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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무지개를 좇아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정희(해남)

시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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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은 땅끝 마을 탑동리에서 싹이 튼다. 초등학교를 외가에서 다녔다. 탑동리는 3면이 모두 바다인 해안선을 끼고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다. 우리 마을에는 무지개가 자주 떠올랐다. 무지개를 좇아 친구 정숙이랑 마구 달려가도 잡지 못하고 구름 한 점 잡고 서야 돌아오곤 했다. 우린 무지개 대신 바다에서 소라껍데기를 귀에 대고 바닷소리와 노랫소리를 듣고 놀았다. 무지개만 뜨면 무조건 마을을 지나 달리다 달리다 보면 산과 바다가 나왔고, 어디든지 놀이터고 글 쓰는 장소였다.
고목 아래에서 그림도 잘 그렸던 것 같다. 개울가에서는 신발로 버들치, 송사리, 피리, 미꾸라지를 잡고 개울 물소리를 들었다. 논둑에서 들려오는 하모니 소리에 가슴 뛰었고, 그때 생각나는 대로 시도 쓰고 일기도 썼었다. 일기가 곧 시이고, 소설이며, 수필이었다. 이것이 내가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 첫 번째 길이었고, 이 기억이 내 문학의 보물창고에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책을 많이 읽고 싶었지만, 책 살 돈이 없어 학교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으며 거의 살다시피 했다. 도서관 봉사하면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문집과 동화책은 거의 독파했고, 못 다 읽은 소설을 집에서 읽으려고 전기를 켜면 전기세 나간다고 외삼촌이 계량기를 내려버리고 호통을 치셨다. 그때 외할머니는 외삼촌 몰래 군인 담요로 창틀에 불빛을 가려주고 책을 읽을 수 있게 창을 가려주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외할머니에 대한 시가 많다. 외할머니의 레퍼토리, 외할머니의 반지, 외할머니의 생신 등등, 외할머니는 내 인생의 모티브였고 엄마 대신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문예부 학생이었고 문학 소녀였다. 내 옆구리엔 항상 소설책이 껴 있었고, 소설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어야 잠을 잘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4학년 때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으로 당선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4개 학교 학생 전체를 두모리 바닷가에 풀어놓고 글짓기 대회를 했었다. 난 ‘소라껍데기’라는 제목으로 장원을 했다. 언제나 우리 학교 대표로 대회를 나가면 꼭 1등을 했었고, 그때는 학생들이 많아서 중앙초, 동교, 서교, 북교 학생들 다 모여 백일장 대회도 했었다. 해남으로 대회를 나가도 항상 장원은 박정희, 나였었다. 학교 신문에 기재되고 난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박정희 이름은 외우실 정도로 박정희가 잊히지 않은 이름이었다. 전교생 앞에서 우렁찬 웅변도 했었고, 반장이며 회장도 번갈아 가며 했던 거로 기억된다. 지금도 동창회를 가면 우리 학교 1등 소녀가 온다며 박수갈채를 받는다.
방과 후 학교에서 집까지 길이 너무 멀어서 뽀빠이 과자를 사서 속에 들어 있는 별사탕을 하나하나 꺼내 먹으며, 걸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친구 정숙이와 나눠 먹어가며 다녔었다. 그때는 그게 참 고생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이 아주 그립다. 4학년 이해근 담임 선생이 정희는 훗날 시인이 될 것 같다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난 싫었었다. 내 꿈은 판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해남 땅끝 마을은 사방이 시 열매고 이야기 보따리에 시어가 가득했다. 외가댁 뒤뜰에 대숲을 후리고 가는 세찬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사운대는 밤바람 소리에 귀를 세웠고, 바닷가에서 소라껍데기로 귀를 씻고 그 소리를 담아 시를 쓰며 꿈 많고 정 많은 소녀 시절을 보냈다. 난 초등학교 4학년 이해근 담임이 했던 이야기를 잠시 잊고 있었다. 내 꿈이 판사였던 터라 별 신경 쓰지 않았었다가 지금 생각하니 4학년 담임 말대로 된 것 같다.
학창 시절 서울여대 김준 교수께 시, 소설, 수필, 한시, 시조, 모두 공부하고 수필과 시조로 등단했다. 시를 좋아했던 난 천의무봉 정공채 선생님께 시 공부를 십 년 넘도록 했다. 철학이면 철학, 역사면 역사, 춘추시대부터 맹자, 공자, 보들레르 등등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시조와 수필을 등단하였기에 시는 등단하지 않으려 늦장을 부리다가 1999년 정공채, 신세훈 추천 완료 시 「밤낚시터」 외 10편으로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문단에 입성, 활동하고 있다. 시 등단할 때는 박정희 시인이 있어 후배인 난 필명 정희로 등단하였으나 첫 시집 『그리운, 소낙비』를 출간하면서 박정희해남으로 정정했다. 사실은 시 등단 전에 1992년 경희대 서정범 교수 추천 완료 수필 「땅끝 마을」 외 5편으로 등단했다. 교수님은 항시 나에게 박정희는 수필을 서정시처럼 쓴다면서 시 쓰라고 권유해 주셨다. 1994년 서울여대 김준 교수 추천 완료 시조 「동해의 파도소리」 외 10편으로 시조로 등단했다. 1992년부터 상상극장에서 보리수 시낭송을 시작으로 황금찬, 김년균, 황송문, 최은하 시인 등등 문인들과 시낭송 동인으로 약 31년을 같이 하게 되면서 문학 활동을 넓혔다. 수필과 시조, 시 3장르 모두 등단했지만 역시 시가 제일 좋았고 시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사실 문창을 전공하다 보니 수필과 시조는 등단이 필수처럼 되었고, 시 공부는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공부를 계속했었다. 어느 날 시어에 빠져 언어의 아름다움에 인생을 던졌던 기억으로 열심히 글 쓰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소설도 한 권 분량, 수필도 한 권 분량 정도 되지만 책으로는 엮을 생각이 없다. 시조도 한 권 분량은 되지만 시집 발간 때 몇 편씩 같이 뒷장에 넣어서 시집을 출판하고 있다.
문창을 전공했으나 박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불문학 박사를 시작, 고려대 대학원에서 불문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나한테 불문학은 너무 어렵고 험난한 길이기에 잠시 쉬면서 머리를 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김창수 불문학 교수께 휴학을 신청하고 1년 쉬겠노라 했지만 여태 쉬고 있다. 차라리 그때 국문학이나 영문학을 선택할 걸 후회하고 있다. 그래도 불문학을 1년 넘게 공부했던 터라 배움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그 덕분에 제자들한테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허튼 공부는 아니었음을 알았다. 문학 창작 강사로 제자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창작 강사 15년 만에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이제는 제자들한테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제자 중 한 학생은 공부방 교실을 제공해 주고 있어서 부담 없이 시 창작 교실로 쓰면서 제자들을 등단시키고 있다.
나의 문단 생활은 제1집 『그리운, 소낙비』 天山 발행으로 제10회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또 제2집 『섬속의 섬 한 권 엮었다』 天山 발행으로 제18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지하철 시 「바람 부는 날」은 쌍문역, 수유역, 한성대입구역, 시 「땅끝 마을」은 동대문역사역, 서울역, 김포역, 신당역, 사당역, 현재 시 「저녁 식탁」은 언주역, 영등포역, 강남역, 태릉역에 게시되어 있어 가끔 문우들과 친구들이 전화가 온다. 지하철에서 시인 박정희를 만나 반갑고 가슴 벅차고 아름답다고 했다. 어느 날 엄마께서 전철역에서 내 시를 발견하고 펑펑 울었다고, 기쁨의 눈물이었다고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다들 궁금해하는 박정희라는 이름 뒤 해남 꼬리표를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박정희해남보다 훨씬 선배님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해남이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서 본명은 박정희이지만 해남이라는 꼬리가 붙어 다니고 있다. 어떤 지인은 이름이 왜 다섯 글자냐며 이상하게 따지며 묻는다. 어떤 분은 저를 부를 때 대통령 각하, 해남 시인, 해남이라고 부른다. 훗날에 박정희 시인으로 활동할 것이다. 그러면 자동으로 해남이 호가 될 것이다. 해남박정희 시인으로 활동하려고 한다. 오늘도 창밖에 빗소리를 들으며 벚꽃이 떨어질까, 가슴 조이며 펜을 놓는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 이 시대 문학도 3퍼센트의 소금 역할을 했으면 한다. 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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