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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버거를 만들었을 뿐인데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종수(수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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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버거국의 버거왕궁, 의사당, 로테리아(lawteria)*1)
[시대]    가상의 입헌군주 시대
[인물]    버거(Berger)국버거대왕*2)과 왕비, 의원들, 사령관과 군인들, 매니저, 손님들, 배달 기사들 外
[무대]    버거 형상의 건물(왕궁, 의사당, 버거 식당)을 배경으로 양옆으로 출입문(왕궁, 의사당, 버거 식당 출입문)이 있고 그 중앙과 양옆에는 식탁(왕궁의 식탁, 의사당 회의 탁자, 식당 식탁)이놓여있다.

버거 왕관을 쓴 왕과 왕비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식탁 옆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왕은 백발에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고, 역시 왕비는 그에 비해 너무나 홀쭉하고 어려 보인다. 이윽고 출입문이 열리며 버거가 배달되면 왕비가 이를 받아 식탁에 올리고 왕에게 권한다. 왕이 버거를 한 입 먹고 나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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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과 원칙을 상징하는 영어 law와 간이음식점을 뜻하는 cafeteria의 합성어이다. 이 극에서는 버거(berger)를 파는 가게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2)영어로 berger는 햄버거를, 유사한 발음의 bugger는 치사하고 더러운 놈이라는 일종의 속어이다.

[대왕] 버거국의 버거 대왕입니다. 원래 저는 채식주의자였는데 왕 노릇을 하다 보니 술과 고기가 필수더라고요. 근데 이것도 오래 하다 보니 고혈압에 기억도 깜빡깜빡, 이제는 눈까지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왕비가 비밀리에 저 대신 국정 전반을 보고 있습니다. 거의 왕 노릇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이런 상황에서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해서 생각한 것이 간편 버거였습니다. 물론 탄산음료도 포함해서요. 저야 물론 탄산 대신에 알코올을 몰래 마시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요즘 왕비에게 이상한 욕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습니다. 
[왕비]   하여튼 꼭 상만 차리면 말이 길어진다니까. 
[대왕]   내가 원래 독백 빼면 시체 아니오.
[왕비]   그 못된 버릇은 언제 고쳐지려나 몰라. (한 입 먹으며) 그나저나 이 좋은 걸 혼자만 먹으려니 가슴이 아프네요.
[대왕]   어떻게 해야 왕비의 그 아픈 가슴을 낫게 할 수가 있겠소?
[왕비]   당장 포고령, 아니 버거령을 내려주세요.
[대왕]   버거령을 또?
[왕비]   이번에는 ‘백성들의 주식은 버거로 한다’에다가 ‘이를 거부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즉결 처단한다’를 추가해주세요. 
[대왕]   너무 나간 거 아닐까요?
[왕비]   우리가 매번 약하게 나가니까 의회도 백성도 우릴 얕잡아 보잖아요.
[대왕]   우리가 언제 버거령을 내린 적이 있었소? 
[왕비]   또 이러시네. 벌써 네 번이나 내렸었잖아요. 매번 의회가 반대했고요.
[대왕]   그랬었나? (왕비가 붓을 잡자) 왜? 직접 쓰려고? 
[왕비]   항상 내가 썼잖아요. (왕비가 직접 버거령을 써서 대왕에게 건네준다)
[대왕]   (버거령을 펼치며 근엄한 음성으로) 버거국 백성에게 고하노라! 당장 내일 아침부터 모든 백성은 하루 삼시 세끼를 반드시 5:5 버거로 먹어야 하며 이를 거부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처단하겠노라!
[왕비]   (손뼉 치며) 참 잘했어요. 5:5로 양보했으니 의회도 승인할 거예요. 
[대왕]   고기가 너무 적지 않겠소? 
[왕비]   마지막 양보에요. (크게) 밖에 아무도 없느냐! (전령이 달려온다) 
[대왕]   (버거령을 주며) 어서 가서 의회의 승인을 받아 오거라!

둘이 탄산음료를 마시고 트림을 하는 사이 전령이 의사당 회의장으로 달려 들어온다.

[전령]   아뢰오!  대왕께서 방금 선포하신 따끈따끈한 버거령이옵니다. 식기 전에 승인을 요청하나이다!
[의장]   (버거령을 받아 읽어주고는) 의원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의원1] 결국, 왕비처럼 삼시 세끼를 5:5 고기 버거로 때우라는 말 아닙니까?
[의원2] 왕궁에서 10:0으로 먹는지 5:5로 먹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의원3] 우리 의원 중에 고기 섞인 버거를 좋아하는 의원들이 얼마나 있지요?
[의원2] 친(親) 고기 버거 성향의 의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의원1] 핏물이 뚝뚝 흐르는 고기 버거를 어떻게 하루 한 번도 아니고 삼시 세끼를!
[의원3] 5:5로 낮췄지만 이건 채식 버거는 물론 의회, 백성에 대한 폭력입니다!
의원들 (의사당이 무너지도록 크게) 거부해야 합니다! 
[의장] 알겠습니다. 버거 대왕의 다섯 번째 버거령에 대해서 다수결의 찬성으로 이를 불승인하였음을 선포합니다. (의사봉을 두드린다) 땅! 땅! 땅! 
[전령]   (다시 왕궁으로 달려와 버거를 먹고 있는 왕과 왕비에게 고한다) 대왕! 의회가 버거령을 거부하였사옵니다!
[왕비]   (분을 참지 못해 식탁을 쾅쾅 내려치며) 또 거부했단 말이냐! 하는 일 없이 허구한 날 의사봉만 두드리며 반대에 반대만 일삼고 있다니! 
[대왕]   왕비, 진정하시오! 
[왕비]   대체 이 의사당 것들은 어째서 내가 원하는 건 모두 반대랍니까? 저러고도 세비는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니요! 
[대왕]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 의사당의 권력을 어찌할 수가 없구려. 
[왕비]   (탄산음료를 마신 뒤 트림하며) 방법이 있어요!
[대왕]   그게 뭐지요?
[왕비]   의회를 점령해서 해산시켜버리는 거예요! 
[대왕]   뭐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들어요! 
[왕비]   버거를 먹지 못해 불행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저 고약한 의사당 것들의 입에 버거를 쳐넣어야 조금이나마 행복할 것 같아요.
[대왕]   알겠소. 왕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소. 
[왕비]   알면 행하셔야지요. 신성한 왕권으로! 
[대왕]   신성한 왕권으로! 알겠소. 
[왕비]   (버거령을 휘갈겨 쓴다) 그리고 이참에 공급망을 정리해야겠어요. 새로운 맛집이 생겼다고 하더이다. (밖을 향해 크게) 사령관! 사령관!
[사령관]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부르셨나이까!
[왕비]   대왕의 명령이시다! (버거령을 건네며 귓속말을 한다) 알겠느냐! 
[사령관] 네! 알겠사옵니다.
[대왕]   절대 비밀로 하고 즉시 출발하도록 하라!

사령관이 전령과 군인들을 이끌고 출발한다. 대왕과 왕비가 탄산음료를 마시며 트림을 하는 사이 사령관과 군인들이 로테리아를 둘러싸며 동태를 살핀다. 저녁 시간 로테리아 매장 안에서는 매니저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매니저] 사랑합니다, 고객님! 법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로테리아입니다! 
[손님1] (메뉴판을 보다가) 왕, 비 세트 하나 주세요.
[손님2] 이게 요즘 인기라며?
[손님1] 응. 이거 먹으면 진짜 왕과 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대. 
[손님2] 하는 말이겠지. 앉자. (손님1과 자리를 잡는다)
[손님1] 그런데 혹시 소문 들었어?
[손님2] 무슨 소문?
[손님1] 대왕과 왕비가 새로운 버거령을 내리려고 한대. 모든 백성에게 버거를 주식으로 하라는 버거령 말이야!
[손님2] 그건 벌써 몇 번 있었잖아.
[손님1] 이번엔 좀 센 거라는 소문이야.
[손님2] 근데 아무리 왕비가 버거 퀸(queen)이라고 해도 그렇지 온 백성에게 그걸 강제로 먹이려는 건 정말 미친 짓 아냐? 의회가 반대할 게 뻔하잖아.
[손님1] 5:5로 양보한다고는 하는데, 채식주의 의회는 이번에도 당연히 반대하겠지.
[손님1] 고래 싸움에 버거 등 터지게 되었군! 
[점원]   왕비 버거 세트 나왔습니다.

손님이 주방으로 가려는 순간, 군인들이 들이닥친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군인들은 사주경계를 하고 사령관이 나선다.

[사령관] 매니저! 매니저 어딨어!
[매니저]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들며) 여기 있는데요.
[사령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며) 받아!
[매니저] (쪽지를 받으며) 이게 뭐죠?
[사령관] 계약서지 뭐긴. 
[매니저] 계약서요? 갑자기 계약서는 무슨…?
[사령관] 로테리아 버거 천 개를 극비리에 공급한다는 계약서야. 
[매니저] 버거 천 개를요?
[사령관] 버거 대왕의 명령이다!
[매니저] (계약서를 들여다보며) 버거 대왕께서 왜 이런?
[사령관] 대왕은 질문은 받지 않는다. 지금부터 로테리아는 버거 천 개를 오늘 밤 24시까지 우리가 알려주는 특정 장소로 배달한다. 배달에 실패할 시에는 가게는 물론 가게의 버거 관련 특허권 등 모든 권리가 왕국에 몰수될 것이며 성공할 시에는 앞으로 10년간 왕궁은 물론 백성의 식탁에 오를 버거의 공급망을 독점하는 특혜를 누릴 것이다. 알겠느냐!
[매니저] 왜 하필 우리 로테리아를?
[사령관] 그건 이 가게 모토(motto)가 법과 원칙인 데다 무엇보다 왕비께서 이 집 버거를 드시고 싶어 하시니까. 시간이 없다! 어서 계약서에 서명해! (군인들이 총으로 압박하자 매니저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먼저 왕비 세트 3개를 매일 왕궁으로 배달하고, 300개는 지금 즉시 의사당 출입구와 담장으로 배달한다! 왕궁으로 배달할 때는 모델 같은 놈 좀 골라서 옷도 좀 다려 입히고 배달통에 향수도 좀 뿌리고 오토바이에 광도 좀 내고! (손님들을 향해) 방금 보고 들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어길 시에는 다섯 번째 버거령에 따라 바로 체포 구금될 수 있다. 알겠느냐! (손님들이 두려움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령관이 떠나고 모두가 버거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허겁지겁 전령이 들어와 긴급 포고령을 벽에 붙이고 뛰어나간다. 손님 1과 2가 재빨리 달려가 읽는다.

[손님1] 오늘 24시를 기해 의회를 해산한다! 오늘 24시를 기해 모든 국민은 5:5 버거만을 먹어야 한다! 
[손님2] 오늘 24시를 기해 이에 반대하는 모든 언론, 출판, 집회, 시위를 금지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처단한다!
[손님1] 드디어 소문으로만 돌던 센 것이 왔군! 
[손님2] 정말 세다!
[매니저] (주방에서 나오며) 뭔가요? (포고령을 보고) 긴급 포고령? (천천히 읽는다) 의회를 해산한다, 버거만을 먹어야 한다, 구금하여 처단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손님1]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매니저] 그럼, 우리가 방금 의사당 앞으로 배달한 버거는?
[손님2] 의회를 해산하기 위해 모인 군인들이 먹을 간식 같은데요? 
[손님1] 이건 잘되면 혁명 못 되면 반란이야! 
[손님2]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매니저] 그런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먼저 왕궁으로 왕비세트 3개, 의사당으로 300개, 24시까지는 나머지 700개를 지정된 장소로 배달해야 하니까요. 배달에 실패하면 우리 가게는 궁에서 몰수할 겁니다. (손님들에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버거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니 앞으로 우리 집 버거는 한 달간 공짜입니다!
[손님1] 우와! 센데요. (손님2와 함께) 좋습니다. 
[점원]   왕비 세트 3개 나왔습니다!

손님들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배달 기사가 들어와 왕비 세트를 통에 담아 왕궁으로 달려간다. 왕궁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배달 기사가 버거를 들고 달려온다.

[기사]   대왕이시여! 주문하신 로테리아 왕비 버거 세트 대령했사옵니다!

대왕과 왕비가 망원경으로 의사당을 관찰하다 기사를 맞이한다.

[대왕]   어서 오거라! (기사가 버거 세트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인사하고 나간다) 
[왕비]   기사가 아주 늠름하군요! 
[대왕]   (버거를 풀며) 상황은 어떤 것 같소?
[왕비]   (망원경을 접으며) 의회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대왕]   곧 지칠 거요. 모든 식재료의 출입을 막고 있고, 우리 군도 겹겹이 에워싸고 있으니까.
[왕비]   군인들도 왕비 버거를 먹고 있으니까 더욱 힘이 날 겁니다.
[대왕]   군인들이 먹는 버거도 로테리아에서 공수한 거라고 하던데? 
[왕비]   법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아주 훌륭한 가게랍니다. 
[대왕]   법과 원칙은 이 나라 국정의 대원칙이기도 하니 믿을 만하겠군. 
[왕비]   온 백성이 대왕을 믿듯이요.
[대왕]   그렇군. 하하! (버거를 권하며) 드시오! 그토록 원하던 왕비 버거 세트요!

대왕과 왕비가 왕비 버거와 음료를 먹어보곤 트림을 해대며 행복해한다. 배달을 마친 기사가 로테리아로 달려온다. 다시 로테리아 매장 안. 배달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 끊임없이 배달 기사들이 들락날락한다. 매니저는 매장 안 탁자 위에 놓인 버거 모양의 항아리 안에 돈을 퍼담고 있다.

[매니저] 완전 대박입니다. 대박! 어느 날 저녁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천 개의 버거를 만들어라. 어디 어디로 배달해라. 배달하면 대박이요, 못하면 쪽박이다. 그리고선 무슨 긴급 포고령이다 뭐다 해서 모든 백성이 버거를 먹기 시작한 겁니다. 법과 원칙을 내세운 로테리아의 운영 전략이 제대로 먹힌 거지요. 돈방석이란 게 이런 거였어요. 온 백성이 버거를 먹는 게 의무가 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들어와요. 게다가 이제 돈도 있겠다 죽자 살자 일할 필요가 없어지니 편하게 시간제 근로자를 쓰게 된 거지요. 아주 저렴한 시급에 말입니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일어서 왕궁을 향해 절하며) 대왕이시여! 왕비님이시여! 감사하고 또 감사하나이다!

배달 주문은 계속되고 시급제 점원들은 기계처럼 끊임없이 버거를 만들어 내고 배달 기사들은 쉼 없이 버거를 배달한다. 다시 배달 기사가 왕궁으로 배달을 나간다. 왕궁에서는 왕비가 망원경으로 저 멀리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의 배불뚝이 대왕이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실눈을 뜬 채 속이 편치 않은지 배를 연신 만지며 왕비의 눈치를 본다.

[왕비]   벌써 며칠째입니까? 아직도 의사당을 점령하지 못하였다니요? 
[대왕]   그러게 말이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틀림없소.
[왕비]   아니. 저건 우리 쪽 군인들이 의사당에서 후퇴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대왕]   어디 나도 좀. (망원경을 낚아채어 본다) 그렇군. 군인들이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후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왕비]   무슨 일인지 어서 알아보세요. 
[대왕]   알겠소. (밖을 향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사령관]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대령했사옵니다! 
[대왕]   지금 의사당 밖 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사령관] 군인들이 배탈 설사로 점점 기력과 사기를 잃고 후퇴하고 있사옵니다. 
[대왕]   배탈 설사라니?
[사령관] 아마도 삼시 세끼 먹어대던 버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왕비]   우리는 멀쩡하잖아요?
[대왕]   사실은 나도 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픈 게 버거 좀 제발 그만 먹게 해달라고 왕비에게 간청하려던 참이라오.
[왕비]   진작 말씀하시지 않고요.
[사령관] 그런데 이보다 더 긴급한 소식이 있사옵니다. 
[대왕]   그게 무엇이냐?
[사령관] 의사당에서 대왕님의 긴급 포고령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대왕]   포고령에 위헌 결정을?
[사령관] 네. 의사당을 봉쇄했던 군인들이 배탈과 설사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의원들이 들어가 의결 정족수를 채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비]   그럼, 이제 포고령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냐? 
[사령관] 그렇사옵니다.
[왕비]   대체 의사당은 어떻게 삼일천하를 견디었던 것이냐?
[사령관] 의사당 안에서는 의원들과 보좌진들, 그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재배한 제철 채소들과 콩으로 만든 채식 버거를 주로 먹었다고 합니다.
[대왕]   채식 버거를?
[사령관] 네. 그래서인지 버거를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사옵니다. 
[왕비]   힘도 나지 않고 포만감도 없는 채식 버거가 뭐가 그리 좋다고 우기는지.
[대왕] 신속히 지사제를 투입하도록 하고 끝까지 버티는 군인에게는 한 달 치 불고기 버거를 하사할 것이라 전하라. 로테리아에 대해서는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고발 조치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백성들에게 본때를 보이도록 하라!
[사령관] 알겠사옵니다.

사령관이 떠나면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며 배달 기사가 매우 지친 모습으로 버거 세트를 왕비에게 바치고 로테리아로 돌아간다. 로테리아 매장에서는 그 많던 시간제 근로자들은 온데간데없고 배달 기사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피골이 상접한 매니저와 직원들은 탁자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매니저] (곡을 하듯) 군인들의 배탈 설사가 모두 우리 탓이라니! 우리는 그저 버거를 만들어 팔았을 뿐인데! 버거를 만들어 팔았을 뿐인데!
[의원]   (갑자기 들이닥치며) 주인 계시오! 
[매니저] (울상이 된 채 그대로) 장사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의원]   나는 버거국 의회 의원이오. 
[매니저] (못 믿는 듯 그대로 앉아서) 의원님이시라고요? 아니 의원님께서 이 누추한 곳엔 웬일로…?
[의원]   이 집이 지난 며칠 동안 왕궁과 군대에 버거를 공급해 대박을 터뜨린 그 로테리아 맞소?
[매니저] (이제야 일어서며) 맞습니다만….
[의원] 이번에 우리 의회에서는 국정 안정을 위해 세금을 걷기로 했소. 그중 하나가 초과이윤세, 즉 횡재세인데 이 가게가 궁과 군은 물론 온 백성에게 버거를 팔아 횡재를 했다고 해서 횡재세를 99프로 부과하기로 했단 말이요. 
[매니저] 횡재라뇨? 우리는 완전 쪽박 신셉니다요!
[의원]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법과 원칙에 따라서. 매니저 법과 원칙이라뇨? 아니 의회는 우리 백성을 위해 일하는 곳 아닌가요?
[의원]   일은 항상 하고 있지요. (갑자기 표정이 바뀌며) 그런데 듣자 하니 (은근한 말투로) 이 집 버거가 그리 맛있다고요? 
[매니저] (정신이 퍼뜩 들며) 버거요? 어디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의원]   (더욱 은근한 말투로) 의사당 안에서 매일 매일 채식 버거만 먹다 보니까 이젠 정말 질려버렸답니다. 
[매니저]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매니저의 눈치를 받은 점원들이 주방으로 달려간다)
[의원] (벽에 붙은 버거령을 발견하고는) 감히 의회를 해산하려 하다니! 아무래도 왕권을 제한해야겠어. 버거령 남발권도 좀 줄이고, 버거에 대한 선택권도 폭넓게 인정하고, 육식으로 인한 가축 도축량도 줄여서 기후도 안정시키고, 채소와 곡물 재배 면적도 넓혀서 땅의 힘도 북돋아 주고 해야겠단 말이지. 그런데 제일 문제는 왕비야. 대왕과 같이 있으니 누가 왕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의원들 세비가 많다며 줄이자고 한단 말이야. 이건 좀 아니라고 봐. 나라를 위해 애쓴 우리가 은퇴 후를 좀 대비하겠다는데 뭐가 그리 잘못된 거지? (매니저에게) 안 그렇습니까?
[매니저] 아. 네. 맞습니다요. 
[점원]   의원님. 버거 나왔습니다요. (버거를 조심스레 바친다)
[의원]   (받아서 한 입 먹어보고는) 정말 맛있네. 맛있어. 
[매니저] (눈을 빛내며) 하나 더 드릴까요?
[의원]   아닙니다. 절제의 미덕이야말로 우리 의원들의 강점이니까요. 
[매니저] 그래도…. (버거 하나를 더 건네며) 횡재세는 좀 어떻게….
[의원] (냉큼 받으며) 9프로, 9프로 깎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횡재 아닙니까? (버거를 한입 물며) 흠. 맛있네. 맛있어. (도망치듯 나가며) 그럼 전 이만! 
[매니저] (의원 뒤통수에 대고) 의원님! 돈은 내고 가셔야죠! (내다보며) 에이, 버거 먹다가 식중독에나 걸려버려라! 퉤! 퉤! (매니저의 침이 마침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튄다) 아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손님이 돈을안내고튀는바람에!
[손님3] (침을 털어내며) 거 환영 한번 거하군요. (매니저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손님4]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그 유명한 로테리아 맞지요?
[매니저]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테리아는 맞습니다. 
[손님3] 이 집이 이번에 온 백성에게 버거를 공급했던 그 가게가 맞는다는 거지요?
[매니저] 네. 그렇습니다. 
[손님5] 이번에 전국백성연합회에서 ‘군주권은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백성은 버거의 종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버거 독점권을 폐지하라’라는 기치를 내걸고 헌법재판소에 대왕의 탄핵을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목숨 건 싸움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매니저] (시큰둥하게) 그래서요? 
[손님4] 로테리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매니저] (다시 울상이 되어) 협조라고요? 무슨 협조요? 우리는 그저 버거를 만들어 파는 영세 업자일 뿐이라고요!
[손님3] 그러니까 팔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많이요.
[손님5] 탄핵 운동을 이어 나가려면 먹어야 하거든요. 비용은 선결제하겠습니다. 
[매니저] 또 대량 주문을 하시겠단 말인가요? 저번 군대처럼?
[손님5] 우리는 군대가 아닙니다. 육식 버거도 원하지 않습니다. 
[매니저] 그럼요? 
[손님3] 우리가 제공하는 친환경 신선 야채와 고기를 7:3으로 섞은 버거 천 개를 만들어 주세요. 
[매니저] 7:3으로 천 개를요?
[손님5] 듣기로는 군에서 고소도 당했고 횡재세도 엄청 많이 내야 한다고 하던데요.
[매니저] 어떻게 알았어요?
[손님4] 그러니까 계약하시죠.
[매니저] 정 그렇다면 (굳은 표정으로) 조건이 있습니다. (결연하게) 우리 버거를 먹고 배탈이 나든 설사를 하든 고소도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는다. 
[손님들] 좋습니다.

매니저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직원들과 주방으로 들어간다. 손님들이 로테리아 벽면에 탄핵 포스터를 붙이고 문을 나선다. 잠시 후 버거 식재료가 도착하고 주방은 다시 바빠진다. 다시 시간제 근로자들이 들어오고 배달 기사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그 사이 벽에 걸린 달력이 한 장씩 찢겨나가지만, 탄핵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직원들은 다시 녹초가 되어 매장 안 탁자에 널브러진다. 탄핵 집회로 시끄럽던 밖이 웬일인지 조용하다.

[매니저] 탄핵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싫다, 싫어! 탄핵도 버거령도 다 싫다! 우린 그저 버거를 만들어 팔았을 뿐인데 왜 세상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거냐고! 왜! 왜! 왜! 대박이든 쪽박이든 다 그만두고 쉬고 싶어! 제발 이젠 그만 쉬고 싶다고!

손님 1, 2가 들어와 주문하고 탁자에 앉는다.

[손님1] 그동안 이곳도 많이 변했군.
[손님2] 그러게. 저번엔 벽에 포고령이 붙더니 이번엔 탄핵 포스터가 붙어있어. 
[손님1] 매니저님!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매니저] 네. 힘듭니다. 너무, 너무 힘들어요.
[손님2] 그래도 그 사이 꽤 벌지 않으셨나요? 
[매니저] 벌기는요.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저 가게 세 제때 내고 직원들 월급 제때 주고 가끔 좋아하는 자전거 여행도 좀 하고 이윤이 남으면 저축도 하고 노후 대비도 하는 그런 소박한 거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천 개의 주문을 넣는 거예요. 
[손님2] 정말 대박 아니었나요? 
[매니저] 그런데 느닷없이 배탈 설사라뇨! 우리 가게는 위생에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었거든요! 어디서 상한 고기를 사들여와 공급한 군이 잘못한 거지 우리는 정말 잘못한 게 없거든요.
[손님1] 군이, 아니 왕궁에서 고소했다면서요? 
[매니저] 그러니까요. 아니 우리 같은 영세 업자가 군을 상대로, 대왕을 상대로 소송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러다가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지 이번엔 탄핵 무리가 들이닥쳐서는 천 개의 버거를 그것도 자기들이 공급하는 친환경 식재료로 만들어달라는 겁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구나 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해보니까 역시나 모든 게 결국 일이라는 겁니다. 나를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24시간 나를 갉아먹는 일, 나를 닦달하는 일, 우리를 닦달하고 마모시키는 일이었단 말입니다.
[손님2] 우리 매니저님 단단히 실망한 모양입니다. 
[점원]   주문하신 버거 나왔습니다.
[매니저] 드세요. 괜히 손님들께 넋두리나 하고 말았네요. 
[손님2] 아닙니다.
[손님1] 매니저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버거가 새롭게 보입니다. 
[손님2] 이 버거 하나에 얼마만큼의 눈물 콧물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겠어요.
[매니저] 우리 버거는 위생상 깨끗합니다요! 눈물, 콧물 단 한 방울도 안 들어갔다고요!
[손님2]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매니저] 이젠 다 싫습니다! 싫어요! 돈도 좋고 세상의 인정도 좋지만 전 이제 정말 쉬고 싶답니다. 쉬고 싶다고요!

이때 사령관이 총을 든 군인들을 데리고 다시 들이닥친다. 군인들은 사주경계에 돌입한다.

[매니저] (벌떡 일어서며) 어서 오십…. (사령관을 알아보고는) 여기는 왜 또? 
[사령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그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매니저] 갑자기 존대를 하시니…!
[사령관] 우리 고기가 산 넘고 바다 건너오면서 급격한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정중히) 고소는 취하하겠습니다. 
[매니저] 그럼, 우리 잘못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사령관] 당근이죠.
[매니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령관] 그건 그렇고 버거 대왕께서 새로운 미션 하나를 하달하셨습니다. 
[매니저] (울상이 되며) 새로운 미션이라고요? 지금 탄핵 중 아닌가요?
[사령관] 탄핵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매니저] 실패라뇨?
[사령관] 건강을 회복한 군인들이 다시 의사당을 공격했거든요. 의사당에서는 기후변화로 제철 채소들과 콩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수확량이 확 줄자 며칠 못 버티고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포고령 해제 의결서는 왕궁에 도달도 하지 못했고요. 이래서 우리의 버거 대왕은 하늘의 은혜를 받은, 하늘이 내리신 왕이라는 겁니다. 하하! 
[매니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랬군요.

사령관이 같이 온 군인에게 지시하자 군인이 새로운 포고령을 벽에 부착한다.

[사령관] 새로운 버거령입니다. 
[매니저] 버거령이 또 나왔어요? 
[사령관] (매니저에게) 읽어보시겠습니까?
[매니저] (다가가 힘없이 읽어 나간다) 버거국 버거 대왕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노라. 첫째, 버거 대왕은 하늘이 내린 왕이니 그 명령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의회로부터 대왕의 포고령 해제 권한을 박탈한다. 셋째, 모든 백성은 삼시 세끼 버거를 주식으로 해야 한다. 넷째, 로테리아에 버거 공급권을 다시 일임한다. 다섯째, 이번 칙령의 단 한 자라도 거부하고 위반하는 백성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할 수 있으며 이에 저항하거나 거부할 경우 즉결 처단 또는 국외 추방한다.
[사령관] 참으로 멋진 버거령 아니겠습니까?
[매니저] 네. 정말 멋지네요. 너무 멋져요. 그런데 새로운 미션이란 건 뭐죠? 
[사령관] 네 번째 칙령에 나와 있습니다. 
[매니저] 네 번째라면 (사이) 말하자면 로테리아를 대량 버거 공장으로 탈바꿈시켜라? 
[사령관] 맞습니다. 특히 왕비 세트는 좀 더 다양하게 특화하라는 주문이십니다. 그리고 이 로테리아 건물도 왕궁 안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매니저] 가게를 왕궁 안으로요? 우리 의견은 듣지도 않고요?
[사령관] 이미 건물주와 얘기를 끝냈습니다. 법과 원칙에 따라 그리 한 것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매니저] 법과 원칙은 우리 가게의 모토입니다! 가게 이름도 그래서 법을 의미하는 로(law)를 넣어 로테리아(Lawteria)라고 지은 거라구요!
[사령관] 버거국에서는 버거 대왕만이 법과 원칙의 제정권과 집행권이 있음을 알려드려야겠군요.
[매니저] 저는 못합니다. 죽어도 못 해요. 아무리 대왕의 칙령이라고 해도 로테리아는 우리 가게입니다. 법과 원칙은 우리가 정한 우리들의 모토라고요! 그리고 어째서 이 나라에선 법과 원칙이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바뀌고 또 바뀐답니까? 다 나가 주세요! 총칼로 위협한다 해도 우리가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이제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아니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란 걸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대박의 꿈에 부풀어 밤낮없이 일하며 주문량에 맞추고 배달하고 했습니다. 그덕에 차도 사고 집도 사고 명품도 사보고 다 했습니다. 사람도 기계처럼 막 부려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욕망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버거를 만들어 파는 소박한 욕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를 이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런 우리의 가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 합치면 왕궁보다 의사당보다 군인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들을 모아 진정으로 법과 원칙이 최우선인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 법과 원칙은 권력에 부역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람으로 섬기고 위하는 법과 원칙입니다. 그 법과 원칙에 따라 우리는 왕비 세트를 메뉴에서 내리고 탄산음료가 담긴 플라스틱병은 팔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땅과 공기를 더럽히지 않는 정도의 채소와 고기만을 이용할 겁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길이라고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가서 대왕과 왕비 마마께 전하십시오. 로테리아를 놔둬 달라고요. 우리는 그저 버거를 만들었을 뿐이라고요!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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