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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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에겐 첫사랑의 기억이 없다. 아가씨가 맘 놓고 연애를 하고, 그리워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모든 일을 나에게 맡겼다.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옆집 아줌마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아가씨도 일만 하지 말고 밖에 나가 연애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멋진 남자 친구도 만나고 그래요” 했다.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남자 친구 손도 한번 못 잡아보는 것 아닌가! 서울에 살면서 유일하게 만나는 친구는 김포에 살고 있는 진이다. 고향에서 앞뒷집에 살았으며, 부모와 오빠 둘과 남동생이 있었다. 사시사철 진이네 집 사랑방에는 오빠 친구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아가씨를 잘 꼬시나 하는 상담을 하기도 했다. 진이는 오며 가며 주워들은 연애담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며 같이 웃었다. 진이는 얼굴이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대가족 속에서 자라서인지 말도 잘하고 마음도 넓은 편이라 만나면 편했다. 진이는 서울역 근처 회사를 다녔다. 꽃 피는 주말에 만난 진이는 “깅자야, 니도 연애 한번 해봐라. 그래야 시집가서 후회를 안 할 끼다. 니가 좋다카마 남자 친구라도 소개해 줄라 카는데 우째 생각하노” 하며 그 말끝에 손을 잡고 눈물 나게 웃었다. 말만 들어도 기뻤다.
얼굴에 한창 꽃이 피고 예쁠 때 아가씨들은 한껏 멋을 부렸다.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 남산에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 라라∼’ 이시스터즈가 불렀던 노래 가사다. 그때만 해도 데이트 장소로 남산이 유명했다. 그 즈음 진이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꺼내 읽는 순간, 나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준다는 말에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소개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가득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옷은 뭘 입을까, 머리는, 그저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 잡지책을 뒤지며 찾아보고 읽어봐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남자 친구 만날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즐거움이 묻어났다.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하고 기대를 했다. 가족들이 눈치를 챌까 봐 내심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있는 나에게 “시집을 가기 전 남자 친구 손을 잡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내 맘을 들킨 것 같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기초 화장을 하고 입술에 엷은 분홍색 립스틱을 발랐다. 긴 생머리, 월계 양장점에서 맞춘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보라색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께는 고향 친구 진이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용돈을 풍족하게 주었다. “오늘은 경자가 멋진 아가씨로 보이는구나. 예쁘네” 하며 웃으셨다. 처음 듣는 아버지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빨간 구두를 신었다. 긴장하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철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다시 물어볼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그날따라 아름답게 보였다. 기분이 좋아 ‘빨간 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 노래를 흥얼거리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갔다.
시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느리기만 하다. 신호등도 얄밉게 보였다. 남산을 올라가는 입구에서 내렸다. 옷차림도 비슷한 진이와 마주 보고 웃으며 오솔길을 걸었다. 새소리도 정겨운 이 길을 남자 친구와 걸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내심 오늘 만날 남자 친구에 대해 말을 해줄까 하며 기다렸다. 길 양쪽으로 아저씨, 아주머니가 앉아 막걸리, 파전, 군밤을 팔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새 구두가 약간 불편했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굴엔 미소를 띠고 가볍게 걸었다. 앞서 가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으며 다정하게 가고 있었다. 진이와 나는 낯선 남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이는 ‘남산 팔각정 첫째 계단 오른쪽 끝자리에 군복을 입고 앉아 있을 테니 찾아오라’는 편지를 받았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햇살이 눈부신 길을 따라 걸으며, 군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날따라 많이 보였다. 진이는 “이 분이야. 인사해” 하고 말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했다.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의 군화는 반질반질하고, 군복 바지는 칼날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름 멋을 내고 온 듯했다. 눈인사를 할 때부터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은 자그마하고 얼굴은 검은 편이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별로 말이 없었다. 연애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더 더웠다. 여름 햇살이 깔려 있는 발아래를 보고 있으니 20대 초반 아가씨는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확 트인 공간에서 처음 보는 남자를 대하니 좋은 감정도 차차 식었다. 차를 마실 곳이 없어, 더위를 피해 작은 느티나무 아래서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말도 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물고 남자의 군화 코만 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여자가 상냥하게 말을 건네야 하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자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눈치를 챈 진이는 “그럼 가보세요” 하고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따라갔다. 팔각정 계단에 앉자마자 나에게 “니는 그 남자 맘에 안 드나?”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남자와 말도 몬해 봤는데” 했다. 진이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만남을 주선했는데 맹탕인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밋밋한 만남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차려입은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발도 아프고 마음도 무거웠다. 남자와 손이라도 잡고 내려왔으면 라라 신나고 즐거울 텐데 처음 만남이 이렇게 끝나다니 실망이었다. 남산을 내려와 오랜만에 진이와 침묵의 짜장면을 꾸역꾸역 먹었다. 버스에서 내려 혼자 터덜터덜 걷는데 구두가 돌부리에 차여 휘청거렸다.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진이 부모는 잘 계시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왔냐?” 라며 물어보았다. “네” 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긴장감이 풀려 힘이 빠지고 피곤만 몰려왔다. 처음 본 남자가 마음에 들고,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첫사랑도 아니고 싱거운 데이트에 맥이 풀렸다.
진이는 며칠 후에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한 번 봐서 모른다며, 한 번 더 만나 보라고 했다. 답을 하지 않았다. 시집을 갈 나이가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아버지는 “경자야,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느냐?” 해서 없다고 하였다. 중매로 만나 약혼한 남자가 남산을 가자고 했다. 약혼자도 별로 말이 없었다. 첫 남자 친구를 만난 장소인데 약혼자는 모르겠지! 가슴이 철렁했다. 약혼자도 내려올 때 손을 잡지 않았다. 억지로 내가 먼저 손을 잡았다. 모른 척하며 슬그머니 잡아주었다. 즐거운 데이트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연애도 한번 못해봤는데 부질없는 생각에 첫사랑은 무슨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