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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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을 맞으려고 가방을 둘러메고 아내 뒤를 따라 전통시장으로 따라 나섰다. 나물과 채소상들이 모여 있는 시장은 각종 남새와 봄나물들을 사려는 사람에 밀려 왁자지껄 발 디딜 틈도 없이 분주하게 돌아간다.
의례 명절 때마다 내가 차지하는 부침개와 전 부치는 일은 어머니가 계셨던 중학생부터 도와드린 터라 기술이 늘어 이젠 척척 부쳐대니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결혼 후 지금까지도 부엌에서 호박전, 동태전, 감자전 그리고 메밀부침개까지 프라이팬에 부치고 있으니 명절 증후군은 소리 없이 해마다 잘 넘어간다. 오히려 내가 주부습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할 판이니, 설과 추석 명절 끝자락에서 수고했다는 아내의 칭찬이 이어진다.
시장을 둘러보니 모든 물가가 올랐는데 그중에 대파 한 단에 3500원 하던 것이 진도 대파의 경우는 파 묶음이 크다고는 하지만 8000원이나, 어이쿠 소리가 난다. 지난여름 장마에 파 농사를 그르쳤으니 금파가 되었다. 그러나 겨울 해풍을 이겨가며 튼실하게 자란 대파의 기개에 눌려 그랬는지 아내의 지청구를 들어가며 진도 대파 한 단을 사들였다.
집으로 돌아와 대파를 다듬으면서 흰 뿌리와 어우러져 훤칠하게 자란 줄기는 곱고 부드러운 여인의 살갗인 양, 촉촉하게 자란 잎새의 진액마저 다른 파와는 사뭇 달랐다. 물김치 역시 파 특유의 진한 향과 달콤함이 뇌신경을 자극한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엔 감기에 걸렸다 하면 대파 줄기와 뿌리를 넣고 무와 생강과 함께 폭 달인 따끈한 물을 마시고 아랫목에서 취한(取汗)을 하면 거뜬한 몸이 되었다. 허허벌판 추운 엄동설한에서도 얼었다가 녹으면서 살아남은 대파의 끈질긴 생명력은 파뿌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시들은 파라도 뿌리에 흙냄새 기운만 맡으면 노란 새순을 올리는 파의 생명력은 우리 몸을 따듯하게 하기에 감기 치료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민간 의료요법으로 널리 사용했다.
옛이나 지금도 신혼부부에게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라고 덕담들을 나누니, 파의 양기와 생기가 살아 오르는 생명력을 상징했던 것 같다.
인간은 비타민C를 체내에서 만들지 못해 섭취하는 식물을 통해 얻고 있지만 양서류는 피부와 햇볕의 합성으로 비타민C를 만들어 추위나 찬물 속에서도 여유롭게 감기 없이 살아간다. 비타민C와 체온을 따뜻하게 돕는 파의 중요성을 파를 다듬으며 추억을 깨우치게 한다.
파뿌리에 얽힌 글은 이것뿐이 아니다.
400년 전 안동에 살았던 어느 여인의 글이 수백 년 흐르다 미라가 된 남편의 품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붓으로 한지 위에 정갈하게 쓴 아내의 글이 부부의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원이 아바님(?)께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가자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이 먼저 가시나요.
병술년 초하루 지아비를 잃은 아내
서른한 살 나이로 남편이 갑자기 하직하자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느냐는 절규와, 남편 잃은 여인의 슬픔과 애절함을 후세에 오늘까지 몸으로 전한다. 이어서 꿈에라도 나타나 자식들에게 그리고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면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해야 할지…. 당신의 모습을 꿈에라도 보게 해 달라고 하는 애원의 글이 남편의 품속에서 나왔다. 그것도 병술년 설에 지아비를 잃은 원이 어머니를 생각하니 파를 다듬는 마음 무엇에 견줄까?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의 편지로 그 사랑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파의 흰 뿌리에서 전해오는 감기의 민간요법 이전에 검은 머리 파뿌리처럼 원이 아버지와 아내가 오래도록 함께 살자 했는데… 인간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져야 하나.
안동에 살았던 어느 여인의 마지막 사랑의 편지가 머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먼저 간 부군을 그리다 남편의 품속에서 아내의 글을 발견했으니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무엇으로 표현하리오. 붓으로 한지 위의 정갈하게 쓴 아내의 글을 가슴에 품었으니 파뿌리를 다듬기조차 죄스러워진다.
원이 어머니의 정갈한 붓글 솜씨, 배웠다 하는 명문가정에서 요즘 우리에게 전하는 부부의 애틋한 정과 사랑의 교훈에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