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27
0
50년 전 일이다. 결혼을 하고 사대봉사 집 맏며느리가 되면서, 기일에 맞추어 한두 달마다 제수용품을 사러 경동시장 나들이를 했다. 강북에서는 제일 크다는 경동시장터의 끝자락에 국밥집이 있고 식당 문 앞에 간이 식탁이 놓여 있다.
양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잠시 쉴 겸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에 덜 세련돼 보이는 50대 정도의 중년 여인이 혼자 앉아 늦은 점심인지 국밥을 먹고 있다. 그릇 옆에 앙증맞게 반짝거리는 유리 소주잔이 비어 있다. ‘뭐 하는 여자길래 이 시간에 웬 소주잔이야?’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내 속을 읽었는지 “밥 먹기 전에 목축임으로 한 잔 했어요” 하며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건넨다. 한 잔을 했는지 한 병을 마셨는지 알 바 아니라는 듯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릇을 싹 비우더니 식당 안을 향해 “한 잔 더 주세요!”라고 호탕하게 소리 지른다. 한 번에 들이켜고 캬아, 하면서 “여기는 잔술도 팔거든요. 밥 먹고 목가심으로 한 잔 하면 기분이 딱이지요”라며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꽤나 큰 장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휑하니 가버렸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무심히 바라보다 한 병이 아닌 한 잔도 판다는 소주잔에 슬그머니 관심이 갔다. 출출하지도 않은데 국밥에 소주 한 잔을 시켰다. 잠시 쉬려다가 갑작스럽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좋아했고 친구들은 나를 호기심 많은 ‘호부인’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역시나 호기심이 발동한다.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니 ‘크으윽’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조금 전 여인이 냈던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국물부터 들이켰다. 반주 때문인가 몇 숟가락에 식곤증이 오듯 몸이 편안해졌다. 없던 밥맛이 당긴다. 그 여인을 따라 해 보고 싶었을까. 큰 소리로 한 잔을 더 시켜본다. 식사 마무리 목가심으로 맛도 모른 채 숭늉 마시듯 목으로 꿀꺽 넘겼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창밖 햇살은 따사롭고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기분 좋게 몸은 나른하고 자리가 편해진다. 하지만 내려야 한다. 서너 정거장이라 먼 거리도 아니고 자주 다니는 길인데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동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가끔 보던 뒷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제사장 보고 오는 길이에요.”
아주머니 앞을 막고 서서 희죽 웃으며 인사를 하더란다. 발그레한 낯으로 안 하던 짓을 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여 “아유 무겁겠네. 새댁 어서 가요” 하며 등 떠밀어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말을 훗날 들었다. 아마 내가 취했던 모양이다. 30대에 젖먹이까지 아이가 넷이나 되는 아줌마인데도 동네 분들이 여전히 새댁이라고 불러주던 시절이었고, 소주 두 잔과 조우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소주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는지 그동안 어쩌다 지인들과 치킨에 생맥주 잔을 나누거나 명절 차례 끝에 가족들이 나눠 먹던 음복잔이 전부였다.
어느새 80대 중반에 들어서고 삼시 세끼 밥상 차림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혼자서 적당히 밥을 먹는다. 저녁 날씨가 쌀쌀해서일까, 오랜만에 따끈한 국물을 홀짝거린다. 국밥에 반주를 곁들이던 경동시장의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생각났다. 요리할 때 쓰고 남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소주를 꺼내본다. 얼마나 오래된 술인지도 모르겠다. 남실남실 따라 목축임으로 첫 잔을 마셔본다. 양볼이 분홍빛 수밀도 같다던 20대로 되돌아간다. 두 번째 잔이 들어가니 얼굴은 화끈거리지만 몸은 두둥실 가벼워진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콧노래도 나온다.
‘까짓거, 한 잔 더!’
섣부른 용기에 한두 잔 더 들이킨다. 가슴은 찌르르 머리가 가물거린다. 술이 술을 부른다던가. 두 잔에서 끝냈어야 하는데 서너 번 거푸 마신 덧잔에 ‘겉바속촉’이다. 입은 바싹 마르는데 속은 촉촉하게 너울거린다. 혼자 앉은 밥상이 괜히 슬퍼진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리고 졸음이 온다. 술은 기분이 좋을 때 마시면 기쁨은 배가 되는지 몰라도 언짢을 때 마시면 두 배로 슬퍼지나 보다.
100세 시대, 장수 비결의 하나로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한다. 늙어서도 멀쩡한 걸음으로 자기 집을 찾아갈 정도로만 종종 마시면 보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마셔 보고 싶지만 늙발에 고주망태로 취해 살면 치매가 빨리 오지 않을까 두렵다.
로망도 하나 있다.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국수 한 그릇 말아 놓고 지인들과 소주잔을 마주치며 수다를 떨어보는 것이다. 느긋하게 앉아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면 서너 잔이 아니라 병째 마셔도 끄떡없을 것 같은데.
좋은 시절은 되돌아오지 않고 허물없이 대작해 줄 사람도 없다. 목축임과 입가심으로 딱인 소주 두 잔이 가끔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