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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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녀는 그 당시 오십 중반은 되었겠다.
그다지 친해질 여유도 없이 늘 안개 낀 영업장의 하루살이란 막차 탄 인생들이 모여 이런저런 아픔들을 행여 남에게 들킬세라 둘둘 말아 단 속곳 깊숙이 넣어 둔 채 직함만 왠지 힘겹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이 늘 누렇게 떠 있는 사내의 교육이랍시고 늘 반복해서 듣는 거로 시작되는 사람 잡는 소굴이라는 걸 한참 만에야 깨닫게 된 것도 나 역시 나사 하나쯤은 어디다 흘리고 왔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살아가는 비정한 도시의 건물 안에서 하루를 열어 가는 세월이었다.
남들은 직업 하나에 목숨 걸고 살아도 사네 죽네 하는 판에 나는 소위 투잡 세 겹 벌이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으니. 오전엔 상품 설명을 잘 듣고 사람을 잘 설득해야 하는 영업직으로 시간은 자유로웠다. 뭐니 뭐니 해도 실적이 중요했으니, 그리고 오후 2시부터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는 학원 수업이 시작되어 학원을 관리하고 경영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토요일과 일요일을 과외 수업했으니 그야말로 세 겹 벌이였던 셈이다.
내 생에 가장 폼 안 나게 가장 위태롭게 가장 큰 돌덩어리를 가녀린 어깨에 메고 살아야만 했던 때였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란 게 어떤 땐 시퍼런 바다가 입을 벌려 나를 끌어내리려 하는 벼랑 끝이요, 어떤 땐 뜬눈으로도 길바닥이 보이지 않는 안갯길을 한없이 걸어가는 그런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랬다.
그 당시 홍 여인을 만나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을 대하고 식당에서 앞 혹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간혹, 분위기에 끔벅하는 나이기도 한 사오공(사오십 대)인 우리들은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짧게나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녀는 멋을 잘 부렸다. 그다지 세련된 디자인은 아니었으나 간혹 반짝이가 들어간 옷이랄지 소매 끝이 레이스로 길게 늘어뜨린 옷이랄지 구두도 색깔 있고 높은 구두를 잘 신고 다녔다. 그리고 적극적이었고 영업에 있어서 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도 엄청났다. 자비를 들여 전단을 만들고 명함 역할인 스티커도 일일이 붙이는 작업을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하곤 했었다. 나는 두 달을 사무실에 나가면서 한다고 했으나 실적이 없어 윗사람 눈치에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 후 서너 달이 지났을까? 찬바람이 제법 뼛속까지 파고들 것만 같은 12월, 한 해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이른 새벽에 카톡! 카톡! 하는 소리에 휴대전화를 보니 부고 소식이었다. 홍 아무개라는데 누구의 부고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홍 아무개의 작은아들이 보낸 문자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 거였다. 해가 밝아오고 아침 9시쯤 돼서야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이정은 실장의 전화를 받고 그제야 홍 여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의 사인은 자살이란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 죽음 뒤에 알게 된 집안 사정이라는 게 정말 가슴이 먹먹한 건, 그녀도 나만치나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돌덩이를 짊어지고 살았었다고 하는 생각에 그녀의 죽음 위로 나의 모습이 겹쳤다. 두 아들이 초등학생 때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오고 간간이 아이들과 만나기도 했으나 자기 몸 하나 어데 의지할 곳 없었던 홍 여사는 사랑하는 아이 둘을 데려올 수가 없었단다. 안 해 본 거 없이 여러 일을 하며 살았으나 살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그간 아들 둘은 장성하여 작은아들은 결혼했으나 큰아들은 서른다섯이 되도록 결혼은커녕 직업조차 한 군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고를 쳐서 나오기가 일쑤요, 컴퓨터 게임에 빠져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방콕 생활을 한다고 했다. 큰아들과 함께 조그만 아파트에 전세 살면서 그동안 아이들에게 해 주지 못했던 죄책감에 최선을 다해 큰아들에게 잘해 주고 싶었던 홍 여사는 점점 전 남편의 행실을 닮아 가는 아들의 횡포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으나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를 내 병원에 입원까지 하면서 병원비와 생활고의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던지 자신의 안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거였다.
죽음에는 이유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자살이라는 죽음은 살아 있음이 죽음보다 더한 질고를 안은 삶이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무엇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생, 자신에게조차도 의지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갔을 때야말로 죽음으로 가는 게 아닌가! 마지막 순간까지 썩은 동아줄마저도 내려오지 않았던 그녀에게 삶은 그저 이성을 놓아버리고 입 안에서 생각 없이 질겅질겅 씹어 대던 껌 따위를 순간 뱉어버릴 정도로 속 시원히 버려도 좋을 만큼 미련이 없었던 비정한 세상과 작별을 한 것은 아닌지. 독한 구석이 없어서 이 독한 세상에서 버티지 못하고 가버린 그녀는 희망이 없는 삶이 바로 지옥이었으리라.
어쩌다 지하상가 옷가게를 지나치다 반짝이가 약간 들어간 원피스나 상의를 보면 그녀를 만난 듯 쓸쓸한 기분이 들곤 한다.