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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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 마을. 깊은 산속, 평편하고 널찍한 초록 풀밭이 펼쳐진 그곳에는 토끼들만 모여 살고 있었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았고, 여름이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은 토토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게다가 산비탈 쪽으로 깊숙하게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와 바위 틈 사이로 생겨난 천연 동굴은 토끼들의 안식처로 딱 안성맞춤이었다. 토끼들에게 이곳 토토 마을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낙원이었다.
지난 늦가을이었다. 어디선가 불현듯 나타난 심술바람이 토토 마을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심술바람은 예뻐 보이는 것, 행복에 젖어 사는 모습은 절대로 가만히 두질 않았다. 빨강, 노랑, 분홍색 예쁜 옷으로 온통 가을 산을 화려하게 수놓은 나무들에게 달려가 가지가 부러질 듯 마구 흔들어 댔다. 처음에는 애써 버텨 보았지만 결국 나무들은 어쩔 수 없이 화려했던 단풍 옷을 벗어 던져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나무들을 괴롭혔던 심술바람은 토토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아예 이곳에 눌러앉을 셈이었다.
금방 겨울이 시작되었다. 동굴 속에 먹을 양식을 그득하게 준비해 둔 토끼들은 겨울 나는 데 걱정 없었다. 다만 갑자기 매섭고 차갑게 변신해서 토끼들을 못살게 구는 심술바람이 문제였다. 심술바람은 동굴 속까지 파고들어 토끼들을 괴롭혔다. 밤낮으로 차갑게 몰아치는 심술바람 때문에 감기몸살로 고생하는 토끼도 많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심술바람에게 따지며 대들지 못했다. 마냥 그렇게 당하고만 지내야 했던 겨울은 견디기 힘들어 더욱 지루하고 길었다.
그날도 가장 재빠르고 총명해서 마을에 일어나는 온갖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해 왔던 깡총이와 토순이가 나섰다.
“모두 모두 밖으로 나와 주세요. 그렇게 웅크리고 있지만 말고.”
마른 풀밭으로 뛰쳐나온 깡총이가 두 손을 입에 대고 동굴 쪽으로 소리쳤다.
“어쭈. 누구 맘대로 모여. 겁도 없이.”
토끼들을 감시라도 하듯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동굴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던 심술바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심술바람의 눈치를 봐 가며 토끼들이 살금살금 하나둘 모두 모였다.
“올겨울은 유별나게 추워서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지요?”
깡총이의 말에 토끼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빨리 봄을 당겨 오도록 합시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토끼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심술바람이 맥을 추지 못하게 하려면 봄을 당겨 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좋다. 좋아!”
이렇게 말하는 토끼들은 저마다 입술을 굳게 물었다.
사실 해마다 이맘때쯤, 토토 마을에서는 봄을 당겨 오는 행사를 해 왔었다. 이곳보다 따스한 봄이 먼저 와 있을 남쪽 하늘을 향해 날려 보낸 꼬리연에 그곳의 봄을 가득 실어 이곳 토토 마을로 당겨 오는 것이었다.
“그렇담. 동굴로 들어가서 각자 꼬리연 하나씩 만들도록 하자.”
토순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깡충깡충 동굴로 되돌아갔다.
“어이 깡총이!”
심술바람이 막 동굴로 들어가려는 깡총이를 불러세웠다.
“봄을 당겨 오는 연을 날린다고?”
심술바람이 피식 웃었다.
“아 참! 내가 깜박했구나. 네게 부탁한다는 걸.”
“내게 부탁을?”
심술바람이 눈살을 찌푸리며 깡총이를 쏘아보았다.
“좀 도와줘. 내일, 우리가 만든 연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훨훨 날 수 있도록 말이야.”
생긋 웃어 보이며 통사정하는 깡총이에게 심술바람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고맙다 고마워. 내일은 세게 아주 세게 불어 줘야 해.”
깡총이는 몇 번이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튿날, 봄을 당기기 위해 연을 날리는 날이었다.
토끼들은 어젯밤 늦도록 만든 연과 실을 두툼하게 감은 얼레를 가지고 풀밭으로 나왔다. 연 날릴 준비를 끝마쳤다.
“자, 바람아! 얼른 내려와 연이 날 수 있게 해 줘.”
깡총이가 재촉했다. 그러나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심술바람은 꿈쩍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약속했던 어제와 아주 딴판이었다.
“잠자코 있지 말고 얼른!”
몇 번이고 사정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심술바람 때문에 결국 연날리기는 포기해야만 했다. 겨우내 그렇게도 못살게 굴더니 봄을 당겨 놓으려는 토끼들의 소망을 이렇게 무참하게 망가뜨려 버리다니 심술바람이 미웠다.
바로 그때였다. 토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서쪽 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검붉은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산불이다.”
소리치는 어른 토끼의 목소리에 두려움과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 산불이 이쪽으로 옮겨 오는 건 시간문제다.”
“큰일이다. 우리 마을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뜬 토끼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풀밭 가장자리에서 겨우내 햇살을 모아 잔가지 끝에 조그마한 꽃봉오리를 매단 진달래랑 개나리도 겁에 질려 파르르 떨어댔다. 산불이 이곳으로 덮쳐 오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두려움에 당황하는 토끼랑 진달래 그리고 개나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심술바람이 벌떡 일어났다. 검붉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서쪽 산을 향해 심술바람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여태껏 그렇게 빠르게 달려가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잠시 후, 심술바람이 온 산을 태우며 토토 마을 쪽으로 불을 끌고 오는 낯선 바람 앞을 딱 가로막았다.
“꼼짝하지 마.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심술바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건방진 놈! 누군데 우리 불놀이에 참견이야.”
낯선 바람의 뒤를 따라온 불이 금방이라도 온 산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부탁이야.”
심술바람이 말꼬리를 낮추며 사정했다.
“부탁이라니 한 번 들어나 보자. 빨리 말해. 시간 없어.”
낯선 바람이 다그쳐 물었다.
“내가 불에 아주 잘 타는 바싹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고 잎이 넓은 나무들로 빽빽한 곳으로 안내할게. 그곳에 가면 이보다 훨씬 신나는 불놀이 할 수 있을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던 낯선 바람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믿어도 되겠지?”
“그렇다니까. 정말이야.”
“그렇담 널 따라갈게. 앞장서라.”
낯선 바람 앞에 선 심술바람은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아니 이럴 수가!”
어른 토끼가 가리키는 쪽으로 토끼들의 눈망울이 모아졌다. 토토 마을 쪽으로 번져 오던 불꽃이 산꼭대기로 스멀스멀 타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와! 살았다.”
토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얼싸안고 깡총깡총 춤을 췄다. 진달래랑 개나리도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술바람이 앞장서서 달려가는 산꼭대기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온통 바위로만 되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심술바람을 따라갔던 산불은 몇 시간 뒤 더 이상 태울 것도 없는 바위산에서 스스로 꺼져 버렸다.
그때까지 토끼들은 풀밭에서 불안했던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꼭대기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던 하얀 연기마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였다. 산 위에서 내려온 심술바람이 나뭇가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심술바람에게 눈길을 주는 토끼는 아무도 없었다. 토끼들과 토토 마을을 지켜 주기 위해 온갖 아양과 거짓말까지 하며 산꼭대기로 불길을 돌려 놓았던 게 심술바람이었다는 걸 토끼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심술바람은 괜찮았다. 겨우내 굴속까지 들어가 괴롭혔던 일, 따스한 봄을 당겨 놓으려는 행사까지 낭패 만들었던 걸 후회하면서도 끝내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심술바람이었다.
산불이 꺼진 이튿날 아침은 상쾌했다. 토끼들이 굴속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토토 마을 심술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심술바람이 어디론가 떠나가 버린 토토 마을에 풀밭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가까운 곳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새봄을 맞으려 진달래는 연분홍 꽃을 피울 채비를 서둘렀다. 노란 꽃 꿈에 젖은 개나리도 활짝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