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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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들이 물을 올리기 시작하는지 거무스름하던 나무의 색이 짙어지고 있다.
아직 땅의 흙은 봄 색깔을 띠지도 않았는데 몸으로 스미는 바람 또한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다.
이 땅의 모든 농부들은 타고난다는 생각이 든다.
봄보다 먼저 봄 녘으로 나오니 말이다.
아무튼 농부들의 대명사처럼 그도 봄보다 먼저 들녘에 나오고 농부나 농사가 어떤 것이란 것을 까마득히 알려주는 사람이 그다.
땅이 가무스름하게 겨울을 털어 내기 시작하면 입장면 그의 밭은 이미 거름을 내기 시작한다.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소신대로 거름을 주고 시도 때도 없이 밭을 들락거린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다는 듯.
포도밭 고랑은 잎이 다 지고 나면 길게 끝이 보여 사람이 어디쯤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가 저 멀리 밭고랑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나는 오고 가며 그가 그 포도밭에서 농사짓는 과정을 들락날락 훔쳐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정말이지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밭의 농부들과 달리 늘 상 밭에 붙어 있는 그가 궁금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를 낯익게 바라본 때문인지 그가 농약을 치지 않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 번쯤은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요즘 들어 유기농법 농산물이 각광을 받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켓에는 그쪽 농산물이 따로 진열되어 값나가게 팔리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농약을 치지 않은, 무공해 상태의 제대로 된 먹거리를 먹겠다는 뜻이겠지만, 진즉에 이렇게 농사를 짓고 있었던 이의 농사법이 어찌 보면 선견지명이 아니었을까?
더욱이 그가 유기농이나 무기농을 알고 농사를 짓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부지런함으로 비추어볼 때 굳이 농약을 쓰거나 비료를 쓰는 일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를 경험으로 알았음 직하다.
분명 그는 남보다 더 많이 거름을 내고 밭을 갈아주고 봉지를 싸매고 순을 질러주고 포도알이 굵어지는 만큼 땀방울을 흘렸을 사람이다.
어쩌다 수확기에 비라도 올라치면 포도알이 터진다고 밭고랑에 앉아 화풀이도 안 되는 풀을 버럭 쥐어뜯기도 했을 게다.
여름의 끝자락에 설 즈음, 길옆으로 포도 가판대가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인근 농협에서 포장도 쳐주고 주변 농가들마다 길가에 포도를 내놓기 시작한다.
너무 반가웠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단골 고객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기왕 포도를 팔 바에야 남보다 먼저 초련에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남들이 포도를 내놓고 팔아도 그는 시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익은 포도를 내놓고 팔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과실이 빨리 영그는 촉진제나 색깔이 좋아지는 착색제를 외면하던 그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끈기로 지켜보고 기다리다 그의 포도를 산다.
그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꿋꿋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
풍작이었든 흉작이었든 다시 봄이면 어김없이 밭으로 나와 밭고랑으로 스며드는 사람들.
그들과 같이 산다는 게 즐겁다.
저만큼 땅의 흙이 가무스름하게 올라온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가 여름내 밭고랑을 뛰어다닐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내가 저 밭의 농부인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