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바꾸어 생각하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병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조회수28

좋아요0

내 얘기 좀 들어 봐! 한 친구가 말했다. 여간해서 속내를 꺼내지 않던 그녀가 웬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 시누님이 아침에 방문했어. 대뜸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마르셨어?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검진받으셨는데 건강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해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 것 같아요 했더니, 아버지 연세가 어때서? 하며 시누이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는 거야. 백 세를 훌쩍 넘은 김형석 교수가 방송에 나왔는데 여전히 건재하시더라, 게다가 강연을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아버지는 그분보다 젊지 않느냐, 요즘 백 세를 넘기고도 건강한 어르신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하는데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어. 좌중이 술렁였다.
지난여름, 그녀는 시아버님의 백수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몇 해 전 시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녀는 시부님에 손주들까지 돌보느라 온종일 허리가 휘도록 돌아치고 있었다.
시아버님 기력은 여전하셔.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지난 주말에도 속초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걸. 시누님은 단백질 부족이라는 둥 운동 부족이라는 둥 아버님께 지청구를 엄청 하고 가더니만 글쎄 쇠고기를 택배로 보내왔지 뭐야. 우리 시누님은 외며느리로 층층시누이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겪은 분이야.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하리라 믿었는데. 나를 한두 해 본 것도 아니고….
그날 이후 집안 친척들의 방문이 이어졌어.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뵈러 온다고. 그새 아버님 건강이 안 좋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야. 나도 딸이라, 시누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불쑥 시집살이하며 마음고생하던 때가 떠올랐다. 시누이들의 지청구에 나는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대꾸했다가 돌변한 그네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은 일도 있었다. 시어머니는 여자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흥한다며 나를 나무랐다. 말해도 탈, 안 해도 탈, 그런 살얼음판이 없었다. 어쩌면 나와 친구들은 시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건 시누이들도 매한가지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서로의 마음을 보듬을 수 없는 걸까?
아버님은 뭐라고 하셔? 내가 물었다. 역정을 내시지. 못된 것 같으니라고, 그 애 말은 듣지도 마라,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긴! 하셨어. 아버님 짱이야! 우리는 일제히 엄지를 들었다.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우리는 삼십여 년 친분을 이어왔다. 애들이 한창 자랄 때는 자랑할 것이 무에 그리 많은지 서로 다투듯 이야기에 끼어들더니만, 손주 자랑도 시들해진 요즘은 입만 열면 신세타령이다.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친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요즘 통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아. 왜? 글쎄 지난 명절 때 아들, 며느리를 앉혀 두고 언제 아기를 가질 거니? 물었거든. 아니, 어쩌자고 그런 걸 물어봤어? 결혼한 지 벌써 햇수로 6년째야. 그러니 내가 궁금하지 않겠어? 우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그렇지, 그 애가 말 안 할 때는 무슨 사정이 있겠지, 조금만 더 참지 그랬어. 잘못했네….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나무랐다. 우리의 성토에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왜, 시에미가 그런 것도 못 물어봐? 딩크족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던가. 이도 저도 묵묵부답이니 하도 답답하여 그랬어.
얘가 무슨 꽃노래야. 스카프로 한껏 멋을 낸 친구가 툭 끼어들었다. 손주가 있으면 뭘 해, 볼 수도 없는데. 이때까지 아들 집에 한 번 가봤네. 결혼하고 첨에 오라고 해서. 오라고 해야 가고, 보라고 해야 아이랑 놀아주고도 하지. 생일이나 명절 때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게 고작이야. 객쩍게 가기도 뭣해서 반찬 만들어 바리바리 싸갔다가 그냥 경비실에 두고 왔어. 며느리가 손자 데리고 문화센터에 갔다나? 연락도 없이 찾아오면 어떡하느냐고 아들이 오히려 성을 내더라고. 녀석도 답답했겠지. 만날 보고 싶어 하는 남편만 안쓰럽지….
어휴, 딸이라고 다르지 않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외동딸을 키워온 친구가 말을 꺼냈다. 글쎄 설날 전날 딸과 사위가 공항에서 전화를 했더라고. 둘이 여행 다녀오겠다고. 그래서 뭐랬어? 뭐라고 하겠어? 잘 놀다 오라고 했지. 미리 말한다고 내가 따라나설 것도 아닌데…. 사돈네 미안해서 괜히 마음 졸인 거 있지? 같이 먹으려고 장 봐둔 것도 많은데 부아가 나서 혼났어. 근데 막상 명절에 혼자 보내려니 참 적적하더라.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나도 나름대로 궁리라도 했을 텐데. 연휴에 연락할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사정을 말하기도 싫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괜스레 마음이 스산해졌다. 불현듯 우리는 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늘 일방으로 흐르곤 했던 소통에 진즉 이골이 났는지도 모른다. 모든 대화는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외침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얘들아,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머리가 희끗한 친구가 시선을 모았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져. 거창 오리 무리가 군무할 때 부딪히지 않는 건 서로 간격을 두고 날기 때문이래. 부모님, 자식 생각일랑 잠시 접어두어. 이 시간은 몽땅 우리의 것이야.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박수!
그렇다. 나는 며느리이자 시누이였으며 딸이기도 하다. 시어머니이자 장모이기도 했다. 사람 노릇이 그러하듯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고 한다. 어제 강에 흐르던 물이 오늘 보는 물이 아니듯 우리들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