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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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대가들의 시 700여 편을 암송할 수 있고, 어느 시인, 어느 소설가라고 이름만 대면 그와 관련된 삶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이근배 시인, 그는 머리에 들어 있는 시를 수없이 되뇌며 시 쓰는 힘으로 산다고 한다.
그는 1940년 충남 당진 출생으로 호는 사천(沙泉), 학림(鶴林)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투쟁을 하여 독립 유공자가 된 이선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별명이 마하트라 간디였던 한학을 한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천자문』과 『격몽요결』 등을 읽었고, 할아버지가 구독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애독하였으며, 박화성의 장편소설 『벽화』와 『소공녀』, 『젊은 그들』 등과 세계 문학 명작, 그리고 『서정주 시집』, 『정지용 시집』, 『에세닌 시집』을 통독했다.
한글로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1기생인 시인은 고교 시절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시와 시조 부문에서 늘 1등을 석권했고, 1958년 서라벌예술대학을 유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김동리, 서정주 교수에게서 소설과 시를 사사했다.
이근배 시인은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한 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김현승 시인과 교유했다. 김현승 시인이 숭실대학교 교수 시절 살던 수색동 집에 일요일이면 찾아가 뵙던 제자들로 구성된 ‘수색사단’의 일원이었다.
1962년에 동아일보에 시조 「보신각종」, 조선일보에 동시 「달맞이꽃」이 가작으로 당선되고, 시조 「바위」가 가작 2석으로 뽑혔다. 1963년에는 문화공보부가 제정한 신인예술상에서 시 「달빛 속의 풍금」, 시조 「산하일기」가 수석상에 선정되었고, 1964년에는 한국일보에 「북위선」이, 제3회 신인예술상 문학부 특선작으로 「노래여 노래여」가 당선되었다. 신춘문예로 당선된 작품들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는 ‘분단의 비극’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다.
이로써 이근배 시인에게는 문단에서 신춘문예 일곱 번과 신인예술상 세 번을 합쳐서 ‘신춘문예 10관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인의 시집으로 『사람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추사를 훔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한국시조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만해대상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탁월한 감각과 웅대한 서정의 시를 쓰는 시인은, 시는 “사람의 생각이 우주의 자장을 뚫고 만물의 언어를 캐내는 것”이라고 하여, 시 쓰기는 존재에 대해 명명하고 직시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16살 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그런 베스트셀러 소설을 내려면 무대가 서울이어야 된다고 가출했던 전력을 가진 이근배 시인, 그는 지금도 소설 부문 신춘문예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회방연(60년)을 넘긴 문학적 인생을 사는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쓰는 것이 스승, 쓰는 것이 천재다’라는 좌우명으로 문청 때처럼 쓰고 또 쓴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의 “우리나라에 좋은 시는 많으나 위대한 시는 없다”라는 말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이근배 시인, 그는 한국이 겪은 주권 강탈과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절대 빈곤과 이데올로기 대립 등을 아우르는 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시라고 한다. 그런 작품이라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문학은 상상력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1
시인의 할머니는 시인에게 어려서부터 “너는 장학사의 외손자요, 이 학자의 손자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시인에게 양반 가문의 자식으로 행동거지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시인의 한 생애가 그려진 다음 시를 보자.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
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김씨는
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똥 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스승 면암(勉菴)의 뒤를 이어
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 학사의
셋째딸로 시집와서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
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 있다
애비 닮지 말고 사람 좀 되라고
-비례물시(非禮勿視)하며
비례물청(非禮勿聽)하며
비례물언(非禮勿言)하며
비례물동(非禮勿動)하며…
율곡(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할아버지는 읽히셨으나
나는 예 아닌 것만 보고
예 아닌 것만 듣고
예 아닌 것만 말하고
예 아닌 짓거리만 하며 살아왔다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붓을 잡을 줄도 모르면서
지가 무슨 연벽묵치(硯癖墨痴)라고
벼루돌의 먹 때를 씻는 일 따위에나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자다가도 문득 깨우고
길을 가다가도 울컥 치솟는 것은
-저 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꾸지람
당신은 속 썩이는 큰아들이 미우셨겠지만
-아니지요 저는 애비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거든요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
끝내 따르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자화상」전문
시인의 할머니는 삼베, 무명, 명주 길쌈을 하여 고단한 밤에도 얘기책을 쌓아 놓고 읽었다. 늘 독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할머니는 시인에게 양반의 자손으로서 행동거지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듯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시인은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조선 시대의 대표적 수신서(修身書)이자 인성 교육 교재인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혔으나, 자신은 “예 아닌 것만 보고/ 예 아닌 것만 듣고/ 예 아닌 것만 말하고/ 예 아닌 짓거리만 하며 살아왔다”라고 성찰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 꾸중하면서 할아버지가 “-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라고 하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기도 한다. 그 꾸지람을 칭찬보다 더한 말로 들으며 시인은 항일 독립운동하던 아버지를 까마득히 올려다본다고 토로한다. 나라를 찾겠다고 항일 독립운동한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지만, 연벽묵치(硯癖 墨痴) 즉 벼루와 먹에 미쳐 사는 자신을 본다. 그런 자신의 삶을 공초 오상순의 말대로 ‘앉은 자리가 꽃자리’ 즉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상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적 사고를 보인다. 수집한 옛 벼루에서 선인들의 체취를 느끼고 그걸 시로 형상화하는 시인, 시로 살아감을 보여준다.
어디 계셔요
인공 때 집 떠나신 후
열한 살 어린 제게
편지 한 장 주시고는
소식 끊긴 아버지
오랜 가뭄 끝에 붉은 강철 빠져나가는
서녘 하늘은
콩깍지
동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깃발이어요.
보내라시던 옷과 구두
챙겨드리지 못하고
왈칵 뒤바뀐 세상에서
오늘토록 저녁해만 바라보고 서 있어요.
너무 늦은
이 답장
하늘 끝에다 쓰면
아버지
받아보시나요.
—「노을」전문
시인은 인공(6·25) 때 아버지가 집 떠나셨을 때 열한 살이었다고 한다. 옷과 구두를 챙겨 보내 달라는 편지를 시인에게 주고는 여태까지 소식 끊긴 아버지. 시인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은 “콩깍지 동에 숨겨 놓은 깃발”로 표상하였다. ‘노을’은 아버지가 바라던 세상을 뜻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세상에서 시인은 저녁 노을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시인은 아버지가 주었던 편지에 대한 늦은 답장으로 ‘보고 싶다’라고 쓰면 받아보시나요 묻는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함을 보여준다. 이외에 시인의 다른 시편 「깃발」과 「문」에서 시인의 아버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 장후재 학사의 셋째 딸이었던 시인의 어머니의 삶은 어떠했을까.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냉이꽃」전문
잡초는 사상가의 남편을 둔 아내의 ‘시름’을 표상한다. 시인이 보기에 사상가의 아내인 어머니의 삶은 논밭에 난 잡초 같은 걱정거리에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사상가의 아내로서 소식 없는 남편의 안부와 자식들을 키우고 뒷바라지하기 위해 걱정하느라 “잠 못 드는 평생”을 살았다.
그런 어머니를 시인은 ‘냉이꽃’으로 비유한다. 냉이꽃의 꽃말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에 빗대어 보면, 시인에게 어머니의 삶은 ‘남편과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냉이꽃’을 피운 삶을 산 것이다. 시름을 표상하는 ‘냉이’는 곧 ‘냉이꽃’이라는 사랑으로 변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유년의 삶은 자신이 살던 초가집에 날아들던 돌멩이로 표상된다. 이는 사상가의 아내로서의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더욱 심화한다고 하겠다.
2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한국인들이여 걱정하지 마라. 한국은 한글을 만든 나라”라고 했다. 영국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하였다. 1997년 유네스코는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해 한글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바우바우시에서는 토착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였다. 그런 한글에 대해 모국어인 원년 세대인 시인은 자부심을 품고 있다.
해도 밝아라
하늘이 고르고 골라서
빛을 쏟아부은 땅이니
구름인들 어찌 함부로 여기 와서
그늘을 짓겠느냐 해
나랏말씀이 있는 위에
내 나랏글자를 얹었으니
잠자던 산도 일어나 말을 하고 나는 새들도 물이 깊겠구나
내 뿌리깊은 나무가 되리니
백성들은 바람에 흔들리지 말지며
내 샘이 깊은 물이 되리니
나라는 더 큰 바다로 나아가겠구나
오는구나
내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던
황희가 흰 수염을 날리며 오고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드는데
손과 머리를 빌려주던
집현전의 큰 선비들
그러나 내 술을 따르고 싶은 것은
내 당부를 잊지 않고
목숨과 바꾼 저 사육신들이니
봄이 오거든 푸른 잔디 위에
우리 용비어천가를 부르자꾸나
—「용비어천가」전문
이 시는 2023년 11월 1일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서 열렸던 ‘광화문에서 시를 노래하다’라는 시의 날 행사에서 이근배 시인이 낭송한 자작시이다.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소리글자, 표음문자인 한글, 한글(훈민정음)은 주지하다시피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창제하여, 그 글자로 조선 창업을 중국 고사에 비유하여 찬송하는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집현전 학사 정인지, 권제, 안지 등에게 명하여 지었다. 시인은 세종이 되어 자신이 임금이 되기를 반대하였지만 민생 정치를 위해 등용했던 황희를 떠올리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도움을 준 집현전 학사들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에게 치하致賀의 술을 따르겠다고 한다. 봄이 오거든 한글로 된 용비어천가(시)를 노래하자고 청한다. 이 시에서 용비어천가는 ‘한글’의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3
1974년에 ‘문인 간첩단’ 조작 사건이 있었다. 문인 5명은 일본 민단 쪽에서 발행하는 잡지 『한양』의 초청을 받아, 동경에 가서 식사 대접을 받고, 잡지에 올린 글의 원고료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 일을 문인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자 군사정권이 ‘문인 간첩단’으로 조작하여, 소설가 이호철, 문학평론가 임헌영, 경희대 교수 김우종, 소설가 정을병, 문학평론가 장백일 등 5명을 간첩으로 몰았다. 문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필화 사건이었다. 그때 문인협회 회원들이 구속된 문인들을 석방하라고 농성하던 상황을 시인은 시로 남겼다.
석유난로에 둘러앉아 우리들은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을 기다린다.
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은
석유가 아니라 우리들의 설움
이글거리는 것은 우리들의 노여움
아침 출근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아내를 돌아보며
무심히 귀가할 수 없는 오늘을
예감하던 친구
빈처(貧妻)의 무엇은 고향이라고 떠들며
단칸방의 한밤중
새끼들의 눈을
피한다는 친구
내기 바둑을 두며 중국빵을 씹으며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을 기다리다
밤 11시 우리들은 광화문에 흩어졌다
몇몇은 수유리행 버스를 타고
통금 시간을 계산하며
몇몇은 술집으로 가고
그날 우리들의 귀가는 늦어졌다.
—「귀가」전문
우리들은 군사정권에 의해 모처로 끌려간 문인들(친구들)을 기다린다. 이글이글 타는 석유 난로 속의 불은 문인들의 설움이고 분노다. 끌려간 문인들을 기다리며 어떤 친구는 아침 출근을 하러 집에서 나서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돌아보며 자신이 무사히 귀가할 수 없을 것이라 예감했다고 하고, 또 한 친구는 자기가 혹시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빈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르다가, 아버지라고 자신만을 믿고 사는 새끼들의 눈을 피했다고 했다.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발동으로 인해 언제 어떤 문인이라도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 고문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렇게 문인들은 ‘구속한 문인들을 석방하라’며 문인협회에서 농성을 하면서, 내기 바둑을 두고 맛없는 중국 빵을 씹으며 시간을 보내다, 통금 시간이 임박한 11시에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간다.
그날 밤 늦게까지 농성하던 문인들의 귀가 시간은 늦어졌다. ‘문인 간첩단’ 조작 사건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의 힘은 상상력인데, ‘문인 간첩단’ 조작 사건은 필화 사건으로 상상력을 제한하여 문학다운 문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걸림돌이다.
이제는 두드리지 않는다.
소리 나지 않는 건반
나의 기대가 끝난 다음의 시간을
그 최종의, 아아 뜨거운 별리(別離)를,
항시 불안의 처마 끝에 울던
새들을 모두 날려 보내고
이미 사랑을 상실한 쓸쓸한 실내에서
나는 두드리지 않는다.
떠나간 것들이 돌아올 수 없다는
하나의 이유만이 아닌 이 외침을
악기여,
더는 울어서는 안된다.
다시는 두드리지 않는다.
—「현실」2연
‘이제는 두드리지 않는다’라는 시어에서 시인이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사회와 소통 부재의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기대가 꺾인 다음의 절망감, 그것은 회한에 찬 이별과 같다. 시인은 삶의 소망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던 마음을 새처럼 날려 보낸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한물간 인생처럼 살아낼 수밖에 없다. 바랄 게 없는 세상에서 악기는 울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소리 나는 것이다. 소리는 바람이고 생의 충동이다. 악기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소리 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의 침체와 희망 없는 부정적 현실을 말한다. 이 시는 부정적 현실을 묘파해 냄으로써 긍정적인 삶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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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서울 올림픽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 여파로 나중에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소련과 수교를 맺었고, ‘죽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과도 수교를 맺었다. 시인은 중국과 수교 전인 1989년 8월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내 나라는 반도가 아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저 굽이굽이 펄펄 끓는
고구려의 말발굽 소리를 들어라
백두의 불과 물이 이르는 땅은
모두 내 나라요 내 겨레의 터전이다
겨레여
이 백두에 올라 보라
처음부터 물려받았고
마침내 다시 찾고야 말
끝모를 땅이 저기 부르고 있다
하물며 반세기 역사, 반세기의 지도를 두고
가슴 조이고 아파할 일이 무엇인가
이 백두에 와서 보라
한 핏줄 나눈 형제끼리 싸우는 일이며
기쁨이며 슬픔, 사랑이며 미움, 분노이며 용서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고 부끄러운 일인가를
1989년 8월 15일
나는 작디작은 물고기가 되어
장백폭포를 거슬러 올라
천지의 물가에 닿는다
손을 담근다
천지가 내 안에 기어들고
내가 천지에 녹는다
엎드려 물을 마신다
내 썩은 창자의 창자 속에서 솟구치는
견딜 수 없는 힘이 나를 물속에 빠뜨린다
나는 일파만파로 천지의 물살을 가른다
어머니의 태안이듯 꿈의 꿈, 사랑의 사랑 속에 노닌다
—「대 백두에 바친다」제2연 부분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남북 분단 이후, 우리는 중국을 경유해야 백두산에 갈 수 있다.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 국경에 있는 화산으로, 중국은 장백산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 백두산 천지에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에 시인은 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중국과 관계 개선이 이뤄진 데 연유한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자 민족의 영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시인은 백두산에 와서 보니 “한 핏줄 나눈 형제끼리 싸우는 일이며/ 기쁨이며 슬픔, 사랑이며 미움, 분노이며 용서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고 부끄러운 일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백두산은 하나 된 우리 민족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 태(胎) 안 같은 백두산 천지에 안겨 다시 하나가 될 우리 민족을 꿈꾼다. 백두산 정상에 있는 화구호인 천지의 차가운 물은 시인에게 통일 조국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식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고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다투어 길을 나서는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멧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이제 손에 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부분
2005년 무산 조오현 스님 주최로 백담사와 금강산에서 ‘세계 평화 시인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198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 작가 웰레 소잉카를 비롯하여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핀스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60여 명의 시인들과 한국에서는 고은, 김남조, 김지하, 이근배 시인 등 문단의 대표적인 50여 명의 시인, 그리고 북측 대표 시인 30여 명도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인류의 공존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대회였다. 이근배 시인은 이 대회에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의 통일을 염원하는 이 시를 썼다. 시 내용을 보면 시인은 새들과 물고기는 길을 잃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분단이 되어 통일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이른다. 시인은 반세기 넘게 기다리다 내 나라의 금강산에 왔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0월 현대와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금강산관광사업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1998년 11월 18일부터 2008년 7월 3일까지 약 10년간 시행되었다. 금강산 관광이 시행되고 있었기에 2005년에 세계 평화 시인 대회도 열릴 수 있었다고 본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린다. 철마다 주는 정취와 풍광이 다르다.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이천봉, 폭포 밑에 화강암이 돌절구 모양으로 깊이 패여 있는 구룡폭포의 천둥소리, 소나무와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고 반기면서 화합의 노래를 한다. 금강산은 우리 민족이 “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같이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길이 우리가 사는 길이라고 한다. 남북한 어디서 살고 어디로 가느냐? 따위는 묻지 않는다.
이처럼 시인은 ‘세계 평화 시인 대회’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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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1973년에 통문관 이겸로 사장의 소개로 청(淸)의 대학자 완원(阮元)의 명(銘)이 새겨진 단계 벼루를 구입했다. 벼루를 본격적으로 수집한 것은 1989년에 중국에 여행 가서부터다. 그 후 중국과 국내, 일본까지 다니며 벼루를 수집했다. 그렇게 모은 벼루를 시인은 등단한 지 회방연인 2021년 6월 11일부터 27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라는 제하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훈민정음 글자로 벼루 가장자리를 장식한 ‘니가완은대월’ 벼루와 우리 민족의 농경 생활 풍속도로 벼루 가장자리를 장식한 ‘농경풍속도일월연(農耕風俗圖日月硯)’ 벼루를 문화재로 신청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시 「자화상」에도 나왔지만, 그는 벼루와 먹에 미친 연변묵치(硯癖墨痴)이다. 벼루를 소재로 80여 편의 시를 썼다.
우리나라의 벼루들은 압록강 기슭의 위원(渭原)에서 나오는 화초석(花草石)이 으뜸인데요,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층을 이뤄서 마치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것 같대서 이름도 화초석인데, 거기 먹을 가는 돌에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며 우주만물을 모두 새겨 놓았는데요, 그 조각들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귀신의 짓거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요, 내가 가진 그것들 중의 하나에는 열한 명의 아이들이 냇가에서 벌거숭이로 모여서 놀고 있었는데요, 삼백 년쯤 전에도 이중섭(李仲燮)이 살고 있었던 것인지? 고추 뻗치고 오줌 싸는 놈, 발버둥 치고 앉아서 우는 놈, 개헤엄 치고 물장구치는 놈, 씨름 한판 붙자고 덤벼드는 놈, 고녀석들 얼굴 표정이며 손발의 놀림이 살아서 팔딱거리는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 날 동네 아이들과 냇가에서 멱 감던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인데요, 물가에는 가지 말거라. 외동아들 행여 명이 짧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데요, 어머니 세상 뜨신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말씀 안 듣고 세상의 깊은 물속에서 개헤엄으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인데요
—「하동(河童)」전문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궁궐에 필요한 용품을 공급하는 액정서(掖庭署)에 “송과 명의 벼루에 뒤지지 않는 벼루를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액정서를 세워 벼루를 만든 것은 왕실에서 쓰고, 건국 공신들에게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지시를 받은 벼루 장인들은 평북 위원강에서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돌인 화초석을 발견한다. 이 돌을 찾은 벼루 장인은 가장자리에 우리의 생활 풍속을 새겼다. 이 시에 나오는 벼루는 1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십일하동연(十日河童硯)’이다. 시인은 이 벼루를 보고 ‘어린이와 소의 화가’인 이중섭이 그 시대에 살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벼루 가장자리에는 물가에서 노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시인은 어린아이 11명의 살아 있는 표정을 보고, 자신의 어린 날을 본다. 외동아들인 자신이 행여 명이 짧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듣는다. 어머니가 세상 뜬 지금도 시인은 자신이 세상의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을 보며 제대로 살겠다고 자신을 고취한다.
돌로 태어나려면
꽃도 되고 풀도 되는
압록(鴨綠) 물 먹고 자란
위원화초석(渭源花草石)을 닮아야지
붓 농사 기름진 텃밭
일월연(日月硯)으로 뽑혀 살게
달은 왜 해를 물고 있어
아니 해가 달을 물었나
하늘이 내린 솜씨
천지창조가 여기 있구나
아무렴 저 역성혁명 때
우리네 살림도 담아야지
산이거나 나무거나
꽃이거나 뭇짐승이거나
세상에 좋고 이쁜 것 다 불러 살아가는
높고 먼 우주 경영의
새 하늘이 뜨고 있다
—「달은 해를 물고」전문
돌로 태어나려면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층을 이뤄 꽃도 되고 풀도 되는 위원 화초석(渭原花草石)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돌은 압록강변에서 나는 벼루를 만드는 석재다. 먹을 가는 부분은 둥근 해 같은 모양으로, 물을 담는 오목한 앞부분은 둥근 달 같은 모양으로 만든 벼루가 일월연(日月硯)이다. 그 벼루는 마치 달이 해를 물고, 아니 해가 달을 물고 있는 것 같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역성혁명, 조선 태종 때 위원 화초석으로 만든 벼루가 농경풍속도일월연이다. 그 벼루 가장자리에는 민중들의 생활도 담고, 화초, 나무, 여러 짐승 등 삼라만상의 사물과 세시 풍속도 조각되어 있다. 시인은 그 벼루에서 유교 사상을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삼아 정치하는 조선의 우주 경영의 새하늘까지 본다. 시인은 옛 벼루에서 역사와 시를 읽는다.
이근배 시인은 시를 쓰기 시작하여 60년인 회방연을 넘은 문학적인 생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문학인은 자기 역량을 키워야 한다면서, 시인은 “쓰는 것이 스승이요, 쓰는 것이 천재”라고 하였다. 많이 읽고 생각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를 그와 그의 부모님에 관한 시편과 한글 사랑에 관한 시편, 어두운 현실과 필화 사건에 관한 시편, 그리고 연변묵치로써 벼루를 소재로 한 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신춘문예 10관왕이면서도 소설 부문 신춘문예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시인,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