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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폭탄이라더니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세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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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자욱한 안개 속이다. 한밤중이면 실루엣으로 천장 가득히 뜨던 창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창문 밖도 하얀색 일색이다. 문득 일기예보가 생각나 천천히 일어나 이중창을 열었다. 훅 하고 뺨을 치는 바람과 함께 자디잔 눈송이가 얼굴에 닿는 촉감이 산뜻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빛나는 눈송이들이 꿈속인 양 서서히 나를 매혹시킨다. 두어 시간 전만 해도 일기예보와는 달리 샛별이 반짝이는 청명한 밤하늘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보대로 흰눈이 삽시간에 온 세상을 덮어 새하얗다. 언어의 폭력이라 생각했던 ‘눈폭탄’이란 말에도 내가 과민했다는 생각이 든다.
6·25 때, 집 마당에 폭탄이 떨어져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던 것과 불에 타버린 옆집을 본 경험이 있는 나는 폭탄의 위력에 몸서리를 친다. 그런데 눈폭탄이라니. 폭설도 겁나는데 ‘폭탄’은 과장이 심해도 도를 넘는 것 같기도 해, 이즈음 우리말이 순화보다는 극단적 표현이 늘어가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던 터였다.
밝은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산책로와 정구장의 고즈넉한 모습이 햇솜 이불을 깔아놓은 듯 포근하고도 평화로워 보였다. 낙엽 져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핀 상고대들이 신비롭고 솔잎에 쌓인 흰눈은 만개한 목화꽃인 양 참으로 아름다웠다.
오늘은 정형외과에 도수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서둘러 준비를 하면서도 도로 사정이 마음에 걸린다. 방송에서는 계속 대중교통편 이용과 외출 자제를 권유하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에 기온은 영상이라던 예보대로 산책로는 다 녹아 질척거리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재활 치료를 받는 동안에 반짝 햇볕이 났다. 집에 와 보니 신비스럽던 상고대는 다 녹아버렸고 솔잎들은 솜옷이 무거운 듯 절반쯤을 벗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솔밭은 아직은 푸른 치마에 새하얀 저고리 차림인 양 산뜻했다.
정구장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가래와 대비로 눈을 치우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창문을 열어놓는 여름철 새벽녘이면 톡톡 탁탁 공 치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로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눈비에도 열심히 관리하는 이들의 수고를 알기나 할까.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서 두 달, 집에서 6개월을 두문불출하는 내 처지가 새삼스레 한심하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가 다시 소생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고, 나 자신도 죽음을 아주 가까이 느껴야 했다. 병석에서 맞고 지내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지만 ‘하나님이 내 몸을 리모델링 시키고 계시는 거다’ 자신을 세뇌시키며 버틴다.
며칠 만에 워커에 의지해 산책을 나섰다. 내 집 창밖으로는 아름답게만 보이던 소나무 동산인데 수난을 당한 모습이 처참했다. 40년을 우람하게 자라 당당하게 섰던 나무들이 무참하게 휘고 부러져 몰골이 말씀이 아니다. 가장 크고 씩씩하게 중앙에 버티고 섰던 나무의 피해가 가장 컸다. 가지는 가지대로, 중동이는 중동이대로 찢어지고 부러져 기사회생이 어려울 것 같다. 오만함에 대한 응징일까, 아니면 노쇠한 탓일까. 그 곁에서 곰실곰실 커가던 나무들이 오히려 건재하다. 사회 곳곳에서 오만방자하게 재력, 권력 등등의 힘을 자랑하던 사람들의 꺾인 말년이 생각난다.
비단 솔밭만의 피해는 아니다. 아파트 곳곳에서 늘 푸르름을 자랑하며 고고하게 자라던 침엽수들의 수난이 낙엽 진 활엽수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나다. 4층 아파트를 따라잡던 가문비나무 두 그루의 모습도 참담하다.
밑에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쌍둥이처럼 자라던 나무는 북쪽 둥치가 우지끈 부러진 모양새요, 남쪽 둥치는 휘어져 곧 곤두박질칠 기세다. 또 한 그루는 중동이가 부러져 본 둥치에 걸려 있고, 가지들도 엉망으로 휘고 부러져 몰골이 엉망이다.
홍수와 가뭄의 피해는 익숙했어도 눈의 피해는 비닐하우스나 도로 결빙으로 인한 피해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상록 침엽수들의 수난을 보니 섬뜩하다. ‘눈폭탄’이란 말에 언어의 폭력성을 가중시킨다며 구시렁대던 나도 공감을 했다.
다음 날부터 사다리차까지 동원된 소나무밭 정리가 시작되었다. 가장 컸던 두 그루는 완전히 제거되고 작은 나무들은 오히려 생생하니 기특하다. 중간 크기의 나무들도 부러지고 휘어진 가지들이 뭉턱뭉턱 잘려나간 자리에 나이테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상처를 보니 내 몸에도 소름이 돋아난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무들을 보며 자연의 위력에 두려움이 앞선다.
잘린 나무들은 산더미처럼 곳곳에 쌓여 있다가 며칠 뒤, 트럭으로 실려 나갔다. 이로써 단지 내 솔밭도, 정원들도 말끔하니 정리가 끝났다.
“덕분에 말쑥하게 전지한 모습이 시원해 보이네.”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잘린 자국에 선명히 남은 나이테만 눈에 들어와 ‘아파, 아파’ 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나무들의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가 되고 있을 터인데, 내 상처가 나을 듯 나을 듯 오래 낫지를 않아서일까. 유난히 눈폭탄 맞은 나무들이 가엾어 보인다.
폭우, 폭설, 우박, 낙뢰, 지진, 파도, 해일, 홍수, 눈폭탄까지. 밝고 찬란한 햇빛, 푸른 하늘, 잔잔한 바다, 산과 들, 시내와 강, 호수, 산천초목, 꽃과 새 등등.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인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다스리고 거느리며 그 안에서 번성하라 하셨다. 그 말씀대로 잘 활용하고 극복하면서 참으로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만할 때 뜻밖의 재난을 겪는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 삶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두려워 겁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자만하지 말라는 일침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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