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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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연꽃의 본산인 관곡지에 연꽃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인데,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창밖을 연방 내다보며 어떡할까 망설일 때, 친구가 계획대로 가자고 전화를 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소사역에서 내렸다. 친구와 만나 마을버스를 타고 동아아파트 앞에서 내려 걸어가는 중에 다행히 비가 멎었다. 작년에는 연꽃 테마파크부터 보느라고 시간이 늦어 정작 관곡지는 못 보고 돌아가게 되어 아쉬웠기에 오늘은 관곡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관곡지는 시흥시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으로, 세조 때 농학자인 강희맹이 사신으로 명나라 남경에 다녀올 때 그곳 명당지에서 연꽃 열매를 가져다 관곡지에 재배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후에 그의 사위 권만형에게 물려주어 지금까지 안동 권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관곡지는 가로 23m, 세로 18m 정도의 아담한 연못인데, 이렇듯 별로 크지 않은 연못에서 시작된 연꽃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니 이 연못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 모르겠다.
관곡지의 연꽃은 유난히 크고 단아한 자태의 하얀 연꽃으로, 꽃잎이 뾰족하며 끝부분에 보일락 말락 살짝 연분홍 물이 어려 있다. 하얀 꽃잎 가운데에도 마치 갓난아기 뺨에 내비친 실핏줄처럼 희미하게 연분홍 가는 실금이 살짝살짝 보여 더 청순한 이미지이다. 세상 모든 꽃은 모양이나 향기가 다 달라서 어느 것 하나 신비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없으나, 아침 햇살을 받은 연꽃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비할 데가 없다. 더구나 새벽에 내린 비로 말갛게 씻긴 넓은 초록빛 연잎은 하얀 연꽃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였다. 연꽃은 꽃이지만 함부로 만져볼 수 없는 숭고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특별한 꽃으로 여겨진다. 부처님과 인연이 닿아 있는 꽃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연못 속에 깊이 잠겨 있으니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이래저래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감상하게 마련이다. 겹겹의 꽃잎 가운데에 연노랑 꽃술이 있고, 앙증맞은 연두빛 씨방이 정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작은 동전만 하지만 가을이 되면 몇 배로 크게 자라 그 안에 강낭콩만 한 진한 갈색 연밥이 가득 찰 것이다. 돌담을 따라 걷다 보니 잔디밭 위에 철판을 용접해 만든 커다란 연꽃들이 만발하였다. 조각가의 솜씨가 아무리 빼어난들 연못에 피어 있는 백련에 비할 수 있을까.
연꽃 테마파크에는 가지각색의 연꽃 무리가 우리를 반겼다. 4월 초파일에 부처님 앞에 올리고 법당 안팎에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매다는 연등처럼 생긴 진분홍과 연분홍의 탐스러운 연꽃, 순백의 연꽃과 뾰족한 꽃이파리 끝을 아련히 발갛게 물들인 하얀 연꽃, 연노랑 꽃잎 가장자리만 분홍색으로 테를 둘러서 마치 커다란 장미 같은 연꽃도 있다. 아주 드물게 샛노란 연꽃도 눈에 띄었다. 꽃잎의 생김새도 주름잡은 듯한 꽃, 동그스름한 꽃, 홑꽃에 겹꽃 등 다양하다. 건너편 더 넓은 연못에는 운두가 높은 거대한 쟁반처럼 생긴 검푸른 초록빛 연잎들이 떠 있었다. 잎 표면에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고, 뒷면은 어두운 적자색이다. 이 식물이 바로 가시연이다. 잎의 지름이 2m까지 자라기도 한다는데, 식물이지만 기가 너무 드세 보여 왠지 가까이하기 싫고 무섭게 느껴졌다. 커다란 멧방석만 한 잎에 비해 꽃은 초라해 보였다. 마치 작은 방망이 끝에 피려다 만 것처럼 보이는 보라색 꽃이 거대한 잎사귀 한편에 매달리듯이 피어 있다. 부들이 무성한 작은 연못에는 운두 얕은 양푼처럼 생긴 넓은 잎사귀들이 여기저기 떠 있고, 노란 어리연과 아기 손톱만 한 작은 어리연도 지금이 한창때인 듯 연못을 다 덮을 기세로 퍼져 나가고 있다. 탐스러운 연꽃과 달리 물물 위에 수줍은 듯이 떠 있는 꽃분홍, 노랑, 진보라, 분홍 등 가지각색 수련은 귀염성스럽다. 반대편에 수백 마리의 노랑 나비가 물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듯이 보이는 저 꽃은 무슨 꽃일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메꽃처럼 생겼는데, 표지판에 ‘물양귀비’라고 써 있다. 수생식물의 세계도 땅 위의 식물 못지않게 다양하고 신비롭다. 처음 보는 꽃이 너무 많아 놀랐다.
가끔씩 빗방울이 후드득거리기도 했으나 연꽃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벽에 내린 비로 넓은 연잎 한가운데 우묵한 곳에 고인 물이 수정구슬처럼 반짝였다. 연잎사귀 가장자리의 톱니 같은 곳마다 물방울이 예쁘게 매달려 영롱하게 빛났다. 연꽃은 아침녘에서 정오쯤까지 제일 예쁘다. 한낮이 지나고 해가 지면 꽃잎을 닫고 잠을 자기 때문에 더워도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즐겨야 한다. 여기저기에 삼각대를 세우고 연꽃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사진 애호가들이 여념이 없어 보였다. 아주 오래전 여고 시절에 5월 초가 되면 덕수궁 후원에 만발한 모란을 열심히 그리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창덕궁과 비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서 주말마다 비원 곳곳을 스케치하곤 하였는데…. 요즘은 인원 제한에 관람 시간 제한, 그리고 안내인을 따라 단체 관광하듯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야 하니 매력이 없어졌다. 하긴 엄청나게 늘어난 관람객을 규제하지 않는다면 궁궐과 비원의 숲이 훼손될 염려가 있겠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비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립다.
무덥고 무더운 한여름에 땡볕 아래에서 넓은 연못을 돌아보며 수많은 연꽃을 원 없이 감상하였다. 모자를 썼어도 얼굴이 벌겋게 익을 지경이었다. 초록 물결 넘실대는 연잎 바다에 셀 수 없이 많은 연꽃 봉오리를 돛대인 양 곱게 올리고 유유히 떠 있는 연꽃을 보며 내 마음도 너울거리는 연잎에 실려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