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징검다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태실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조회수45

좋아요0

딸이 먼 길을 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십수 시간을 날아서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하늘에 머물러야 했던 시간들, 얼마나 침대에 눕고 싶었을까.

그 안에서의 불편함을 떠올린다.

비행기를 타고 하루쯤 날아가면 다른 나라를 향하고 그 시간만큼 날아오면 고향으로 온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많은 현대인들은 대기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지구를 넘나든다.

오랜 비행시간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에 도착하는 큰딸을 마중하러 둘째 딸 부부가 공항으로 달려갔다.

자식을 키워 분가시키고 나니 형제간에 정이 깊다.

가방을 집 안에 들이며 딸과 나는 깊은 포옹을 했다.

해마다 6월이면 한국으로 와 미국 간호사의 꿈을 지닌 사람들에게 강연과 교육을 한다.

미국은 문을 개방하고 간호 경력과 영어 실력을 갖춘 간호사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교수인 딸은 학교에서 3개월의 여름방학을 맞으면 한국을 방문해 일정한 장소에서 미국 소식을 알려주고 컨설팅을 한다.

스케줄에 임하기 전 며칠 동안 집에서 머물렀다.

밥상 차리기 힘들다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난 음식을 먹었고 산책하며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가거나 딸이 오는 덕분에 일 년에 한 번씩 만남의 복을 누리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제 할 일을 해내는 자식들을 보며 40대 초반의 내 삶을 되돌아본다.

넉넉하지 않은 공무원 월급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연년생을 키워야 했던 시기, 할 일이 많아도 이게 내 삶이려니 하며 하루하루 살았다.

10년 20년 시간이 흐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막연한 궁금함이 있었지만 옆과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앞에 놓인 다른 디딤돌로 발을 옮기는 일이 중요했다.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로 걸어왔다.

지나간 세월, 바쁘고 힘겨웠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가족이 어울려 살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서울 숙소로 떠나야 하는 시간, 둘째 딸과 사위가 자동차를 몰고 왔다.

큰딸의 짐을 싣고 숙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길이 추억의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언니의 스케줄에 발맞춰 도와주는 동생 부부가 참으로 고맙다.

부모는 아무 할 일이 없다.

그저 성공적인 강연이 되길 빌어줄 뿐이다.

딸은 매주 한 번씩 유튜브에서 여러 나라에 퍼져 생활하는 한국 간호사들을 만난다.

호주, 독일, 미국, 프랑스, 뉴욕, 한국 등 SNS 세계에서 정해진 시간에 찾아오는 그들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미국에서 다른 주 병원으로 이직할 때의 필요조건과 인터뷰 방법 등에 대해 아낌없이 나누는 시간이다.

힘든 시간을 거쳐 병원에 취업했을 때의 기쁨을 알려와 모두 함께 환호를 올리기도 한다.

영상으로 만나던 한국 간호사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먼저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것은 수월하다.

쌓인 눈을 쓸어가며 길을 개척한 자의 길은 뚫려 있기에 우거진 숲의 막막함을 용기로 걸어간 사람의 고뇌와 힘겨움을 거치지 않을 수 있다.

딸은 미국 학생들을 그 나라말로 가르치며 간호사를 만드는 일을 한다.

막막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처럼 의지할 데 없는 타국에서의 삶이 힘겨웠을 텐데 잘 이겨내 주어 간호학 정교수 5년 차가 되었다.

자리 잡은 삶에 멈추지 않고 꿈꾸는 많은 사람을 향해 또 다른 디딤돌이 되어 주고 있다.

태어나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낯선 미국에서의 간호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일을 실천하는 그녀의 삶이 값지다.

미국 간호사 평균 연령이 50∼60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나이 먹어 간호 일을 손 놓아야 하는 때가 그곳에서는 한창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아픈 사람은 많고 간호사는 모자라는 시기에 생을 바쳐 환자를 돌보는 일은 참으로 고귀하다.

자신이 지닌 재능을 활용해서 한 발 내딛는 삶 또한 아름답다.

본인이 간호 일을 놓기 전에는 그만두라는 말을 못하는 미국에서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난다.

90세가 다 된 간호사가 바퀴 달린 워커를 밀며 일을 하다가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기에 알아보니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번 간호사는 죽을 때까지 간호사라는 말이 실감나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던 시기가 1966년부터 1976년이다.

언니는 내게 독일 간호사로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여고를 막 졸업한 그 시절 나의 사고방식은 부모를 떠나 타국에 간다는 건 상상을 못했고 의료나 간호 세계에도 문외한이었다.

그때 언니 말을 듣고 독일에 갔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의 결정으로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하는 일이다.

간호원이라는 호칭이 간호사로 바뀐 건 1970년이고 ‘간호사자격증’이 아니라 ‘간호사면허증’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자격증과 면허증의 차이는 크다.

면허증이 없으면 특정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사나 간호사는 면허증을 소지한 사람들이다.

면허를 허가받은 간호사, 평생 쓸 수 있는 재능을 지녔으니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다.

한 달간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큰딸이 집으로 돌아올 때 둘째 딸과 사위가 태우러 다녀왔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는 자매다.

엄마는 대외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머무는 동안 따뜻한 밥과 반찬을 차리며 자식 키운 보람을 느낀다.

낯선 미국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애썼을 딸의 수고를 생각한다.

하나는 미국에서 하나는 한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한참때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자식을 위해 부모의 마음은 오직 하나 건강 돌보며 일하고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한국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남편과 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미국으로 떠나는 날, 둘째 가족이 공항까지 손발이 되어 주었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며 두 손을 모은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