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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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성탄 선물 주셨네요!”
성탄절 이브, 1년 3개월을 다닌 직장의 해고 통보를 받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통보를 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탄절 지나고나 해고를 하든가!’
그런 배려조차 못하는 회장이 원망스러웠다.
그해 성탄절은 유난히 춥게 보내야만 했다.
동대표 선출을 앞두고 대표회장은 자신이 계속 연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새 동대표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격을 잃게 되었는데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해고한 것이다.
자신이 동대표에서 탈락되었으니 소장도 그만두라는 식의 보복 인사다.
퇴직금도 급여도 모두 이전 급여를 적용해야 한다며 신년에 오른 급여는 적용해 주지 않았다.
동대표 선출은 법으로 정해진 거라 소장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한번 떠난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나도 마음을 접어야 했다.
소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첫 해고라 그런지 마음이 무척 아팠다.
창밖에는 눈 덮인 소나무가 내게 견뎌내라는 듯 세찬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전 팀장으로부터 입사 면접 준비하라고 전화가 왔다.
팀장과 대표회장이 면접을 본단다.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단정하게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예쁘게 표정도 지어보며 어떤 질문을 받게 될지 예상해 보고 면접에 응했다.
‘전 직장에서는 얼마나 근무했나요?’, ‘왜 그만두게 되었나요?’ 등의 질문이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곳에 일이 많은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그들의 평가 목적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무얼 중시하며 사는가요?’ 등의 추상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과연 어떤 게 실무에 필요한 질문일까.
객관적인 질문에 답을 하고 창밖을 보니 목련이 봉오리를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겨울을 보낸 나무처럼.
일찍 도착해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외곽에는 제법 큰 나무들이 호위하듯 단지를 감싸고 화단의 나무는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다.
경비원은 정문에서 학교 가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차량을 통제하느라 바쁘다.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재활용 쓰레기들은 한곳에 모여져 가져가기를 기다리며 차들은 분주히 빠져나가고,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학교 가기에 바쁘다.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니 아파트에 활기가 돈다.
오늘이 나의 첫 출근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모여 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인사를 하고 잘해 보자고, 잘 부탁드린다고 먼저 손을 내민다.
세월이 묻어나는 거친 손들이지만 따스함이 느껴진다.
첫날이라 서로 긴장되고 불편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겠지.
오히려 처음부터 훅 다가서면 뭔가 불안한데 이런 긴장감을 조금씩 덜어가는 게 당분간 내 숙제이리라.
자리에 앉아 사무실을 둘러본다.
입구에 MDF실, 휴게실, 탕비실이 있고 큰 테이블에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다.
이 탁자에서 회의하고 밥을 먹고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며 담소하리라.
두 개의 책상이 나란히 붙어 있고 그중 하나는 직원이 하나는 내가 쓰는 것인데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와 본체, 복합기가 올려 있고 책장이 앞을 막아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책상 위에 물건이 많이 놓여 있어 답답하다.
책장과 컴퓨터 본체를 내려 정리하고 그곳에 화분을 놓으니 눈이 한결 편하다.
컴퓨터를 켜니 윈도우가 모니터에 뜬다.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이 창을 바라보며 온종일 눈이 아프도록 일을 해야 하리라.
회계 프로그램을 켜 놓고 언제든 주민들이 물어보면 답해야 하고 관리비 부과, 동대표 선출을 위한 자료도 만들고 교육 신청은 물론 4대 보험 사이트에 들어가 확인해야 하며, 홈택스에 매달 세금 신고도 하고 공고문도 작성해야 한다.
문서로 출력해 둔 파일과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찾아 업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결산자료 예산자료 등도 이곳에서 찾아야 한다.
어느덧 눈은 뻑뻑해지고 피로가 쌓일 것이다.
그러면 쉬고 싶은 마음에 눈이 자꾸 밖으로 향하겠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을 들여다보느라 머리가 복잡해지면 가끔 음악도 들어야 하리라.
내게 휴식을 주는 음악.
오늘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어본다.
피아노와 첼로가 대화하듯 흘러가는 선율로 피곤하고 긴장된 나를 위로해 준다.
피아노는 모든 음을 받아주는 듯 너그럽고 부드럽게 감싼다.
작은 콘서트장에 있는 기분이다.
연주자의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소리가 다르다.
몸통을 비우고 팽팽하게 감겨져 있는 첼로의 현이 연주자에 의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니 새삼 음악의 효용이 느껴진다.
나도 이렇게 팽팽하게 긴장하며 나의 작은 세상을 연주해야 하는가.
매일 윈도우를 켜고 회계 프로그램을 드나들고 아래한글, 엑셀 등을 수시로 오가며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며 세상을 향해 다시 출사표를 던져야 하리라.
때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듯 입주민과 직원들을 도와야 하고 때로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문제에 대처해야 하며 활을 잡은 손처럼 섬세하게 하나하나 빠짐없이 업무를 처리해야 하리라.
사무에 지칠 때면 단지(團地)를 순찰하며 보수할 곳이나 더러워진 곳도 살펴야 하고 몸에 시원한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한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어른들의 불평도 들어야 하며 가끔은 새소리도 들으리라.
창밖을 보니 한쪽 창밖에 소나무가 푸른 잎을 드리워 눈이 시원하고 다른 쪽엔 수형(樹形)이 아름다운 오래된 목련 한 그루가 꽃봉오리를 잔뜩 움켜잡고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풀어가고 있다.
이제 곧 꽃이 피리라.
꽃이 활짝 피면 그 옆에서 사진을 찍어 내가 여기에 왔노라며 격문 한 장을 밴드에 올릴 것이다.
추운 겨울바람 끝에 봄기운이 매달려 있어 꽃은 다시 피어난다.
다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