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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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치다. 음치뿐만 아니라 박치와 몸치다. 사실 내가 왜 음치인지 잘 모른다. ‘솔솔 미파솔 라라솔’ 음을 제대로 냈다고 생각되는데 타인이 듣기에는 ‘솔솔 솔솔솔 솔솔솔’로 들린다고 한다. 나의 음감은 영 형편없나 보다.
얼마 전 지인들 모임에서 백두산 관광을 간다고 한다. 남편에게 나도 백두산에 가고 싶으니 보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위험해서 안 된다고 딱 자른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백두산을 보러 가겠다는데 남편이 강경히 반대하자 나는 숨었던 애국심이 발동했다. 다음날부터 새벽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남편 들으라고 침대에 누운 채 노래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동해의 물을 떠서 백두산 천지에 부어 합하면 어떨까 생각하며 불렀다. 바닷물과 민물의 만남이라 환경적으로 좋지 않을까. 아님, 북한이나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데 발각되면 큰 처벌을 받진 않을까. 갑자기 애국자가 된 양 일주일 정도 아침마다 애국가를 불렀다.
얼마 후 친구가 놀러 왔다. 친구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 선생님이다. 게다가 경기민요와 문인화에도 능통하다. 자체가 예술인이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편이 나의 애국가 실력을 말했다고 한다.
“안사람이 백두산 가게 해 달라고 아침마다 침대 머리맡에서 애국가를 부르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세상 사람 100명의 음치에게 노래를 가르치면 99명은 치유가 되는데 딱 한 사람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 한 사람이 집사람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장을 했다. 당시 반장이 학급회의를 이끄는데 꼭 애국가 제창을 주도해야 했다. 지휘봉으로 지휘를 하면서 첫 소절을 먼저 부르면 따라서 모두 함께 불렀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잘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급우들이 애국가를 부르기 전에 여기저기 킥킥대며 웃음 참는 소리가 들린다. 이를 지켜본 선생님이 직접 하시거나 부반장으로 대체한 기억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학급회의를 하기 며칠 전부터 집에서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는데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나의 키는 상당히 컸다. 거의 끝 번호이거나 바로 앞 번호였다. 고등학교 때 음악 시험은 필기와 실기의 비중이 비슷했다. 번호 순서로 노래 시험을 보면 수업 마치는 종이 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거의 마지막 번호인 나는 노래 실력도 형편없는데 쉬는 시간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목련꽃 피는 언덕에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한 소절이 끝나기 전에 음악 선생님이 ‘땡’하고 실로폰을 치셨다. 양반집에서 여자가 소리(노래)를 하면 안 된다는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음악은 나에게 먼 나라였다. 시골집에 라디오를 구입한 것이 내가 예닐곱 살 때였고 거의 아버지가 소유권이 있었다. 아침, 저녁 뉴스와 저녁 두어 시간 라디오가 안방에서 켜졌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고등학교는 도회지로 갔다. 우물 안 시골과는 많이 달랐다. 친구들이 ‘마이마이 카세트’라는 것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도 듣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도 녹음해 반복해서 들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나는 감히 사달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음악에 흥미가 없어서 소유욕이 생기지 않았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닌가 보다. 1990년대가 되자 노래방이라는 신문물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회식 2차는 무조건 노래방으로 직행했다. 직원들과 친구들은 물고기가 바닷물을 만난 듯 사람과 노래와 춤이 삼위일체가 되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회식하며 어울리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노래가 젬병이어서 노래방만 가면 노래를 부를 것인가 아닌가 고민했다.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노래방에 들어선 순간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첫 번째로 노래하리라 마음 먹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부르면 분명 나보다 잘 부르는데 그러면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첫 타자로 부르면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나의 노래 실력을 본 후 다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대개는 나보다 잘 불러서인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 너무나 즐거워한다. 나의 음치가 너무 매력적이라 말하지만 한 마디로 아주 웃기게 못 부른다는 이야기다. 언제부터 남편은 내가 노래를 부르면 밖으로 나간다. 차마 들어줄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한민족은 우랄알타이족으로 역동적으로 이동하며 노래도 함께 했다. 농경사회 위주인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공경하고 보은코자 제사를 올린 뒤 백성이 어울려 술 마시고 춤추며 노래했다. 우리 역사 이래 노래가 없는 삶은 없었다. 나에게 한민족의 뿌리가 약한지 노래를 못한다. 고등학교 음악 점수가 미와 양을 오르내렸지만 혹시 아는가. 한민족의 정기가 가득한 백두산을 보고 오면 달라질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