맑은 목소리, 왜소한 몸과 달리 넉넉한 마음 그리고 소탈한 웃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환한 미소로 이웃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올해도 여느 때처럼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알려 주는 듯한 서슬 퍼런 꽃샘추위가 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꽃샘추위가 막무가내로 기승을 부려도 봄이 오는 건 희망의 증거였다. 단지 그렇게 반복되는 게 인생인 줄 몰랐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으로 쌀쌀한 바람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뒤늦은 깨달음을 조롱하듯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이 간직하고 있는 빛바랜 언니 사진을 꺼내 본다. 햇살처럼 빛나는 젊음에 둘러싸인 언니의 싱그러운 미소가 마치 그리운 봄날의 푸르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