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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일본 변호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중위

수필가·한국문인협회자문위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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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희대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5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에 의해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였기 때문이다. 해묵은 얘기지만 다시 한번 한 영웅에 대한 재판 기록을 우리는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 기록을 통해 일본인의 숨겨진 양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악랄한 일본인 중에도 일본 역사의 한편 구석을 파헤쳐 보면 아베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인간애로 가득찬 정의로운 일본인의 양심을 만날 때도 가끔 있다. 일본인이면서도 한국 민중의 아픔을 보살피고자 동분서주하면서 감옥까지 드나든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같은 사람도 있다. 훗날 그는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
이등에 대한 저격사건이 났을 때 일본 정부에서는 이미 안중근 의사를 여순에 있는 관동도독부 법정에 세우기로 하고 또 극형으로 처할 것을 지시하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법원에 전달하였다. 안의사를 위해 나서는 국제변호사마저 거부하면서 오직 관선 변호사만을 고집한 것은 속된 표현으로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자는 일본 측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선임된 관선 변호사들의 변론을 들어 보면 보통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이하『안중근 사건 공판기』(최홍규 校註, 정음사, 1979) 참조〕. 
1910년 2월 12일에 열린 최종공판 최종변론에서 일본의 관선 변호사 카마타 세이지(鎌田政治)라는 사람이 재판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을 보면 자못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는 서론적으로 사법권이 행정권에 의해 훼손되었던 과거사를 들춰가며 이번의 경우에도 결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주문을 먼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본건의 발생지는 청나라의 영토이고 피고는 한국인이다. 한·청조약과 일·한보호조약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의 외교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일본이 대행하고 있을 뿐이므로 한국 신민(臣民)을 재판하는데 일본 형법을 적용할 수 없고 한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법의 요건이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의 변호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얼마나 명쾌한 변론인가?
거사시점은 1909년 10월 26일이요 거사장소는 청나라의 하얼빈이며 거사당사자는 한국인이다. 거사당시 안의사는 맨 처음 러시아 군인에 의해 포박되어 러시아 법원으로 끌려갔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이었지만 그 역두만큼은 러시아 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담당 판사 스트라조프는 안의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재판할 수 없다고 하자 일본 측이 인계받아 일본 법정에 세운 것이다.
카마타 변호사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거사 장소는 청나라이고 거사 장본인은 한국인인데 어떻게 일본 법정에서 일본법으로 재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부당 불법의 근거는 <한·청조약>이었고 또 <을사늑약>이었다.
<한·청조약>이란 무엇인가. 1899년 9월 11일(광무 3년) 대한국과 대청국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피차 인민을 돌보려고” 체결한 통상조약이다. 그 조약 제 5조에서 분명히 "재(在)한국 중국인민이 범법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중국영사관이 중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 처리하며, 재(在)중국 한국인민이 범법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한국영사관이 한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 처리한다”로 되어 있다(김태웅의 자료). 
카마타 세이지에 이어 오후 공판에서 변론을 맡은 관선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 吉太郞)의 형량에 대한 변론을 보면 사뭇 처연함까지 느낄 정도로 세밀하고 안의사의 거사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는 개구일성(開口一聲)으로 "본건은 일본 형법이 아니라 한국형법을 적용해야 하며 앞의 변호사가 말한 것처럼 무죄일 수밖에 없다는 소론을 같이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한국의 현상은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이 판을 치던 유신 전의 일본과 흡사하여 배일당(排日黨) 주장은 일본의 지사와 같다.” 이 한마디만 들어도 미즈노라는 변호사가 안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을 일이다. 변호사는 안의사를 일본의 막부를 쓰러뜨리고 왕권 중심의 명치유신을 일으킨 지사(志士)와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옹호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지사이기에 그에 대한 형벌은 가벼워야 한다는 의중을 나타낸 것이다. “유신 이래의 암살은 사꾸라다(櫻田) 문밖의 변, 오쓰(大津)사건, 호시 도루(星亨)사건이 있는데 이들의 피고인과 비교할 때 안중근에게는 동정할 점이 있다. …이토 공도 청소년 시절 시나가와(品川)의 영국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등 안의사와 비슷한 행위가 많았다.”
이 모든 사건은 막부 정권을 해체하고 왕권을 되찾기 위한 당시 일본 우국지사들의 행동양상이었다. 미즈노 변호사의 주장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야말로 일본에 빼앗긴 한국의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벌인 정당한 행위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안의사에게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사의 논고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중죄인을 가볍게 처벌하면 비슷한 사건이 속출하리라 검찰관은 말하지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망론(妄論)”이라고 하면서 오쓰(大津)사건의 주범도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면서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법정형에서 가장 가벼운 징역 3년”을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청원하는 형식으로 "변호인은 피고에 대해 가벼운 징역 3년의 처형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가능하면 더욱 작량감경(酌量減輕)의 여지가 있다”고 하면서 "특별히 관대한 처분을 하는 것이 서거한 이등공작을 경모하는 길”이라고까지 안 의사를 극찬하면서 변론하였다. 또한 "만일 피고가 일본이나 다른 문명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경우를 보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들 관선 변호사들의 변론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채 선입관만으로 형식적인 변론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었다. 필자는 일본의 양심은 바로 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일본에는 과거의 아베총리와 같은 사람만 있는 나라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양심과 함께 호흡하면서 한·일 관계를 이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였던 배성동 박사는 나에게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의 목숨과 바꾸기에는 너무나 크고 아까운 인물이었다”고 말한 바 있고 필자 또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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