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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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수필 창작과 이론8
수필의 범위가 워낙 넓고 그 형식이 자유롭고 구속성이 적기 때문에 서간문이나 일기문, 전기문, 기행문뿐만 아니라 신문의 사설이나 논설, 시평이나 같은 것들까지도 넓은 시각에서 수필의 범주에 속한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수필의 요건과 특성 및 문학성과 예술성을 갖추어야 진정 수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형식을 빌어 수필의 요건과 특성을 충족한다면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수필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은 물론이다.
1. 서간문 형식
수필을 쓰는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서간문(書簡文) 형식이다. 즉, 편지체 형식의 수필을 말한다.
이러한 서간문 형식의 수필을 서간 수필이라고도 하는데, 이 같은 형태의 수필이 우리나라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1920년을 전후한 때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간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 단순한 서간문이라고 할 수 것들이다.
특히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나온 『학지광(學之光)』 『청춘(靑春)』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등에는 서간 수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1917년 7월, 『청춘』 제9호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동경(東京)에서 경성(京城)까지」가 서간 수필에 해당된다.
오창익(吳蒼翼)은 그의 「한국 수필문학 略史」라는 글에서 1920년대에 서간 수필이 전성을 이루게 된 사실과 그 이유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20년대 수필의 문형은 ‘수상문’ 일변도의 현대 수필과는 달리, ‘기행문’ ‘서간문’ ‘수상문’ ‘일기문’ 등 다양한 문형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766편을 문형별로 나누어 보면, 수상문이 1,184편(67%), 기행문이 335편(19%), 서간문이 211편(12%), 일기문이 36편(2%)으로 되어 있다.
수상문이나 만필류가 절대 다수인 것은 수의 수감의 단상을 본질로 하는 수필로서는 당연한 현상이겠으나, 간과할 수 없는 두드러진 것은 기행문과 서간문의 합수가 546편으로, 전체 작품 수의 30%나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이후, 현대 수필 문학권에 진입하면서 거의 그들 문형이 쓰이고 있지 않는 이변으로 보면, 20년대는 단적으로 ‘기행·서간문의 개화기’이면서 또한 그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행문·서간문이 성행하게 된 것은 식민지 문학시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에 따른 사회구조적 불가피성이 직접, 간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크게 나누어 국내·외로 양분할 수가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민정 답사의 형식으로 농어촌과 사적지를 순회하며, 도탄에 빠진 민생고나 소실되어 가는 민족의식을 고발하고 자극하는 데 주력했다. 원고 검열의 눈을 피해 민의를 진단하고, 자활의 결의를 고무시키는 데는 기행문이나 서간문 이상의 적합한 문형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지적한 대로 1920년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서간문 형태의 수필, 또는 서간 수필이 1930년대 이후 차츰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서간문 형태의 수필은 계속 쓰여 왔다.
①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친밀감과 호소력이 크다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것을 편지로 생각하기 쉽고, 따라서 친밀감을 느낀다. 편지란 원래 서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마음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은밀히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형태의 수필은 대개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인데 비해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어느 특정인 한 사람에게 보내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은밀히 보낸 편지를 읽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기에 더욱 친밀감을 느끼며, 마음에 와 닿는 호소력과 공감이 크다.
②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진실을 전달하는 힘이 강하다
가까운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쓰는 편지에는 대개 진실이 깃들어 있으며 읽는 사람 또한 편지 속의 내용을 진실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독자들도 작가의 의도나 생각에 별다른 거부감 없다.
③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딱딱한 내용도 부드럽게 해주는 중화 작용을 한다
편지란 원래 부드러운 글이다. 딱딱한 이야기나 철학이나 전문 이론 등과 같은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도 편지체 형식으로 풀어 쓰면 한결 부드러워지고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도 높일 수 있다.
④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쓰기가 쉬운 편이다
일반적인 형식의 수필을 쓰려면 아무래도 문장력과 구성력, 논리성, 간결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문체, 적절한 비유 등이 많이 요구된다.
이에 비해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누구나 써 보았고 자주 읽어본 편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한결 친밀감을 느끼며 부담감 없이 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수필을 처음 쓰는 초보자는 이 같은 서간문 형식의 수필부터 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편지체 형식이라고 해도 치밀한 구상이나 구성, 성숙한 문장력이나 문체, 상념의 정돈과 의미 있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있어야 완성도 있는 문학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서간문 형식의 수필은 흔한 편지 내용과는 확연히 다르고 차별화되어야 한다.
2. 일기문 형식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일기(日記), 또는 일기문(日記文)은 수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기나 일기문이 곧 수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잔학한 손길을 피해 다락방에 숨어 지내며 참담하고도 암울한 현실 속에서 어린 소녀의 고뇌와 갈등, 삶과 죽음의 의미와 인간 존재에 관한 상념 등을 가식 없이 진실하게 써 놓은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있다.
그녀는 결국 나치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죽고 말았지만, 그녀가 남긴 『안네의 일기』는 그 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나치의 잔학성을 폭로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놀라운 충격과 슬픔, 크나큰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안네의 일기』는 분명히 일기에 속하는 글이다. 그러면서도 『안네의 일기』는 ‘수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필로서의 요건과 특성을 잘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성과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수필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이 일기를 쓰면서 수필 작품을 의도했다거나 그것이 훗날 많은 사람에게 읽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솔직하고도 진실하게, 그날그날 일기로서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는 그 자체로서 문학성과 예술성이 뛰어나고 문학적·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수필로서의 요건과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기이면서도 훌륭한 수필 작품으로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 앙드레 지드의 일기 등도 훌륭한 일기 문학이자 수필 문학으로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선조(宣祖)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쓴 『계축일기(癸丑日記)』나 19세기 초엽 함흥판관의 부인이던 의유당 김씨(意幽堂 金氏)가 쓴 『의유당 일기』, 조선조 영조 시대 때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등도 훌륭한 일기인 동시에 수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수필 작품이 되기를 의식하지 않고 쓴 일기가 훗날 수필 문학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3. 기행문 형식
수필을 쓸 때 기행문 형식을 빌어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어떤 지방이나 어떤 나라 등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수필로 쓸 때에는 이 기행문 형식이 자주 도입된다. 생동감과 사실감이 넘칠 뿐만 아니라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며,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필의 자유스러운 속성과 여행의 특성인 자유스러움을 잘 표현해 주는 기행문이라는 형식이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같은 여행을 하면서 쓴 글이라고 해도 단순히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쓴 기행문과 여기에다 문학성과 예술성을 가미하여 쓴, 기행문 형식의 수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수필’이란 형식의 문학 장르가 우리 사회에게 깊이 뿌리내리기 이전에 쓰인 기행문들 중에는 수필적인 요소나 특성 등을 많이 갖추고 있거나 수필로서의 문학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조선조 정조 시대 때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나 이보다 훨씬 뒤에 쓰인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 또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의 「명사십리행(明沙十里行)」 「해인사 순례기」 등은 원래 기행문 형식으로 쓰인 것이면서도 수필로서의 요소나 특성, 수필로서의 문학성·예술성 등을 많이 갖추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나 한용운의 「명사십리행」 등을 본격적인 장편 기행 수필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 중 하나인 한용운의 「명사십리행」은 1928년, 즉 한용운이 50세 되던 때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인데, 이 「명사십리행」의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적·문학적 가치를 지닌, 기행문 형식의 수필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경성역(京城驛) 기적일성(汽笛一聲). 모든 방면으로 시끄럽고 성가시던 경성을 뒤로 두고 동양적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인 명사십리(明沙十里)를 향하여 떠나게 된 것은 8월 5일 오전 8시 50분이었다.
나는 최근의 재경(在京) 3년 만에 해수욕장을 해마다 벼르다 못 가고 금년에도 벼른 지는 여러 날이 되었으나 겨우 지금에야 실행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실행도 제반의 사정으로 보아서는 육분(六分) 이상이나 가능성이 없었으나 선의로 말하면 용단, 솔직하게 말하면 홧김에 떠난 것이었다. … 용산(龍山)으로부터 왕십리(往十里)에 오는 동안에는 오른편으로 한강의 맑은 물결을 거스르고, 왼편으로 남산의 푸른빛을 마시게 되어서 새삼스럽게 청신(淸新)을 느꼈다.
청량리를 지나서부터 동석한 사람과 담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평양(平壤) 사람으로 현주(現住)는 청주(淸州)인데 영업차로 함흥(咸興)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무슨 영업을 하느냐고 물은 즉 요리업(料理業)을 한다고 한다. …
나는 말머리를 끊고 머리를 돌리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차는 벌써 철원(鐵原) 경내에 진행 중이다. 이 지방은 조금도 한해(旱害)를 보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들빛은 살지고 산기운은 맑아서 차창으로 들어오는 산광야색(山光野色)은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나에게 많은 감격을 주었다. … 차는 삼방(三房) 유협(幽陜)을 뚫어가게 되었다. 삼방의 철도는 강반(强半)이나 수도(隧道)와 교량(橋梁)으로 되었다. 수도를 지나면 곧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곧 수도로 들어간다. … 원래로 산은 물을 임(臨)하여 더욱 기이하고, 물은 산을 만나서 다시 아름다운 것인데, 삼방 유협은 물을 지음쳐서 나누지 아니한 산빛이 없고, 산을 안고 돌면서 흐르지 않는 물소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 손으로 방울지어 떨어질 듯한 푸른 산빛을 움키려다가 미처 움키지 못하고, 다시 가늘다가 높아지면서도 곡조를 이루지 못하는 맑은 시내 소리를 들으며 시내 고기의 뛰노는 것을 보다가 산새의 울음을 듣게 된다.
… 아무려나 삼방 유협은 시(時)의 재료가 아니라 시요, 그림의 모델이 아니라 그림이다.
이 글은 서울(경성)을 떠나 목적지인 ‘명사십리’까지 가는 동안 기차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표현한 것 중의 일부분이다. 비록 극히 일부분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 얼마나 멋지고 문학적·예술적 향취가 넘치는 기행 수필인가. 유려한 필치와 절묘한 표현, 치밀한 시선과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깊은 사고력과 맑고 깨끗한 시심에 절로 감탄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원래로 산은 물을 임(臨)하여 더욱 기이하고, 물은 산을 만나서 다시 아름다운 것인데, 삼방 유협은 물을 지음쳐서 나누지 아니한 산빛이 없고, 산을 안고 돌면서 흐르지 않는 물소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 손으로 방울지어 떨어질 듯한 푸른 산빛을 움키려다가 미처 움키지 못하고 다시 가늘다가 높아지면서도 곡조를 이루지 못하는 맑은 시내 소리를 들으며 시내 고기의 뛰노는 것을 보다가 산새의 울음을 듣게 된다.”나 “아무려나 삼방 유협은 시(時)의 재료가 아니라 시요, 그림의 모델이 아니라 그림이다.” 등과 같은 표현은 참으로 멋지고 예술적이며, 수필의 멋과 품위를 한껏 높여 준다.
뿐만 아니라 한용운의 이 「명사십리행」은 여행 중에 보고 느낀 인간들의 모습과 삶의 애환, 인간의 속성,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 그릇된 관행과 모순된 현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민족의 설움,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한 인간적 갈등과 고뇌, 애증, 각성과 허무 등이 잘 나타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이 한 편의 글에는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다양하면서 심도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내용이 산만하거나 구성이 흐트러져 있지 않고, 오히려 알찬 내용과 치밀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비에 젖은 두어 坪 잔디밭 테두리에는 雜草가 우거지고 창연(倉冥)히 저무는 西녘의 먼 하늘에 化石된 太子의 (愛騎 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無心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는 듯 素眼한 白은 한결같이 없다가 있고 눈물 먹음은 明月이 中天에 외롭다.
太子의 몸으로 마의(麻衣) 걸치고 스스로 이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千年社殺을 亡쳐 버린 悲痛을 한 몸에 짊어진 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비어 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대장부 大丈夫의 흉리(胸裡)는 어떠했을까.
이 글은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쓴 「산정무한(山情無限)」의 일부로서 금강산을 여행하며 느낀, 마의태자(麻衣太子)에 대한 생각과 그로 인한 여러 상념들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수필의 형식과 특성이 많이 가미된 기행문이라 하겠다.
이렇듯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서 표현한 것이 기행문이다. 또한 여기에 수필로서의 요건과 특성, 문학적·예술적 향취를 덧붙여 쓴 글이 바로 기행문 형식의 수필, 또는 기행 수필인 것이다.
4. 논설문 형식
신문의 사설이나 논설, 시평이나 단평(短評), 칼럼, 소론(少論)이나 소고(小考), 심지어 논문이나 연설문 같은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수필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수필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단지 그 형식이나 모습 등이 이러한 것들과 유사해 보이는 수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수필을 흔히 논설문 형식의 수필, 또는 논설체 형식의 수필이라고 한다.
논설이란 사물의 이치를 들어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 등을 논하여 설명하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글을 말한다. 이를테면 신문의 사설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이러한 논설의 형식으로 쓴 글이 논설문이고, 논설에 쓰이는 특징적인 문체가 바로 논설체이다. 이에 비해 논문(論文)이란 어떤 사물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자기의 견해를 적어 놓은 글, 또는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글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수필에서도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 등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논설이나 논설문, 또는 논문에서는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 등을 보다 체계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또 객관성과 공정성을 명확히 지키며 설득력이 강해야 한다. 이와 함께 글 전체의 구성이나 짜임새가 치밀하고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하며, 논리적 통일성과 논리의 단계적 발전이 분명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수필에서도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논설이나 논문 등에서와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수필에서는 명확한 이론의 전개보다는 따스한 감성, 잔잔한 감동과 여운, 수필로서의 멋과 재미 같은 것들을 더욱 중시한다.
때문에 논설이나 논문은 좀 차갑고 냉철하며 이지적·계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또한 딱딱한 느낌이 들며, 재미도 없는 편이다. 반면에 수필은 논설이나 논문 등에 비해 따스한 느낌이 들고 인간적 내용과 문학적·예술적 향취를 풍긴다. 또한 논설이나 논문에 비해 한결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잔잔한 재미와 유머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역시 수필이 지녀야 하는 특성이자 수필의 본분이다.
또한 수필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더라도 좀 소극적이며 자기 고백적이며 은밀하고 내향적이나, 논설이나 논문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고, 보다 적극적이다. 목소리의 톤이 높고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강한 설득력이 있어야 하며, 보다 외향적·공격적이다. 더욱이 비판이나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한 치의 허점이나 모순을 보여서도 안 된다. 그만큼 치밀하고 완벽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점들만 본다면 논설이나 논문 등과 수필은 아주 상반되고 전혀 융합할 수 없는 상극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반된 특성을 융합하고 조화시켜 오히려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논설이나 논문 등의 독특한 특성이나 장점을 끌어들여 수필로서의 가치와 예술성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것이다.
5. 전기문 형식
전기(傳記)란 어떤 한 개인의 일생의 사적(史蹟)을 중심으로 하여 적어 놓은 기록, 또는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나 현존하는 인물이 지난 일생 동안의 행적(行蹟)을 그 당시 시대나 후세 사람이 기록해 놓은 글을 말한다. 그리고 전기 문학(傳記 文學)이란 이러한 개인의 사적을 주제로 하여 이룩해 놓은 문학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대개 역사적인 의미나 뜻을 지닌 인물의 생애와 사상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조상이나 가문의 인물들의 지나온 삶과 행적, 조상과 집안의 내력과 혈연관계 등을 중시하여 조상이나 가문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 널리 쓰여 왔다.
이를테면 행장(行狀) 또는 행상(行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지닌 행적을 적어 놓은 글을 말한다. 또 죽은 사람의 묘지에 새겨 놓은 비문(碑文)이나 묘지(墓誌) 등도 많이 쓰여 왔는데, 이런 것들도 전기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또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책들 속에 조상이나 가문의 훌륭한 인물들에 관한 행적을 전기 형식으로 짤막하게 기록해 놓는 경우도 있었다.
동양권에 비해 서양권에서는 조상이나 같은 가문 사람들에 대한 전기 형식의 글이 적은 편이었다. 대신 서양권에서는 영웅전이나 위인전 같은 역사 인물에 대한 전기 문학이 많이 쓰여 왔고, 특히 스스로 자신의 지나온 행적이나 사상 등에 관해 쓴 자서전(自敍傳)이 많이 쓰였다.
요즈음도 자서전은 동양권에서보다는 서양권에서 더욱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행적이나 공적 등에 대해 스스로 밝히고 과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동양 사회에서의 전통적 관습과 소극적인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동양권을 중심으로 하여 오랫동안 쓰여 온, 이러한 전기나 전기 문학 중에는 오늘날 우리가 수필 문학의 범주, 특히 전기문 형식이나 전기체(傳記體)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더러 발견된다. 물론 여기에 해당하는 옛날의 전기나 전기 문학은 그 숫자도 별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밀하게 본다면 오늘날의 수필의 범주에 넣기 어려우리만치 그 형식이나 형태가 오늘날과는 크게 다른 것들도 많다.
전기와 전기문 형식의 수필은 그 속에 작가의 모습이나 생각 등이 담겨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선 구분된다. 이와 함께 전기문 형식의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필로서의 가치와 특성, 문학성과 예술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작품 속에서 그리고 있는 인물에 대한 객관성과 공정성의 결여, 사실과 다른 이야기의 기술이나 과장된 표현, 허구, 왜곡이나 편견, 어떠한 목적의식이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보상 심리 등이 담겨져 있다면 이것은 결코 수필 작품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