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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울음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윤희(임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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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내려놓을 나이가 됐다. 현직에서 물러나 이름 없이, 그저 가끔 얼굴 보고 밥이나 먹자는 모임이 하나 있다. ‘무명회(無名會)’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내가 뭐를 했습네 하고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명함에 적혀 있는 이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려 한다. 어릴 때부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인가.
사람은 유독 이름에 연연한다. 하나로 만족하지 못한다. 유명한 인물들을 보면 아명이 있고, 자와 호가 있다. 시호도 있다. 요즈음엔 뱃속에서부터 태명을 갖고 나온다. 글 쓰는 이들은 필명도 있어 본명과 나란히 같이 쓰기도 한다. 관직이나 직책에 붙는 이름을 중시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무명회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취지였다. 현재의 위치나 과거의 직책도, 이름도 내려놓고 그저 사람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자 했다.
그런 모임에 어느 날, 노 시인께서 ‘녹명(鹿鳴)’이란 이름을 들고 나오셨다. 사슴의 울음소리라는 뜻이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꼭 울음으로 이를 알린다고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 혼자 먹지 아니하고 무리를 불러 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동물은 먹이를 발견하면 제 배부터 불리고 그래도 남으면 숨겨 놓았다가 먹는 것이 통상이다. 그중에는 계산에 능한 인간이 으뜸일지 모른다.
모임의 방향이 잡힌다. 사슴처럼 작은 것이라도 사회와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그동안 내 얼굴에 달고 온 이름값을 하자는 의미 아닌가. 실제로 노 시인은 그 일을 실천하고 있는 분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밥 걱정 없는 직업이 공무원이라 여겨 그 길을 걸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 목표를 세우며 앞만 보고 달렸다. 이일 저일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팔십이 넘은 노구에도 몸을 움직이는 현역이다. 생각이 젊다. 이타적(利他的)인 생각을 가졌다.
모은 재산 일부를 헐어 문화재단을 만들고 문화 예술인 지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행한다. 새해가 되면 주린 배 잡고 자란 고향에 제일 먼저 ‘고향 사랑 기부금’을 내놓는다. 그는 로터리언 정신을 중시하며 주변의 크고 작은 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재산이 많다고 다 그러하는 것은 아니다. 움켜쥐기보다 내놓기가 더 어려운 까닭이다. 재산은 가질수록 욕심이 커지게 마련이다. 아흔아홉 가진 이는 백을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그 하나를 마저 가지려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생리 아닌가.
선한 눈망울, 관(冠)이 향기로운 사슴은 노천명의 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타적인 삶, 먹이를 같이 나눠 먹자고 울음소리를 내어 무리를 불러들이는 심성이 내재되었기 때문에 그리 신성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사슴은 녹용이라 불리는 뿔은 물론이고 피와 살까지 사람을 이롭게 해 왔다. 보약의 으뜸이 녹용이다. 사람의 몸에만 명약이 아닌, 이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약효를 널리 퍼뜨렸으면 좋겠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슴은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신라의 금관은 사슴뿔을 형상화한 것이다. 십장생의 하나로도 꼽힌다. 유럽에서도 명문가를 상징하는 문장에 사슴이 등장했다고 전해온다. 인간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친근한 동물이다.
눈을 감고 사슴이 뛰노는 숲을 그려본다. 평화가 깃든다. 토끼, 노루, 다람쥐가 다 한 가족으로 어울린다. 우리 사회도 아웅다웅 싸움이 없는, 평화의 숲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풍족한 물질 속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삭막해져 가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로 흐르다 보니 공동체 문화에서 보던 정문화가 사라졌다. 각자 출세 지향주의로 내달린 탓이다. 당리당략에 따라 제각기 목에 핏발을 세우는 광화문 광장의 쇳소리 대신, 이제 빌딩 숲 사이사이에서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 부지없는 생각일까.
잠시 빌려 쓰고 있는 이 사회, 우리가 흩트려 놓은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때다. 원래 이웃과 나누며 정겨웠던 옛 정서를 찾아 후대에 돌려줄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슴의 울음소리, 노 시인이 꺼내 든 ‘녹명’ 그 의미를 새기며 내 삶을 돌아본다. 멀리 산등성이로부터 울멍줄멍 푸르른 숲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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