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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된 필담(筆談)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경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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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이상해졌다. 목이 쉰 듯 쇳소리가 나서 영 찜찜하고 불편했다. 우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해도 전혀 차도가 없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왜 진작 오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치며 성대 내시경을 시도하셨다.
난생처음 간 이비인후과였고 내시경도 처음 해보는지라 얼마나 긴장했던지 시키는 대로 못하고 자꾸만 침을 삼켜버려 몇 번이나 실패한 뒤에 겨우 호흡을 맞추어 찍으니 성대 한쪽에 조그만 혹이 몇 개 있단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무조건 2주 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고, 그게 곧 처방전이라면서 약도 없으니 본인의 의지로 고쳐야 됨을 재강조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을 대신할 필담, 절대 침묵, 침묵 처방, 지금까지 잘 쓰지 않던 낱말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등산을 갔다가 ‘입산 금지’ 팻말을 보면서 일행 중 한 사람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산길이 워낙 닳고, 자연 보호가 되지 않으니 동식물 보호를 위해 몇 년간 출입을 금하여 쉬게 하는 것이나 평생 등산을 많이 해 무릎 연골이 닳아 수술하고 쉬어야 하는 사람이나 비슷한 격이라고.
나도 직업상 여태껏 성대를 많이 써왔기에 당연히 쉬게 해야 되고, 함구령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필담뿐이니 소통의 방법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자주 가는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나의 근황을 전하며 병을 오근조근 알렸다. 억지로 침묵해야 하는 심경을 토로했더니 삽시간에 응원단을 결성한 듯 많은 회원들이 댓글로 격려해줬다.

A: 성대결절은 무조건 말과는 이혼해야 합니다, 저도 앓아본 경험이 있어 그 사정 누구보다 잘 압니다. 우짜든동 입에 자크를 채우고, 목 보온을 잘 하셔야 합니다. 목까지 올라오는 티셔츠 집안에서도 입고요. 절대 열 받으면 안 됩니데이. 신경과 밀접한 관계로 아셨지요?
B: 저도 언젠가 그러해서 목을 안 쓰고 거의 한 달 만에 나았어요. 조그만 팻말에 말 못하는 사정을 짧게 써서 목걸이로 걸고 다니세요.
C: 아이구, 우야꼬. 이틀도 아니고 2주씩이나 말을 않고 답답해서 어찌 사신데요. 정말 도 닦으셔야겠네요. 그게 치료니 어째요. 이곳에 들어오셔서 날마다 사랑방에 글로 풀어놓으셔요. 그게 곧 빨리 혹 떼어내는 방법이지요.
D: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해요. 저는 선천적으로 성대가 약하다고 말을 많이 하지 말래요. 제가 교사라니깐 직업을 잘못 택했다고 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 있어요. 이 기회에 푹 쉬셔야 합니다.
E: 울 남편도 성대결절 수술받고 2-3주 말 못하고 산 적 있어요. 저랑 손바닥에 적어 의사 표시했죠. 의사 선생님이 겁을 많이 주더군요. 얼른 안 나으면 수술해야 된다고… 에구구.
G: 저도 아주 오래전 그런 적 있는데 그때 말소리가 안 나와서 벙어리 되는 줄 알았어요. 잘 치료하세요. 살다 보니 별별 경험을 다 해보지요. 어차피 겪는 일이니 즐기시기 바랍니다.
H: 어쩌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필요해요. 그래야 건강의 고마움을 더 느끼거든요.
I: 울 아이들 어렸을 때 둘이서 얼마나 시끄럽게 노는지 제가 내리는 벌칙이 <묵언 정진 10분>이었어요. 눈으로 많이 보시고 글로써 많이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K: 주변의 선생님들에게서 자주 듣던 병명이네요. 무선 마이크 달고 수업하던데. 소곤대는 법, 에고, 성질 급한 사람은 그거 참 힘든데, 안 급하시죠?
L: 카페의 방마다 문 열어보면서 글 수다를 떠세요. 그게 최고예요.

이분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고 그저 야생초를 좋아하는 공통점 하나로 뭉쳐진 카페의 회원들인데, 여기서 참 많은 꽃 공부도 하고 덤으로 사람답게 사는 방법도 배워왔던 터다.
뉴스에서 악플에 시달려 생을 마감하는 연예인이나 청소년들을 가끔 보았는데 오늘의 이 선플들은 참으로 나를 신나게 하고, 일어서게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날 밤에 나도 댓글 답장을 썼다.
‘이거 참 지독한 고문이네요. 여러모로 반성도 하게 되고 그래서 이 기회를 감사드리죠.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여러분들이 모두 이렇게 격려해주시니 힘이 나요. 그저 묵묵히 근신하면서 지내기로 마음 단디 먹었거든요. 여러분, 고맙심데이!’
쉼 없이 말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일들이 오히려 무언의 힘으로 가능했고, 한쪽을 닫으니 다른 쪽으론 더 진지해지고 깊어짐을 느낀 2주일이 휘익 지나갔다. 새로 얻은 목소리가 이젠 눈에 선명히 보일 것처럼 또랑또랑 사랑스럽다. 필담의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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