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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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면 늘 창가에 앉는다. 창밖을 내다보며 버스가 연출할 도로변의 풍경을 관람하기를 기다린다. 휙휙 뒷걸음질 치는 가로수, 매일 똑같은 표정의 상가 간판들은 단조로워도 시커먼 공간의 지하철보다는 훨씬 낫다. 어제 본 곰탕집 간판도, 비슷비슷한 차들의 모습도 어제와 오늘의 감성이 다른 만큼 달리 보인다. 봄철 인도를 점령한 앙증맞은 꽃들은 쓰다듬고 싶다.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기도 하다. 비슷한 모습을 매일 보는 하찮은(?) 평화가 감사하다.
그날도 창가의 빈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십 층 상가의 그늘 속에 삼분의 일쯤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유리창에 모르는 여자 얼굴이 언뜻 비치다 사라졌다. 코를 중심으로 왼쪽만 보이는 그 얼굴은 티 없이 깨끗하고 성스러웠다. 성모마리아, 체칠리아 성녀, 아니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의 비비안리?
버스가 구르기 시작했다. 햇볕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피사체도 없어졌다. 머리를 쥐어짜도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며칠 뒤 같은 버스의 같은 자리에 또 앉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또 보았다. 가로수를 지날 때마다 반쪽 얼굴이 언듯선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누구인지 알지 못한 대로 좋겠지. 미장원 간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 아래 세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배를 내밀고, 뒷짐을 지며 뒤뚱뒤뚱 걷고, 할머니로 보이는 노파는 함박웃음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쬐끄만 것이 제 할아버지 흉내를 내고 있군. 건방지게시리.’
무심코 시선을 돌린 순간, 이번엔 반쪽 얼굴이 아니라 온 얼굴이 보였다. 황당했다. 아니 저건 내 얼굴 아닌가?
나는 될수록 거울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나,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이 거울에는 고스라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의 중세 마녀 같은 표정이군’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혼잣손으로 자식을 교육시켜야 했다. 몇 푼의 돈을 얻으려고 불붙은 강변에 황소처럼 뛰었다. 내 자식만은 어미처럼 고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만이 굳었다. 내 꿈은 마냥 미루었다. 아주 요원해 보였다. 서른네 평 아파트를 대출금 없이 장만했을 때까지도.
내 집 거실 정면에는 두 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한 장은 열일곱의 단발머리 소녀 얼굴이다. 여고 일학년 때 학교에 제출하려고 찍은 증명사진을 확대한 것이다.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한 사과처럼 사뭇 풋풋하다. 눈매에 신선함이 깃들었다. 갈색눈동자, 서양인의 피가 섞였다는 오해를 받았던 깊은 눈자위에 짙은 쌍꺼풀, 잘 닦은 유리에 낙서한 호소같이 애절한 홍채, 이데아를 꿈꾸는 눈이다. 내 인생에는 안락한 세계가 펼쳐진다. 악한 쪽은 쳐다볼 일도 없다는 표정이다.
일부종사, 삼종지도, 현모양처 교육을 받은 여자는 자신의 생각도 감정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시비에 휘말려도, 모함을 받아도 침묵해야 했다. 누구 눈에라도 모자라게 보여야 특히 여자는… 이라는 아버지의 완고한 교육 덕분이었다. 6·25, 4·19, 5·16의 굴곡진 민주공화국 역사의 과정과, 그것이 몰고 온 후폭풍, 도덕적 가치관에 휘청거렸다. 성리학에 젖은 계집애는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변화하는 인간관계가 징글징글했다.
BC 298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틀렸다. 인간은 결코 악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고난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본성은 있다. BC 372년에 태어난 맹자,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는 그의 성선설(性善說)도 틀렸다. 인간은 선한 면만 갖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여느 동물보다 강하고, 흉악한 피조물이 인간이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이 늦었다. 전철 안에서 검은 밤을 유난하게 비추는 교회의 빨간 첨탑을 보았다. 신길역에서 영등포역까지 한 정거장에 번쩍거리는 십자가는 서른 두개나 되었다.
‘교회는 나날이 늘어나는구나.’
교회의 십자가가 늘어나는 만큼 사람들의 심성도 그만치 좋아져야 하지 않을까? 한데 범죄는 점점 악랄해지고,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 오늘날의 현실은 성악설이나 성선설로 설명이 안 된다. 성악설이나 성선설은 기원전 300년 전의 중국 사람들의 지침서였다. 파우스트같이 선량하고 진리를 찾던 학자도 유혹에 걸려 악마(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렸다.
서양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대체로 백지에 가깝다고 했다. 붉은색도, 푸른색도, 아닌 무채색의 상태. 유전자의 영향보다는 교육과 환경, 자신의 의지를 훈련시키는 방향이 인간성을 결정짓는단다. 팔십년을 살아본 결과 이 학설에 박수를 보낸다.
성녀를 닮은 사진을 나는 좋아한다. 이데아를 꿈꾸는 눈빛,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안목, 세계명작을 거의 다 읽어낸 지성이 깃든 이마, 의지력이 완강한 윤각,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이런 내가 더없이 소중하다.
그 옆에 근엄한 표정으로 학사모를 쓴 사진은 2004년 2월에 찍은 것이다. 화장도 했고 주름살과 점을 삭제한 사진이다, 한데 감추어야 할 욕망, 절망, 회의, 증오를 가득 담고 눈꼬리에 날카로운 살기까지 느껴진다. 자식을 대학 졸업시켜 교육공무원 발령을 받게 한 뒤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갔다. 예순네 살에 찍은 졸업 기념사진이다. 60년을 살아도 세상이 서툴기만 한 여자, 미적분을 배웠어도 두 자리 덧셈에 쩔쩔매는 멍충이가 남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 내장에 쌓인 것은 세상에 대한 부정의 감정뿐이었던가?
사진에서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두 사진이 같은 사람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둘 다 내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다시 들여다봐도 낯설다. 아니 아니다, 둘 다 틀림없는 내 모습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사진의 이면에서도 나를 읽어낼 수 있다. 평범하지 않은 생김새에 평범하지 못한 세월을 살아온 이력이 사진에서 숨바꼭질하고 있음을.
모두 선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어렵다. 인간이란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라 선과 악의 잣대를 남에게만 대본다.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화두다.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문제. 선을 지향해 군자가 되든가, 악을 키워 범죄에 물들든가.
실정법 어기지 않고 기림직한 마음에 부채질하며 살다보니 째마리 나도 무난한 80년을 살아냈다. 딱 1회만 주어진 삶, 추호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매순간 내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증명사진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